부여 의려·의라왕, 효령·숭신천황 되다

[일본속의 백제역사 발굴] 천황의 90%가 백제 왕자였다

등록 2005.12.31 17:01수정 2005.12.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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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허강 서쪽 대릉하 북쪽에 살던 부여국인들이 선비족의 전연국 모용외에게 망하여 부여국 의려왕이 부여국을 아들 의라왕에게 물려주고, 의려왕 자신은 대릉하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와서 효령천황이 되었다. 의려왕으로부터 부여국을 이어받은 의라왕은 중국 동진의 도움으로 재건하여 다시 요하 부근에 나라를 세웠으나, 거듭되는 모용외의 침략으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와 숭신천황이 되었다. 의라왕의 이동 행로 중에 298년 백제 책계대왕이 전사하였고, 300년에 신라와 교류를 하였다. 숭신천황은 대마도에 처음으로 임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318년 백제의 반격으로 숭신천황은 죽고, 의라신사가 세워졌다.

제 7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령천황(孝靈天皇; 261~316)은 부여에서 온 의려왕(依慮王)이다. 285년에 일본에 도래하여 316년에 55세로 죽었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주(定州)는 의려국 도읍이었다. 선비족 모용외에게 패하여 도읍이 위태하니 의려왕 생각에 백성들이 있으니 어디간들 성공하지 못하랴? 아들 부라(扶羅)를 불러 도읍을 맡기고 백랑산(白浪山; 백랑수였던 대릉하의 산)을 넘어 바다를 건너가서 왜인들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

혹은, 의려왕이 선비에게 패하여 바다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들은 북옥저로 도망했는데 이듬해 아들 의라가 부여왕이 되었다. 다시 모용외에게 침략당해 백성들이 끌려가니 의라왕이 수천명을 데리고 바다 건너 왜인들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

定州依慮國所都...依羅 率衆數千 越海 遂定倭人 爲王

이 의려왕의 이야기는 <진서/부여전(晉書夫餘傳)>에 기록이 있다. 285년, 모용외가 습격하여 쳐부수니 의려왕이 자살하였다. 단, <한단고기>에 의하면 일본으로 갔던 것이다. 진무제가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했는데 오랑캐에게 망했으나 그 후예들이 나라를 되살리도록 조치하라"고 말했다. 이는 선비족을 경계하기 위하여 선비의 배후인 부여를 살리려고 한 것이다.

285년경에 대릉하에 살던 부여국이 선비족의 침략으로 망하여서 의려(依慮)왕이 일본에 가서 왜왕(=효령천황이다)이 되었다. 의려왕이 왜왕 효령천황이 된 시기는 효원천황의 아들 타케하니야스(建波迩夜須毘古; 248~287)가 패전하여 전사한 287년부터, 효안천황의 황비인 오시카히메(押媛; 235~288)가 죽은 288년으로 고려된다.

그 후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依羅王)이 부여국을 정주 땅에 임시로 세웠으나 다시 선비족에게 약탈을 당하여 견디다 못해 역시 일본으로 가서 왜왕이 되었다. 여기서 나중에 도일한 의라왕은 아래에서 10대 숭신천황으로 확증이 되고, 의려왕은 7대 효령천황으로 고증된다.

부여국은 <요사/지리지>에서는 불열국(拂涅國 funie)이라고 하였고 요녕성 부신(阜新)시 서북 지방에 있었는데, 요동왕 공손탁(公孫度; 194년 사망)의 질녀를 왕비로 맞이했고 의려왕(285년)에 이르러 선비족 모용 외에게 쫓겨 일본으로 갔다. 부여는 고구려 태조대왕의 중국 침공을 저지한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의 후손이며, 위구대 이후에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의라(依羅)로 부여 왕위가 이어져왔다.

효령천황의 이름은 후토니(賊斗邇, 太瓊)이며 그의 수도는 구로다노이호토(黑田盧戶)궁이다. 이 분이 요서(遼西)의 부여(夫餘=阜新市)에서 선비족에게 패배하고 대릉하로부터 일본에 도래한 부여왕 의려왕(依慮王)이다.

그의 도성 려호궁(廬戶宮)은 의려(依慮)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효령천황은 나라현 북갈성군(北葛城郡) 마판릉(馬坂陵)에 묻혔다.

