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그해 중국의 운명이 바뀌었다

[해외리포트] 저우언라이-주더-마오쩌둥의 죽음 그후 30년

등록 2006.01.30 19:43수정 2006.01.3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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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10년가량이 지난 1976년 새해 첫 아침. 원래 용띠 해에는 나쁜 일이 있어서 조심해야 했음에도 10년 동안 권력을 좌우하던 4인방은 너무 기고만장했다. 첫 해를 여는 인민일보의 권두시부터 그다지 상서롭지 못했다.

그해 권두시로 1965년 마오쩌둥이 개작한 <새들의 문답>(念奴嬌 鳥兒問答)이 실렸는데 그 내용에는 "똥 뀌는 소릴랑 집어치우게. 두고 보시라, 하늘은 기필코 뒤집어질 터이니"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시는 신문에 실리기 전에 혼수상태를 막 벗어난 저우언라이(주은래)에게 읽혀졌고,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 한밤중에 울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 <새로운 황제들>(솔즈베리 지음. 다섯수레. 2000) 중에서


비단 솔즈베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1976년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한 해로 평가한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심상치 않은 권두시로 시작한 그해, 중국의 현대를 일군 가장 중요한 인물 세 명이 영면했고, 지금까지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재앙이 일어났다. 공산혁명 이후 그때만큼 중국 대륙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때도 드물었다.

가장 사랑받은 지도자 저우언라이 사망

루산회의차 들른 후 학교를 방문한 저우언라이.
▲루산회의차 들른 후 학교를 방문한 저우언라이. 조창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그리고 주더

마오쩌둥은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서구의 공산혁명과 달리 농민 중심의 철저한 공산혁명을 모토로 중국 혁명을 이끌어냈다. 엄청난 카리스마와 광범위한 교양을 갖고 있었지만 오랜 투쟁은 그를 아집속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반면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유학파답게 지식을 겸비한 지장이었다. 대장정의 초반기에 외국 군사 고문들과 뜻이 맞아 주도권을 잡았지만, 중국적 현실로 실패한 후 철저히 마오쩌둥의 막후 역할에 충실했다.

주더는 군사학교 출신의 군벌과 같은 성격을 가졌지만 공산주의를 알게된 후 총사령관이라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만년에 펑더화이나 류샤오치 등의 동료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구원의 손을 내밀지 못했고, 그 역시 문혁의 풍파 속에서 죽었다.
<새들의 문답>이 발표되고 일주일 후인 1월 8일, 당시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던 정치가 저우언라이(주은래. 周恩來)가 영면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 주더(주덕. 朱德)와 함께 중국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마오가 중국공산당 창당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면, 저우언라이와 주더는 1927년 8월 1일 난창 봉기 후 합류해 마오와 함께 당을 이끌었다. 마오가 지도자였다면 주더는 군대의 총사령관이었고, 저우언라이는 국제 문제를 비롯한 대외 접촉에서 두각을 나타냈다(왼쪽 박스 참조).

저우언라이의 죽음 이후 3월 만주에는 많은 별똥별이 떨어졌고 민심은 뒤숭숭해졌다. 그리고 중국은 잠시 마오쩌둥 중심의 극좌적 조류에 휘말렸다. 3월 25일 문화대혁명을 촉발했던 상하이의 <원후이바오>(文匯報)는 저우언라이에 대한 비판 기사를 쏟아냈다. 이 신문은 저우가 주자파(走資派)라며,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마오보다 더 사랑받았던 저우에 대한 이 공격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시민들은 항의의 의미로 30일부터 톈안먼 광장에 그를 추모하는 화환을 바치기 시작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중국 정부는 청명절이던 4월 5일 무자비한 체포로 시위를 잠재웠다. 이것이 바로 '베이징의 봄'으로 불리는 1차 톈안먼 사태, 4·5운동이었다.

