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 모습으로 바뀌는 톈안먼 광장의 마오쩌둥. 조창완
결국 용띠 해의 비극은 별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졌다. 9월 9일 새벽 1시10분 '중국의 붉은 별' 마오쩌둥이 사망한 것.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처럼 비판의 소지도 많지만,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등이 만든 땅과 세계 정치에서 중국의 위치를 되찾은 것은 마오쩌둥의 힘이었다.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 창사(長沙)의 남부인 샤오산(韶山)에서 출생한 그는 장사꾼이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중국 고전이나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세웠다. 그 스스로 <실천론> <모순론> <지구전론> 등 중국 공산당의 투쟁방향을 설정하는 책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했다.
하지만 공산혁명 성공 이후 주변국의 비협조나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위험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같이했던 동료이자 동향 후배인 펑더화이를 실각시켰고,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밀어냈다. 또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인 문화대혁명(1966~1976)을 묵과한 것도 그의 실책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넘어서 근현대의 전환기에 갈기갈기 찢길 가능성이 다분했던 중국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내고 자주 국방을 만들어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마오쩌둥의 저력이라는 평이다. 비록 정치투쟁은 했지만 덩샤오핑의 마지막 숨줄인 당적을 유지시켜 훗날 부활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 스스로도 마오의 방향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 | | 마오쩌둥 사후...화궈펑과 덩샤오핑 | | | | 죽음에 임박한 마오쩌둥에게 뒤를 보장받은 총리 화궈펑(華國鋒)은 원로 예젠잉(葉劍英), 녜룽전(聶榮臻) 등과 함께 문화대혁명을 이끌던 장칭(강청)을 비롯한 4인방을 몰아낼 준비를 했다. 이 작전은 마오의 부장인 군사령관 왕둥싱(汪東興)이 주도해 10월 6일 4인방을 체포했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종결이 선포됐다. 마오의 자리는 화궈펑이 차지했다. 하지만 마오의 복제품 같았던 화궈펑은 험난한 정치 투쟁을 이기기에 부족했다. 잠룡(潛龍) 덩샤오핑이 광둥성의 원로인 쉬스유(許世友)의 도움으로 부주석, 정치국 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등에 복직했다. 1977년 7월 복직된 덩샤오핑은 5년에 걸쳐 화궈펑과의 경쟁했다. 화궈펑은 여전히 마오쩌둥의 방식을 고집한 반면 덩샤오핑은 해외를 순방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등 세련된 기법으로 정치에 나섰다.
서서히 문화대혁명의 잔재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시 79년 위기가 찾아왔다. 원로들은 권력을 분산시키는 게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덩사오핑에 무게를 실어줬다. 1981년 덩샤오핑이 실권장악에 성공하면서 중국은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 | | | |
마오쩌둥의 죽음은 빙마용(兵馬俑)과 많은 사람들을 순장했던 진시황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순장자를 동반하며 한 시대의 종결을 가져왔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도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박스참조>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인의 사랑은 여전하다. 그의 초상화는 톈안먼 광장 중앙에서 날로 변화하는 중국과 중국인들을 굽어보고 있으며 광장 남쪽에 위치한 기념관에 누워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의 예방을 받고 있다.
1976년 이후... 중국은 달라졌다
격동의 1976년 이후 중국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했다. 1976년 중국의 총수입은 72억6500만 달러였고 총수출은 60억1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 관세청인 해관총서에 따르면, 2005년 무역액만 1조4200억 달러로 전년 대비 23.2% 성장한 수치다. 그리고 무역수지 흑자는 전년대비 3배 폭증한 102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30년 만에 중국의 경제규모가 100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미국과의 헤게모니 싸움 등 여러가지 변인이 있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앞두고 있는 중국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중국 역사 주기를 30년으로 볼 수는 없지만 큰 흐름은 대략 30년 간격으로 왔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1840년 아편전쟁, 1911년 신해혁명, 1949년 공산혁명, 1976년 공산 1세대의 퇴장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지금의 추세로 보면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세계 양대 헤게모니로 서는 것을 부인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중국 현대사를 바꾼 사건인 마오쩌둥과 주더의 만남. 징강산 기념관 사진. 조창완
반면 앞으로 30년 동안 중국이 직면할 문제도 적지 않다. 우선 거대한 빈부 격차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빈부격차의 문제는 사회계층의 차이기도 하지만, 중산층이 없다는 것은 적절한 소비층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정치사상 등의 자유 요구를 어떻게 연착륙시킬 수 있는가도 문제다.
중국 사회주의가 새로운 중간단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진행하는가는 과제로 남아있다. 이 때문에 유교를 중심으로 한 국학(國學)의 개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세계를 주도하는 양대 강국으로서 리더십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도 문제다. 이런 흐름은 자국의 능력도 있지만 미국은 물론이고 주변국과 같이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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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여행 대표, 한국문화관광미디어 특별취재본부장(상무). 저서 <중국은 있다>,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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