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세뱃돈을 이렇게 많이 주세요?"

등록 2006.01.31 15:30수정 2006.02.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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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추석을 두고 민족 최고의 명절이라고 부른다. 내가 어릴 땐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날은 한 해의 첫 날이라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뿐 아니라(어릴 땐 나이 먹는 게 왜 그리 좋던지), 어른들에게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 날이라 추석에 비하면 열 배는 더 좋은 명절이 아닌가. 거기에 비하면 추석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어린 꼬마에게는 큰 감흥이 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마냥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설날보다 가을의 정취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는 추석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세뱃돈을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이 된 것도 설날이 부담스러운 이유다.


올 해도 어김없이 설날 아침 부모님께 세배를 드렸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뱃돈을 받고 입이 함박만해졌다. 부모님은 우리 부부에게도 봉투를 하나 내미셨다. 당신께서는 어른이 된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늘 세뱃돈을 주신다. 물론 며느리가 용돈하시라고 그 전날 드린 돈에서 떼어주시는 것이겠지만 그게 오고 가는 정이다 싶다.

그런데 올 해는 세뱃돈이 좀 많다. 아니 조금 많은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많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쳐다만 보고 있었더니, 아버지께서 "요즘 고생이 많지? 아이들도 커 가고 해서 돈 쓸 데가 많을 거야. 아이들 학용품 사는 데 보태라"고 하신다. 도무지 왜 그러시는지 모를 일이다. 어제 드린 용돈이 적어서 그러시는 걸까. 이야기가 한참을 오고 간 이후에야 오해가 풀렸다. 사연은 이렇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첫 월급을 받던 때부터 지금까지 십 수년 동안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많지는 않지만 매달 빼먹지 않고 일정 금액을 통장에 입금해 드렸다. 결혼한 이후에도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계속 용돈을 드렸다(처가에는 아직 정기적으로는 용돈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 반성하고 있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부모님은 가끔 통장정리를 하면서 입금 여부를 확인하시는데, 통장을 보니 지난해 9월을 마지막으로 입금이 안 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용돈을 보내던 아들이 근 4개월 이상 아무 이야기 없이 입금을 하지 않았으니, 당신께서는 아들이 요즘 살림이 어려운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신 것이다.

어려운 형편에 말도 못하고 속앓이를 했을 아들이 걱정되어 그동안 모아 놓으셨던 돈을 아들 손에 쥐어 주셨던 것이다. 하지만 난 넉넉하지는 못 해도 부모님 용돈을 끊어야 할 처지는 아니다. 되려 지난해 진급을 해서 용돈을 올려드려야 하는 처진데 그러지 못해 죄송한 마음만 갖고 있는 중이다.


인쇄가 중복되어 거래내역을 알아보기 힘든 통장
▲인쇄가 중복되어 거래내역을 알아보기 힘든 통장 이봉렬
분명 매달 월급날에 맞춰 용돈을 입금시켰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아버지께서 통장정리를 하셨는데 기계가 오동작을 일으켰는지 거래 내역이 통장의 빈칸에 기록되지 않고, 그 전에 기록된 페이지에 이중으로 기록된 것이다. 통장을 자세히 보니 페이지 윗 부분에 지난 10월 이후에 입금한 내역이 그 전 기록과 함께 찍혀 있었다.

연로하셔서 눈이 별로 좋지 않으신 두 분은 아무리 통장정리를 해도 작년 9월 이후의 거래내역을 찾을 수가 없으니 내가 입금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신 것이다. 전화로 "이 달엔 입금이 안 됐더라"는 말 한 마디면 쉽게 해결 될 문제였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아들 마음 다칠까봐 설날까지 꾹 참고 계시다가 아들 손에 봉투를 쥐어 주신 것이다.


부모님께 무작정 받기만 하던 어린 시절은 가고, 이젠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아니다. 자식은 언제까지나 자식이다. 자식이 부모님을 모시는 게 아니라 부모님이 곁을 떠나실 그때까지도 부모님이 자식을 키우는 거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게 최고의 명절은 추석이 아니라 설날이다. 내 세배를 받아 주실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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