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술'은 '술'이 아니랍니다

설 전날 술이 없어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등록 2006.01.31 19:12수정 2006.02.0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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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하루 전날인 지난 토요일(28일) 저녁이었습니다.

늦은 저녁시간인지라 배도 출출하고, 무엇보다 '민족 최대의 명절'을 앞두고 한국 생각이 간절하던 참에 저는 아내가 낮에 만들어 놓았던 모듬전이 생각났습니다. 아내는 감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명절인데 내일 아침 설날 상에 달랑 떡국 하나만 올려놓기가 좀 그래서요"하면서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모듬전(호박전, 버섯전, 새우전, 피망전, 고기전, 생선전)을 만들더군요.


정말 먹음직스럽죠? 제가 만든건 못 생겼답니다.
▲정말 먹음직스럽죠? 제가 만든건 못 생겼답니다. 서상원
아내는 약을 먹고 일찍 잠이 들었고, 저는 냉장고에서 전이 담긴 접시를 꺼내 그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새우와 호박전을 몇 개를 프라이팬에 올려놓았습니다. 노릇노릇 맛있게 부쳐진 전들을 보자 슬그머니 술 생각이 나더군요.

'전에 남겨 놓았던 캔 맥주가 어디에 있나?'

냉장고를 뒤져 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엌을 포함해 베란다에 있는 간이 창고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군요. 시간은 이미 자정이 다 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 캐나다 밴쿠버(불어권인 퀘벡주 제외)에서는 모든 주류(맥주나 와인 같은 저알콜성 음료도 포함)를 지정된 가게에서만 살 수 있답니다. 또한 영업시간(보통 아침 9시 30분에서 밤 11시) 이후에는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없습니다.

술을 판매하는 '지정판매소'입니다.
▲술을 판매하는 '지정판매소'입니다. 서상원
이미 자정이 다 돼가는 상황이어서 저는 포기하고 그냥 모듬전만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럴 때 맥주 한 캔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며 전을 먹던 저는 문득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쇼핑을 하러 갔을 때 아내가 사던 물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쇼핑을 마치고 계산대에서 물건을 꺼내 놓을 때였습니다. 장 본 물건들을 계산대에 올려놓던 저는 그 틈에서 제가 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이건 뭐야? 처음 보는 건데?"
"아, 그거 음식 할 때 넣는 '맛술'이란 거예요. 알코올이 조금 들어 있어 고기 특유의 냄새를 없애주거든요."

'맞아! 분명 알코올이 들어 있다고 했지.'

저는 제 꾀에 스스로 감탄하며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게 그 '구세주'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병을 꺼내 놓고 혹시나 싶어 설명서를 살펴보았습니다.

'9.5%±0.5% alc/vol'

분명 알코올이 포함된 '술'이었습니다. 병 입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니 '청주' 비슷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더군요.

문제의 '맛술' 제품 설명서
▲문제의 '맛술' 제품 설명서 서상원
그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습니다. 한잔을 소주잔에 따라 놓았더니 색깔만 약간 진한 것이 영락없이 진한 청주더군요.

이제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지요. 아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모듬전 한 접시와 향수를 달래 줄 청주 한잔!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첫잔을 한숨에 쭈욱 들이켰습니다. 물론 행복한 기분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 달리 혀가 느끼는 맛은 완전 정반대였습니다. '단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짠 것 같으면서도 짜지 않은' 뭐라 말로 형용하기 힘든 그런 맛이었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청주의 맛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지요.

뱃속이 울렁울렁거리더군요. 저는 입맛을 돌리기 위해 애꿎은 냉수만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켰습니다. 한참을 찜찜한 속 때문에 넋을 놓고 있던 저는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어 아내와 아들 녀석이 깨지 않게 입을 막고 한참을 웃어댔습니다.

다음날 아침 저는 아내에게 지난밤에 있었던 웃지 못 할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내 역시 배꼽을 잡고 한참을 웃더니 한마디를 하더군요.

"에구 미련하게 아무리 술이 마시고 싶어도 그렇지 요리할 때 넣는 맛술을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다 올해는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대신 운동 많이 하라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하세요."

비록 머나먼 캐나다에서 맞은 설이지만 저희 세 가족은 아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떡국과 모듬전 그리고 그 문제의 맛술을 넣어 만든 갈비찜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아내의 새해 덕담(?)처럼 술보다는 운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애독자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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