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 웃고, 나도 이제 살만하다고 여길 때에 사람들은 둘째 안 낳냐고 묻기 시작했다. 배지영
올해 아이가 여덟 살, 남편은 가끔 둘째를 낳자고 한다. 혼자 크는 아이가 외롭다고 입양이라도 하자고 한다. 우리가 그다지 가난한 것도 아니고, 남편 자신이 음식과 청소를 도맡아하다시피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면, 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어느 날에는 밥벌이와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밤마다 사람 만나는 일로 바쁜 남편을 정면으로 꼬집는다.
"아기 낳는다 쳐. 누가 키워? 형이 1년 365일 중에서 100일만이라도 밤에 모임이나 약속에 안 나갈 수 있어? 그리고, 아기 낳으면 지금보다 돈도 엄청 더 벌어야 하는데?"
아기를 낳고부터 한 달 육아비가 30만원에서 90만원 사이로 들었다. 태어나서는 돌봐주시는 분한테 맡겨서 그렇고, 보육시설에 다니고부터는 아이가 저녁까지 거기에만 있는 걸 싫어해서 따로 아이 봐 주는 집에 맡겼다. 그런데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아이를 데려오던 길에 아이는 서럽게 울면서 아무한테도, 아빠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비밀을 털어놨다.
그 집 형아가 때리고, '씨발'이라는 나쁜 말로 자기를 부르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하고, 맛있는 게 있으면 냄새도 맡지 말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엄마,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그러면 형아가 나를 더 괴롭혀..."했다. 차창의 와이퍼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아이는 차 뒷자리에서, 나는 운전석에서, 오래도록 울었다.
우리 집으로 와서 아이를 봐 줄 수 있는 분을 구했다. 봉투에 돈하고 우리 집 열쇠를 넣고 '강제규 돌봐주셔서 고맙습니다'를 쓰는데 글씨가 내 눈물로 얼룩졌다. 더 이상은 아이가 울면서 "엄마, 나를 차라리, 옛날 돌봐주던 아줌마한테 보내 줘"하지 않아도 됐고, 유치원 끝나고 집에 와서 저 하고 싶은 대로 놀 수 있게 됐다.
지난 해 봄, 아이 돌봐주시는 분한테 사정이 생겨 우리 아이를 더 이상 봐 주실 수 없게 됐다. 그 때부터 아이는 줄곧 오후 5시까지 유치원에 있다가 남편이 데리고 온다. 그래서 가끔씩 일터로 걸려오는 남편 전화가 불안하다. 남편은 특유의 절대 거절 못하게 만드는 목소리로 "어쩌지? 나 바쁜데..."한다.
'머피의 법칙' 때문인지, 그런 날일수록 유난히 일이 딱딱 안 끝난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남편 전화를 받고, 아이를 큰조카의 여자 친구한테까지 맡겼다가 찾아오니 밤 9시였다. 아이와 둘이 늦은 저녁밥을 먹고 10시쯤 잠자리에 누웠는데 아이가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매실을 타서 먹이고 배를 쓸어주었다.
새벽에 아이가 잠꼬대처럼 "엄마 꿈 꿨어"하는데 방귀 냄새 보다 500배쯤 강렬한 냄새가 진동했다. 갑자기 설사가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초스피드로 아이를 화장실까지 데려다놓고, 옷을 벗기고, 씻기고, 침대보를 갈고 나서 재웠다. 금방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잠이 안 왔다. 서럽기까지 했다.
지난해부터 아이 고모들이 다니는 점집에서는 나보고 둘째 아기를 낳아야지만 닥쳐 올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내 마음에 유머가 있는 날은 점쟁이가 '너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불행이 온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거라' 같은 점괘를 내놓기 바란다. 하지만 기어이 대규모 굿판에 날 불러들여서 무당이 내 몸 여기저기를 두드린 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진다. 누구라도 때려 패고 싶어진다.

▲올해 학교에 들어가는 아이 배지영
아이 키우는 일은 우리 외할머니가 한국 전쟁 때 피난 다니시던 때처럼 무용담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길가에서 떨어진 폭탄 한 방으로 갑자기 친정 오빠를 잃어버린 것처럼 한도 생긴다.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를 둘 낳은 내 친구는 출근하기 위해 아이들을 새벽에 깨워 밥 먹이고, 어린이집에 보냈다가 밤에 데려와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들이 마치 전쟁과 같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면 결혼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에겐 일을 그만둘까 하는 심각한 순간들이 닥쳐온다. 첫아기를 낳았을 때, 둘째 아기를 낳았을 때,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다. 나도 올해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데 아이를 돌봐 줄 아주머니를 다시 구하든지, 우리 집과 아이 학교 사이에 있는 학원을 알아봐서 아이를 오후 내내 떠돌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일하는 아빠들'의 삶은 어떤가? 나라와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한 절차라도 되는 듯 거의 날마다 모임과 약속, 회식이 있다. 철인 경기가 '밤마다 거리의 밥집과 술집에서 보내기' 같은 거라면, 한국 사회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기록이 쏟아질 게 뻔하다. 나는 비공식으로 셀 수 없는 기록을 갈아 치운 남편과 그 동료들에게 '발정 난 고양이들'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 확실히 사람이 달라지긴 한다.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고, 겸손해지고, 고마워할 줄 알게 된다. 그러니 점쟁이나 정부에서 하는 말을 믿고 아이를 많이 낳으면, 어떤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 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일도 하고, 살림도 하면서, 아이를 둘 셋씩 낳아 기르는 '초능력자 엄마'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나는 자신 없다. 패스트푸드의 세트메뉴처럼 반드시 '4인 가족'을 달성하는 길에 끼는 게 겁이 난다. 다시 아기를 낳아 기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삶이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둘째를 낳지 않으면 내 인생이 불행해진다는 예언을 듣고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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