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로(言路)의 나라, 희망을 노래하다

[서평] 김태완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를 읽고

등록 2006.01.09 13:39수정 2006.01.0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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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조선의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 이들 사이에는 길이 있었다. 신하가 왕에게 직접 말할 수 있는 길이 있었고 백성이 왕에게 직접 말할 수 있는 길도 있었다. 상소가 있었으며 신문고가 있었다.

언로(言路)였다. 그렇기에 이들의 언어는 하나의 길을 타고 왕에게 흘러갔다. 백성의 고통소리부터, 현자의 외침까지 모두다 왕의 귀로 흘러갔다. 왕은 흘러온 이 수많은 언어들을 풀어내고 해답을 만들어갔다.


조선은 언로(言路)의 나라였다. 그렇기에 길고 긴 500년 조선의 역사는 '칼'의 힘 아니라 '언어'의 힘이 만들었다. 너와 나, 왕과 신하가 주고받은 '언어'의 흐름이 조선을 살찌우고 키웠다. 때로는 현명하게, 때로는 그릇되게 부닥친 언어들이 조선을 '조선'다운 나라로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 선택은 왕이었다. 왕은 언로를 열린 귀로 또한 닫힌 귀로도 들을 수 있었다. 평가는 후대인의 몫이었다. 열린 귀는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종'출신 학자를 배출해 내었다. 닫힌 귀는 나라를 전쟁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영웅'마저 옥에 가두었다.

열린 귀와 닫힌 귀를 구분 짓는 기준은 왕의 귀에 흘러 들어오는 '언어'의 옥석을 가리는 현명함이었다. 과거시험은 언로의 발원(發源)이었다. 왕은 과거시험을 통해 옥석의 신하를 드러나게 했다.

왕은 여러 주제로 시험을 내었고, 그 문제에 대해 젊은 학자들은 높은 기치로 답했다. 절대 권위자 왕의 물음에 젊은 학자들이 내놓은 답은 원론적인 지식이나 노골적인 아부 따위가 아니었다.

<책문>은 바로 여기에 위치한다. 왕과 신하의 문답 속에 내놓은 수많은 대안과 해결책, 그들은 왕에게 현실적인 개혁의 안을 내놓았다. 또 때로는 비판자가 되어 왕에게 따끔한 충언을 가하기도 하였다. 현실 정치에 찌들어 낙심한 왕의 물음에 답한 젊은 학자들의 글에는 힘과 가능성이 살아 있었다.


"나라의 병은 왕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 임숙영

1611년 별시문과에서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광해군의 물음에 임숙영(1576-1623)이 던진 답은 충격적이지만 신선하다.


그는 광해군이 물은 의도에서 벗어나 왕과 왕 주변 인사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가려냈다. 죽음을 각오했다. 이 비장함 때문이었을까? 우의정 심희수가 그를 장원 급제시키려 했으나 다른 시관들이 반대했다. 결국 그는 병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임숙영의 대책을 읽고 분노했다. 또한 과거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삭과 파동이다. 4개월 후, 삭과 파동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선비가 던진 신선한 충격은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 중종

왕은 수없이 많은 선비들에게 물었다. 절박한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법을, 선비는 답했다. 선비가 목숨을 걸고서 말했던 것은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은 시대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 희망을 받아든 것은 왕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 조광조

왕을 비판하던 임숙영과 왕과 함께 이상을 만들고 싶었던 조광조가 믿고 있었던 것은 언로의 힘이 왕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꿈과 왕도정치는 이루지 못한 미완의 꿈이 되었지만 그들이 나누었던 가슴 벅찬 언어는 <책문>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살아 숨쉰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소나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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