[주] 부신(阜新)에 있었던 불열국과 관련하여 효령천황의 이름 후토니(賊斗邇 = 후로알 = 홀알 = 太瓊)는 바로 불열(拂涅 funie)의 차자다. 불(拂fÚ)의 발음이 일본식으로 후루(賊斗), 후토(賊斗)가 되고, 열(涅)의 우리식 한자 발음이 얼(邇ěr), 현대 일본 발음으로는 니로 표기된 것이다. 후루(賊斗)는 홀(忽), 즉 크다는 뜻이 있으니 홀한강 홀한성, 홀승골이 그 예다. 그래서 불열이 후토니(賊斗邇)를 거쳐서 큰-옥알의 태-경(太-瓊)으로 바뀌는 것이다.

제 10세 천황으로 기록된 숭신천황(崇神天皇)은 미마기 이리히고 이니에(御間城入彦 五十瓊殖, 御眞木入日子 印惠; 277~318) 천황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진(東晋)에서는 선비족 모용외를 견제하려고, 중국의 장군들을 파견하여 의려의 아들인 의라(依羅)를 다시 세워 옥저(沃沮) 부근에 부여국을 재건하였지만, 누차 모용외(慕容嵬)가 부여국을 쳐서 자몽지야(紫蒙之野=대릉하 조양시에 두었던 영주營州 12술戌 중에 자몽술紫蒙戌이라는 초소가 있었다)를 빼앗고, 또 부여인을 약탈하여 중국에 노예로 팔아대고, 다시금 모용외가 북경 이북을 차지하고 끝내 중국 동진으로부터 모용외가 자신의 실력으로 제후로 인정을 받아버리고, 의라왕은 요하 동쪽으로 옮겨 심양시 북계 의로(懿路)에 다시 의라국을 세웠다. 의라왕이 옮겨가서 살던 곳을 신당서는 읍루(挹婁)고지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의라국 고지였다. 발해 정주라고 하였다.

현재의 지명도 의로(懿路; 심양시瀋陽市 신성자구新城子區)인데 읍루, 의라, 의로 세 지명이 모두 현지 발음으로 yilou에 수렴한다.

의로는 <대원일통지>에 의하면 그 아래에 모미현(慕美縣)이 있었으며, 모미현은 당나라 마미주(磨米州)였다. 고구려 미마나를 뒤집은 말이다. 마미주는 임나(任那), 즉 미마나(任那)에서 비롯된 말이다.

임나는 서우여 번한의 4세손 번한 임나(任那)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미마나(任那)의 이름을 뒤집어서 마미주(磨米州)로도 불리운 것이다.

의라왕은 도망하듯 일본으로 떠난 부여왕 의려와는 달리, 꽤 많은 신민과 군사들을 데리고 도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신기>에서 숭신천황은 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사도장군(四道將軍)을 파견하는데, 그 사도장군들 모두가 중국식 인수(印綬)를 가졌으므로, 이전까지 왜국의 형편과 비교되지 않는 선진 문명의 증거이다.

의라에게는 국새(國璽)가 있었다. <진서(晉書)>에 소개된 부여의 예왕지인(穢王之印)이다. 이 예왕지인, 줄여서 예인(穢印)이라고 불러서, <일본서기>에서 숭신천황의 이름자로서 이니예(印惠)가 기록되었던 것이다.

숭신천황 이름의 발음은 "이ㄴ예"로서 우리말에서 뒤집힌 것을 고려하면 예인과 일치한다. 또한 중국 발음으로 예(穢huÌ)와 혜(惠huÌ)가 일치한다.

게다가 의라(숭신)왕이 왜국 땅에 쌓은 첫 번째 제방을 의망지(依網池)라고 한다. 의라(依羅)의 라(羅)는 새 그물이라는 뜻이 있는데 바로 그물 망(網)과 호환(互換)되는 한자이다. 천라지망(天羅之網), 혹은 망라(網羅)라는 단어가 그 예다.

일본 발음은 망(網)과 라(羅)를 똑같이 "아마"라고도 읽는데 훈과 발음이 같은 것이다. 따라서 본래 이름은 의라지(依羅池)인데 후에 의망지(依網池)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의망지 유적지(依網池跡)에는 의라신사(依羅神社)가 남아있으니, 대의라신사 의망지적(大依羅神社 依網池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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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의라왕의 대의라신사와 의망지적비 ⓒ 자료사진

숭신천황이 만든 의망지 위에 훗날 의라신사를 세운 것이므로, 숭신천황이 부여 의라왕인 것이 다시 확인된다.

