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까지 부부가 나눠 피워야 하나?

아들에게 뿌리내린 '남녀 역할' 지우기 작전

등록 2006.02.09 16:44수정 2006.02.0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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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여자가 담배 핀다!"


아파트 복도에서 친구 아빠들이 담배 피는 모습만 보아온 아들 녀석이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여성이 흡연하는 장면을 보면서 터트린 '놀람 교향곡'입니다. 저는 조심스레 "여자도 남자랑 똑같이 담배 피고 술을 마신단다"는 궁색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a "남자도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단다!" 사진은 주먹밥 만들기를 마친 아들 녀석의 모습.

"남자도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단다!" 사진은 주먹밥 만들기를 마친 아들 녀석의 모습. ⓒ 박소영

아들 녀석은 제가 스포츠 뉴스를 시청하고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는 모습을 보면 깔깔대고 웃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의 귀띔에 따르면, 발레를 배우는 시간에 '여자들이나 하는 무용을 남자가 어떻게 하느냐'고 떼를 쓰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전력도 있습니다.

녀석은 네댓 살쯤엔 분홍색 마니아였습니다. 우산이며 물안경, 심지어 인라인 스케이트까지 죄다 분홍색을 선호했지요. 그랬던 녀석이 이제는 '분홍색은 여자색'이라며 분홍빛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는 것들은 외면합니다. 그뿐 아니에요. 어느 날 제가 긴 머리가 부담스러워 짧게 컷을 하고 돌아왔더니 글쎄 엄마가 남자가 됐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게 아닙니까.

여자는 분홍색, 남자는 감색?

이런 남녀의 역할 구분이 어떻게 아들 녀석의 뇌리에 박히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이들은 제 눈에 들어오는 어른들의 모양새로 역할을 구분하는가 본데 말입니다. 자칫 고정관념으로 굳어질까 안타깝습니다. 무엇보다 다수가 하는 언행은 항상 바른 것이라는 인식으로 소수의 의견을 인정하지 못하는 획일화된 의식의 소유자가 될까 두렵군요.

하지만 넘어야 할 태산은 따로 있었습니다. 며칠 전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아이의 가방을 사주려고 대형 할인마트에 들렀지요. 가보니 남자 어린이용과 여자 어린이용이 확연히 나뉘어 진열돼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레이스로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 분홍색 일색의 가방들이, 다른 쪽에는 감색의 캐릭터로 무장된 가방들이 남녀 구분을 당연시하고 있는 겁니다. 어른들의 고정관념부터 바뀌어야 되겠구나 싶었지요. 어느 가방을 샀느냐고요? 아들 녀석이 원하는, 칼을 번쩍 들어올린 캐릭터 가방을 사줄 수밖예요.


그러면서 저는 장바구니에 술 몇 병을 집어넣었습니다. 화를 가라앉히려는 수작일 거라고 생각하시면 잘못 짚었습니다. 제 나름대로의 교육법을 실천해 보려는 몸부림이었으니까요.

집에 돌아온 저는 사온 술을 잔에 따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평소 술을 잘 안 마시다보니 쓸 만한 술잔이 없더군요. 그래서 유리컵에 술을 따랐습니다. 그러고는 남편과 함께 "짜잔"하며 잔을 부딪쳤습니다.


저는 교육용 퍼포먼스(?)임을 상기하고 아들 녀석의 표정을 주시했습니다. 아들 녀석은 "엄마, 그럼 담배는 언제 살 거야?" 했습니다.

아, 담배도 부부가 나누어 피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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