평가절하 된 저우언라이의 생애


회의에서 보고하는 저우언라이 모습.
▲회의에서 보고하는 저우언라이 모습.
죽어서도 톈안먼 사태를 일으켰던 저우언라이는 향후 30년 동안 중국 국민들의 영원한 총리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유산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은 출생지인 장쑤성(江蘇省) 화이안(淮安)과 조상의 집인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그가 대학을 다닌 제2의 고향 톈진(天津)이다. 루쉰(魯迅),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 뛰어난 지성을 낳은 사오싱에서 그의 자취는 빛나지 않지만 화이안이나 톄진진에서 저우언라이는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의 관심과는 달리 그는 정부 차원에서는 그다지 부각되는 인물은 아니다. 그의 30주기였던 2006년 1월 8일자 신문에서도 그에 대한 기사는 찾기 힘들었다. 추도행사라고 해도 <저우언라이 만년의 세월>(周恩來的晚年歲月) <저우언라이 화전>(周恩來畵展) 기념판 출간식 정도였다.

지난해 <저우언라이 만년의 세월>이 겪은 홍역은 여전히 저우언라이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출간된 후 내용이 문제가 되어 출판금지를 당했다가 다시 출간되고 있다. 대장정 초반기 외국 군사고문들과 실권을 장악했을 당시 실패한 점, 59년 펑더화이 공격으로 시작된 동지들 탄압시 소극적 자세를 보인 점, 문혁 당시 류샤오치 공격 때 미온한 자세를 보인 점 등이 저우언라이의 실책으로 분류되지만, 이 문제를 인정할 경우 마오쩌둥과의 실책과 연결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다.

그러나 일반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사랑은 그칠 줄 모른다. 많은 중국인들은 잘생긴 외모와 지성, 세계 정치계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저우언라이의 외교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마오쩌둥 앞에서는 영원한 2인자일 수밖에 없는 그의 인생에 대한 동정심 또한 있다.

옌안에 있는 주더의 옛집.
▲옌안에 있는 주더의 옛집. 조창완
한편 저우언라이와 마오 옆에 있던 주더도 7월 7일 세상을 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편을 즐기던 부르주아에서 중국 혁명의 최전방에 섰던 사령관이 되기까지 주더의 삶은 한 편의 소설이었다. 영원한 총사령관 주더는 당시 정국만큼이나 쓸쓸하게 눈을 감았고 그의 죽음은 그다지 주목받지도 못하는 사건이 되어 버렸다.

역사상 최악의 재앙 탕산 대지진

1976년은 두 별의 몰락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7월 26일에는 허베이(河北)성 인구 백만의 도시 탕산(唐山)시에서 시작된 지진이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공식적인 사망자만 24만2천 명(14만8천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을 낸 탕산 지진은 200km 떨어진 베이징과 톈진의 오래된 가옥까지 상당수 부숴버릴 만큼 강력했다.

도로, 철도 등 대부분이 파괴된 중국을 전 세계 나라들이 구호하겠다고 나섰지만 중국은 문을 닫아버리고 스스로 구원하는 길을 택했다.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을 거친 중국이 만약 외국에 문호를 개방할 경우 분열상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 덩샤오핑 등 실용적인 노선을 가진 이들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탕산의 비극을 수습했다.

탕산대지진의 극복을 기념해 세워놓은 항진기념비.
▲탕산대지진의 극복을 기념해 세워놓은 항진기념비. 조창완
대지진의 악몽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탕산은 완벽하게 다른 도시가 됐다. 지금은 도자기와 시멘트를 바탕으로 베이징과 친황다오로 이어지는 경제권 중간지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인구도 급증해 현재 71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삼십 년 전 일어났던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 전시관을 세우고 허베이광치쉐위안(지금의 허베이이공학원) 도서관 건물을 비롯해 지진으로 무너진 일곱 군데의 잔해를 보존하고 있다.

중국의 붉은 별 마오쩌둥의 영면

매년 새 모습으로 바뀌는 톈안먼 광장의 마오쩌둥.
▲매년 새 모습으로 바뀌는 톈안먼 광장의 마오쩌둥. 조창완
결국 용띠 해의 비극은 별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졌다. 9월 9일 새벽 1시10분 '중국의 붉은 별' 마오쩌둥이 사망한 것.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처럼 비판의 소지도 많지만,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등이 만든 땅과 세계 정치에서 중국의 위치를 되찾은 것은 마오쩌둥의 힘이었다.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 창사(長沙)의 남부인 샤오산(韶山)에서 출생한 그는 장사꾼이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중국 고전이나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세웠다. 그 스스로 <실천론> <모순론> <지구전론> 등 중국 공산당의 투쟁방향을 설정하는 책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했다.