숭신천황은 나라의 기근으로 인하여,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야계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백제계 구수대왕(倭大國魂神)과 대물주신(大物主神)을 동시에 제사 지냈다. 즉 토착 백제세력을 선무한 것이다.

숭신천황은 국가적으로 호구 조사를 처음 실시하고 그에 따른 과역을 부과한 최초의 왕이다. 또한 그의 도읍을 처음으로 제도(帝都)라고 하였다.

숭신천황 말년에 임나국(任那國)에서 소나가시치(蘇那曷叱智)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숭신기>에서 임나는 축자국(筑茨國)과 2000리 떨어져 있고,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으며 신라의 서남에 있었다고 하였다. 즉 대마도다.

대마도에 인위가라(仁位加羅)가 있었고 최초의 임나가라였다. 인위(仁位)의 우리말 발음 이뉘가 숭신천황의 우리말식 이름 이니예와 같기 때문이다.

<수인천황기>에서는 이 임나인 소나가시치가 조공하러 와서 왜왕을 자칭하는 이쓰쓰히고(伊都都比古; 이도국의 왕)에게 억류되었다가 수인천황을 찾아오게 되었다.

대마도는 이미 숭신천황의 영토였고, 수인천황 천일창은 시마네현 동쪽 단마국(但馬國)에 있었다. 이쓰쓰히고는 축자(筑紫)의 숭신천황이었을 것이며 숭신천황의 사자로서 천일창을 회유하러 찾아간 것이 된다. 훗날 고구려가 대마도를 치고 임나연정을 설치하였다.

위를 종합하면 의라왕이 왜국 땅에 오면서 도중에 대마도를 중심으로 임나를 건설하였고 얼마 후에 사도장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천황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가야국이 어느날 갑자기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주장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인데, 그 근원을 숭신천황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임나대마도와 가라국은 원래 별개였고, 임나를 인위가라, 혹은 임나가라라고도 하였을 뿐이며, 이는 부여의 의라왕이 일본 땅에 도래하면서 중간 기착지에 명명한 지명이다. 이 이름이 확산되어 한반도 남부까지 임나가라로 발전한 것이다.

<고사기?에서 의라(숭신)왕에 이르러 왕의 서거연도를 처음으로 기록하였는데 무인년 12월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318년 12월에 해당하며 숭신천황 고분의 묘지 기록 무인년 12월 7일과도 일치한다.

의라의 요하 서쪽 불열국왕 즉위는 모용외에게 부왕이 침탈을 당한 285년경이었고, 동천(東遷)하여 요하 동북쪽의 의려국 고지 의로에서 개국하여 있다가 수년간 준비하여 298년부터 도일하게 되었다.

일본의 숭신(의라)왕기는 서기 300년에서 318년까지다. 숭신천황의 서거년인 318년에 대혼란이 있다.

318년 3월에 비류대왕의 아들이자 근구수대왕의 쌍둥이 형인 오호우스(大碓命)가 24세로 전사했다. 백제의 일본 탈환 전쟁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318년 6월에 백제 정벌군의 대장이자 비류대왕의 태자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가 전사했다. 이는 뒷장에 자세하다.

[주] 서기 298년경 백제 책계대왕의 전사는 맥인(貊人)과 한인(漢人)의 침입 때문이었으므로 바로 의라왕과의 전쟁 결과로 추정된다. 의라왕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라와도 교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기 300년경 <삼국사기> 신라 기림왕(基臨王) 때 기사에서 낙랑, 대방 양국(樂浪帶方兩國)이 귀복하였다는 것이다. 본래 낙랑 지방은 의라국이 세워져 있던 만주이다.

그런데 의라의 남천으로 한반도 남해안 일대에 새로운 낙랑(=낙안읍, 순천시), 대방(남원시)이 생겨났던 것이고, 즉 서기 300년에 의라왕이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한반도 남부 가야에 일부 영토를 잡고 뿌리내린 것이다. 따라서 그의 도일 시기도 300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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