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서 술을 마시면 사람에 취한다

[서평] 술 냄새, 사람 냄새 나는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등록 2006.01.31 09:37수정 2006.02.01 15:11
0
원고료로 응원
넥서스북스
누구에게나 '나만의 술집'이 하나쯤은 있다. 꼭꼭 숨겨 놨다가 맘에 맞는 이를 만나면 꼭 데리고 가고 싶은. 내게도 그런 곳이 있다. 일요일 늦은 오후 집 근처 관악산에 올랐다 노을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들르는 '주막집'.

사댕이무침에 시원한 통막걸리 한 잔. 모르긴 몰라도 20대 이후 '나를 키운 팔 할'은 그 주막집에서 나왔다. 주인 아줌마는 올해로 오십 줄, 첫째 아들이 막 대학에 입학했단다.


단골들에겐 남은 술을 보관해 두고 그때 그때 마실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지는데, 주인 아줌마에게 내가 이를 제안했고 난 그 특혜의 첫번째 수혜자였다(막걸리의 유통기한이 짧다는 것을 감안하면 '남은 술'이라고 해도 늘 새로 내왔을 터다).

이것저것 잴 것 없이 그냥 마시고 싶을 때는 혼자 들어와 벌컥벌컥 들이키기만 하면 된다. 통막걸리는 '잔'으로 파는데, 한 잔만 마실 땐 기본으로 나오는 시큼한 겉절이만으로 안주가 충분하다.

또 하나 기막힌 안주는 녹두로 빚은 빈대떡. 과연 수지가 맞을까 의심이 가지만 놀라지 마시라. 햄버거 마냥 두꺼워도 한 장에 단돈 3000원. 보통 빈대떡 부쳐서 통막걸리 한 잔 걸쭉하게 들이키고 나면 어느새 해는 기웃기웃, 땅거미가 완전히 드리워진다. 바로 그 때 가게 문을 나서는 게 가장 좋다. 값을 치르고 문을 나서면서 트림 한 번 내뱉고 나면 '태양이 사라지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런 술집이 어디 더 없을까? '술보다 더 매혹적인 술집순례기'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박미향 저, 넥서스북스 간). 이 책을 훑어보면 위 '주막집'과 꼭 닮아 있는 '그들만의 술집'을 둘러볼 수 있다.

주간지 사진기자가 담은, 지친 군상들의 49군데 술집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의 사진기자로 활동 중인 저자는 일상에 지친 군상들로 닳고 닳은 술집 49군데를 골라내 맛깔스런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저마다 술이 생각나는 날이면 주저없이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곳들이다.

이 책은 크게 3장으로 나뉜다. 먼저 1장에서는 술맛이 좋은 집부터 소개한다. 솔잎주, 국화주, 더덕주 등 몇 년을 묵혀 만든 전통주가 일품인 '시인통신', 쫀득쫀득한 벌교 꼬막과 향긋한 녹차막걸리로 유명한 '여자만', 남미 칵테일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쿠스코' 등이 눈에 띈다.


2장에 소개된 술집들은 모두 푸짐한 안주와 주인장 인심이 돋보이는 곳들이다. 중국 산둥 요리가 기각 막힌 '서궁'을 비롯해 주머니가 가벼운 날, 마음도 가볍게 갈 수 있는 '육미'가 눈에 띈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주거니 받거니 잔을 기울이다 보면 금세 주인장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칠갑산'도 푸짐한 안주로 술꾼들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뭔가 특별하고 이색적인 분위기의 술집을 찾는다면 3장을 뒤적거리면 된다. 마치 해변 방갈로에 술을 마시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방갈로'. 야심한 밤, 패션쇼와 마술쇼가 한꺼번에 펼쳐지는 '드레스 코드'. 그리고 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환상적인 낙조를 뒤로 사랑고백하기에 그만인 '재즈' 등이 시선을 끈다.

술 있는 곳에 우리네 인생 이야기 빠질소냐

술이 있는 곳에 우리네 남루한 인생 이야기가 빠질소냐.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이 여기에 있다. 책에 소개된 술집 주인장들의 우여곡절 살아온 이야기, 여기에 때론 술집과 얽힌 저자 개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까지 곁들여지다 보면 술집순례기 보다는 차라리 에세이에 가깝다.

살짝 혼자보기 아까운 구절을 들여다보자.

"새해 첫날부터 더덕더덕 딱지 붙은 상처를 잡아떼는 충격을 겪는다면 인생이 너무 비극적이다. 가장 악랄하고 치졸하게 비관적이다…. 지금은 칼로 베인 듯한 고통, 품었던 이상이 무너져 붉은 피를 온몸에 뿌려야 겨우 참아낼 수 있는 슬픔이 그립다. 대장 깊숙한 곳까지 폭탄주를 들이부어야 겨우 웃을 수 있는 그런 막막한 비애가 보고 싶다."(P 127)

"그녀의 '몽환'. 지하에는 장예모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긴 천이 늘어져 있고 1층과 2층의 벽과 모퉁이에는 아시아 궁전에서 고이 간직하고 있을 법한 물건이 얌전히 앉아 있다. 심지어 손님들이 성공을 기원하며 부쳐준 부적들마저 소품으로 보인다. 체면 자체인 우리네 문짝이 어찌 그리 퇴폐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 새삼 놀랐다."(P 266)

"한쪽 벽면이 온통 유리로 채워진 '도마뱀'은 그로테스크한 꿈 속이다. 세상 공기가 차단된 네모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간을 잃어버린다. 에로틱한 SF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른 술집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냉정한 까만 바닥과 천장, 그 사이로 열정의 붉은색들이 떠돈다. 열정과 냉정 사이, 술이 흐른다. 사랑도 함께…."(P 272)

늘 이런 식이다. 모두 술과 사람을 대하는 저자의 철학이 녹아 있는 대목들이다.

사진기자답게 각 장의 사진마다 그 집을 대표하는 술, 안주, 독특한 실내 분위기를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글 읽기의 즐거움을 십분 더해주는 요인이다.

책을 내면서 조명장비 두 세트를 들고 밤마다 미친 여자처럼 49군데 술집을 훑고 다녔다는 저자. 카메라 장비까지 포함하면 거의 쇳덩이 한 트럭을 들고 다닌 셈이다. 오늘 저녁, 이 책에 소개된 어딘가로 찾아가 술 한 잔이 주는 따뜻한 온기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 술보다 더 매혹적인 술집 순례기

박미향 지음,
넥서스BOOKS, 200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 대통령 방문 후 '롤 모델' 된 나라? 자가율 90%의 함정 이 대통령 방문 후 '롤 모델' 된 나라?  자가율 90%의 함정
  2. 2 김, 굴 등 'K-수산물' 위기... 세계 시장에서 설 자리 잃을 수도 김, 굴 등 'K-수산물' 위기... 세계 시장에서 설 자리 잃을 수도
  3. 3 [단독] 김성태 불출석사유서 "이재명 공범 아니다"... 지난해 8월 밝힌 내용 [단독] 김성태 불출석사유서 "이재명 공범 아니다"... 지난해 8월 밝힌 내용
  4. 4 "대선 후보감이 왜 여기에?" "당선 확률 엄청 높죠"...평택을 민심이 본 조국 출마 "대선 후보감이 왜 여기에?" "당선 확률 엄청 높죠"...평택을 민심이 본 조국 출마
  5. 5 "내가 영원히 하는 것도 아닌데..." 이 대통령 이 말,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영원히 하는 것도 아닌데..." 이 대통령 이 말, 주목해야 합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