하지만 공산혁명 성공 이후 주변국의 비협조나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위험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같이했던 동료이자 동향 후배인 펑더화이를 실각시켰고,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밀어냈다. 또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인 문화대혁명(1966~1976)을 묵과한 것도 그의 실책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넘어서 근현대의 전환기에 갈기갈기 찢길 가능성이 다분했던 중국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내고 자주 국방을 만들어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마오쩌둥의 저력이라는 평이다. 비록 정치투쟁은 했지만 덩샤오핑의 마지막 숨줄인 당적을 유지시켜 훗날 부활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 스스로도 마오의 방향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마오쩌둥 사후...화궈펑과 덩샤오핑

죽음에 임박한 마오쩌둥에게 뒤를 보장받은 총리 화궈펑(華國鋒)은 원로 예젠잉(葉劍英), 녜룽전(聶榮臻) 등과 함께 문화대혁명을 이끌던 장칭(강청)을 비롯한 4인방을 몰아낼 준비를 했다. 이 작전은 마오의 부장인 군사령관 왕둥싱(汪東興)이 주도해 10월 6일 4인방을 체포했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종결이 선포됐다. 마오의 자리는 화궈펑이 차지했다. 하지만 마오의 복제품 같았던 화궈펑은 험난한 정치 투쟁을 이기기에 부족했다. 잠룡(潛龍) 덩샤오핑이 광둥성의 원로인 쉬스유(許世友)의 도움으로 부주석, 정치국 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등에 복직했다. 1977년 7월 복직된 덩샤오핑은 5년에 걸쳐 화궈펑과의 경쟁했다. 화궈펑은 여전히 마오쩌둥의 방식을 고집한 반면 덩샤오핑은 해외를 순방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등 세련된 기법으로 정치에 나섰다.

서서히 문화대혁명의 잔재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시 79년 위기가 찾아왔다. 원로들은 권력을 분산시키는 게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덩사오핑에 무게를 실어줬다. 1981년 덩샤오핑이 실권장악에 성공하면서 중국은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죽음은 빙마용(兵馬俑)과 많은 사람들을 순장했던 진시황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순장자를 동반하며 한 시대의 종결을 가져왔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도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박스참조>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인의 사랑은 여전하다. 그의 초상화는 톈안먼 광장 중앙에서 날로 변화하는 중국과 중국인들을 굽어보고 있으며 광장 남쪽에 위치한 기념관에 누워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의 예방을 받고 있다.

1976년 이후... 중국은 달라졌다

격동의 1976년 이후 중국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했다. 1976년 중국의 총수입은 72억6500만 달러였고 총수출은 60억1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 관세청인 해관총서에 따르면, 2005년 무역액만 1조4200억 달러로 전년 대비 23.2% 성장한 수치다. 그리고 무역수지 흑자는 전년대비 3배 폭증한 102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30년 만에 중국의 경제규모가 100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미국과의 헤게모니 싸움 등 여러가지 변인이 있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앞두고 있는 중국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중국 역사 주기를 30년으로 볼 수는 없지만 큰 흐름은 대략 30년 간격으로 왔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1840년 아편전쟁, 1911년 신해혁명, 1949년 공산혁명, 1976년 공산 1세대의 퇴장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지금의 추세로 보면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세계 양대 헤게모니로 서는 것을 부인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중국 현대사를 바꾼 사건인 마오쩌둥과 주더의 만남. 징강산 기념관 사진.
▲중국 현대사를 바꾼 사건인 마오쩌둥과 주더의 만남. 징강산 기념관 사진. 조창완
반면 앞으로 30년 동안 중국이 직면할 문제도 적지 않다. 우선 거대한 빈부 격차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빈부격차의 문제는 사회계층의 차이기도 하지만, 중산층이 없다는 것은 적절한 소비층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정치사상 등의 자유 요구를 어떻게 연착륙시킬 수 있는가도 문제다.

중국 사회주의가 새로운 중간단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진행하는가는 과제로 남아있다. 이 때문에 유교를 중심으로 한 국학(國學)의 개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세계를 주도하는 양대 강국으로서 리더십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도 문제다. 이런 흐름은 자국의 능력도 있지만 미국은 물론이고 주변국과 같이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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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여행 대표, 한국문화관광미디어 특별취재본부장(상무). 저서 <중국은 있다>,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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