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길 떠나려는 손석희 아나운서에게

어디서든 자유혼 품을 사람... 아직도 잊지 못하는 당신의 '고백'

등록 2006.01.31 18:50수정 2006.02.01 17:0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손석희 아나운서
▲손석희 아나운서 남소연
겨울비 머금은 하늘마냥 마음 속 한구석에서 묘한 기분이 퍼져간다. 손석희 MBC 아나운서의 거취와 관련된 소식을 접하고부터다. 22년을 다니던 방송사를 떠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싶다는 그. 회사 고위관계자들은 그의 새로운 출발을 적극 만류하고 있다 한다.

한 회사를 다닌 것도 아니다. 세상 시름 접고 소주 한잔 나눠 본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마치 먼 길을 함께 걸어온 이와 새로운 고갯길에서 헤어지는 듯하다. 그럴 만한 나만의 이유가 있다.


'스타'일 때도 '투사'일 때도, 그는 아름다웠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텔레비전 화면에서 그를 처음 봤다. 그 날이 언제인지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귀공자처럼 깔끔한 외모, 정갈한 말매무새가 무척 맘에 들었다. '비춰지는 그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1992년. 파란 색 수의를 입고 법정으로 끌려가는 그를 봤다. 손목엔 차가운 은빛 수갑이 번뜩이고 있었지만 그는 예의 차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게 다가온 분장하지 않은 그의 첫 모습은 충격이었다.

세상은 "'스타 아나운서'가 '투사 아나운서'가 됐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공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저런 면도 있네…". 그리고 그만이었다.

그를 다시 조우하게 된 것은 어느 해 이른 새벽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도 좋아하는 곡이라며 'Desperado'를 틀었다.


“자유, 자유란/그저 사람들이 말로만 떠드는 것일 뿐(and freedom, oh freedom/well, that just some people talking)"이라는 노래 가사가 귀에 징을 박았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대체 손석희란 사람은 어떤 이일까?

며칠이 지나 그가 썼다는 수기 <풀종다리의 노래>를 한권 샀다. 지금으로부터 십년도 지난 일이다. 하지만 난 지금도 그 책의 한 장면을 잊지 않고 있다. 아니 그의 고백이 지금껏 내가 살아가는 데 한 나침반이 되고 있다.


그의 고백은 간단했다. 그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촬영을 마치고 한 식당엘 들어갔단다. 일행 중 한 명이 식당 아주머니에게 그를 가리키며 "이 사람 모르냐"고 물었지만 아주머닌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모른다"고 했다고. 다시 또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매한가지 "모른다" 뿐이었다.

세상천지 모든 이가 다 알아줄 것 같은 자신을 모르는 이도 있다고 그는 담담하게 고백했다. 속된 표현으로 "건방떨지 말자"는 얘기를 이보다 무섭게 일갈한 이를 난 여태 만나질 못했다.

그는 교만해진 나를 후려치는 회초리였다

그 책을 읽은 후 난 한 곳의 직장과 한 곳의 시민단체를 거쳐 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고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시민운동을 할 때도 난 그 책의 한 구절을 잊지 않았다.

특히 오마이뉴스에 들어온 이후엔 필사적으로 잊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다. 창간 초기에야 오마이뉴스 자체를 아는 이가 없어서 건방떨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나 한해 두해 가면서 오마이뉴스 이름값도 올라가고, 여기저기 알아주는 이도 많아졌다. 어느 순간 어줍잖게 건방을 떠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며, 혹은 <100분 토론>을 진행하는 그를 브라운관 너머로 바라보며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결실을 맺어 고개를 낮춘 벼 앞에서 푸른 기도 털어내지 못한 생보릿대가 교만을 떤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그는 늘 나와 마주하는 거울이었다. 늘 그렇게 브라운관 속에서 웃고 있었지만 교만해진 나를 후려치는 회초리였다.

이제 그가 새 길을 떠나려 한다. 3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직하더라도 방송은 계속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난 그가 Desperado의 자유혼과 낭만을 품고, 풀종다리의 고백을 잊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내가 거울 속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손석희는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간만에 'Desperado'를 들으며 생맥주 한 잔 마시고 싶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대장동 첫 대법 판결, 김만배 무죄 확정... 남욱 신빙성 배척 대장동 첫 대법 판결, 김만배 무죄 확정... 남욱 신빙성 배척
  2. 2 장거리 시장 뛰어든 저가 항공… 20만 원대에 유럽 가보니 장거리 시장 뛰어든 저가 항공… 20만 원대에 유럽 가보니
  3. 3 "두목님"에 "쌔리라"까지... 이 팀 보려고 전국을 다 돌았습니다 "두목님"에 "쌔리라"까지... 이 팀 보려고 전국을 다 돌았습니다
  4. 4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있다"는 윤석열, 서글펐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있다"는 윤석열, 서글펐다
  5. 5 이진숙 청문회 보면서 무너진 기대...교사출신 백승아 의원이 해야할 일 이진숙 청문회 보면서 무너진 기대...교사출신 백승아 의원이 해야할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