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호박쪼가리가 주는 근사한 감동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108] 대보름 별미 중 으뜸, 호박쪼가리볶음

등록 2006.02.11 15:28수정 2006.02.1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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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호박나물과 토란줄기, 취나물 요리법이 대동소이하다. 단, 호박고지는 국물이 더 있어야 밤새 밖에다 뒀다가 다음날 아침 살얼음이 낀 상태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다.

호박나물과 토란줄기, 취나물 요리법이 대동소이하다. 단, 호박고지는 국물이 더 있어야 밤새 밖에다 뒀다가 다음날 아침 살얼음이 낀 상태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다. ⓒ sigoli 고향

호박고지, 호박쪼가리 말리던 추억


지난 늦가을 참 열심히도 호박을 말렸다. 늙고 노란 호박이 아니다. 한 번으로도 모자라 두 번, 세 번에 걸쳐서 말렸다. 그렇다고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두 번째까지는 궂은 날씨가 반복되어 마를라치면 눅눅해지고, 괜찮다 싶어 뒤집어보면 뒤쪽은 곰팡이가 탱탱 슬어 결국 썩히고 말았다.

아까웠지만 밭에 다시 버려야 하는 수고도 감수했다. '어어, 이러다 올 가을 정말 호박쪼가리는 날 샜나 보네'하며 거의 포기할 즈음 콩대를 베러 갔더니 호박이 대여섯 개나 슬며시 정체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기뻤다. 요, 이쁜 놈들을 조심히 싸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날이 더 선선해지고 하루 바짝 햇볕이 들자 쪼글쪼글 부각처럼 빠득 말랐다. 그걸 긁어모아 담는데 어찌나 맑고 고운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지 소음에 찌든 귀가 고향의 소리를 들은 듯 즐겁다 했다.

여기서 내가 말렸던 호박은 기다란 마디애호박도 아니고 그렇다고 쇠어서 익기 직전 늙은호박도 아니다. 서리만 맞았다 하면 곯듯 얼음을 잔뜩 머금고 푹 떨어질 가장 늦가을에 열린 여리고 둥근 애호박이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내 주먹덩이만 하다.

a 호박을 썰고 있는 시골 아주머니, 동창생 김영임 어머니가 늦가을 호박을 썰어 말리려 한다.

호박을 썰고 있는 시골 아주머니, 동창생 김영임 어머니가 늦가을 호박을 썰어 말리려 한다. ⓒ sigoli 고향

쏠쏠하고 오졌다. 호박 몇 덩이 가지고 이렇게 기뻐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말려보니 자각자각 바다자갈 소리로 나를 매료시켰지만 떠보지는 않았으나 참고 또 참아 정월대보름날 먹기엔 충분한 양이다.


예전 어머니와 나는 동구 밖 마당바위를 소쿠리에 호박을 썰어서는 무던히도 오갔다. 일년 중 딱 하루를 위해서 보통 공력을 들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내가 연애하듯 호박쪼가리를 빌미삼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때 여동생은 아직 어렸다.

그 아이가 벌써 서른하고도 다섯인데 호박 말릴 때는 절대 뒤집지 말아야 한다고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훈수를 두지만 들은 척도 안했다. 제까짓 게 뭘 안다고 함부로 오빠에게 아는 체를 하는가 말이다.


단 한 가지 비법도 아닌 비밀은 날 좋은 아침 일찍 얄팍하게 썰어서 말리고 날이 궂지 않을 성 싶으면 밤이슬을 맞혀야 더 쫄깃하고 가을 향기를 가득 품게 된다는 사실 뿐이다.

들기름과 들깨국물에 자작자작 조린 둘도 없는 나물 요리

아, 아쉬운 설도 지났다. 물리게 먹었건만 기름진 것 투성이었으니 이젠 정말로 속을 달랠 때다. 어루만져주고 다독여 보해주면 제들도 잇속 차린다고 뭔가 보답은 하지 않겠는가.

a 돼지고기도 볶거나 굽지 않고 두부를 깎뚝 썰어 이렇게 하면 별미다. 이번 보름엔 이렇게 먹어보자. 전혀 느끼하지가 않다.

돼지고기도 볶거나 굽지 않고 두부를 깎뚝 썰어 이렇게 하면 별미다. 이번 보름엔 이렇게 먹어보자. 전혀 느끼하지가 않다. ⓒ sigoli 고향

갖가지 아니 열댓 가지 으뜸나물 죄다 차리노니 미어터지겠으나 다들 제 풍미 하나쯤은 갖고 있을 법. 제 자랑들 하느라고 품은 향기를 맘껏 발산하니 씁쓸하고 강렬하다. 과하지 않으면서 살살 녹여주는 것 뭐 없을까.

이에 보드랍고 살살 녹는 두어 가지가 있으매 한 가지는 두부와 쌀뜨물만 넣고 끓인 돼지고기요, 또 하나는 무채를 썰어 매한가지로 자작자작 물 잡아 끓여 숨죽인 하얀 나물반찬이다.

이도 아쉬우니 이제 본격 호박고지, 호박쪼가리로 어릴 적 어깨 너머로 흘깃흘깃 훔쳐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복잡다단하게 요리조리 할 것 없이 간단한 몇 번의 과정을 밟아 오늘의 주인공을 빛내고 내 살아 있는 미각을 일깨우고 싶다.

호박고지를 뜨뜻미지근한 물에 불려 놓으면 서서히 풀어진다. 곧 쪼글쪼글 잔주름을 펴면서 부풀어 오른다. 파르란 기운이 되살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덜 익은 호박씨도 야들야들해지니 굳이 떼어낼 필요가 없다.

느긋하게 제들끼리 변화무쌍한 변신을 하면 물을 따라버리고 꾹 짜둔다. 묵나물에 잘 어울리는 들기름과 멸치국물, 다진 마늘을 넣고 집 간장으로 간하여 지글지글 볶아놓는다. 이제 진짜 국물을 준비해야 한다.

a 쌀뜨물과 들깨국물을 잘 활용하면 훨씬 뛰어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생 통들깨를 갈아 국물을 내는 전라남북도 탕이 맛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쌀뜨물과 들깨국물을 잘 활용하면 훨씬 뛰어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생 통들깨를 갈아 국물을 내는 전라남북도 탕이 맛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sigoli 고향

통 들깨를 씻어 물을 넣고 갈면 뽀얀 국물이 나온다. 체에 밭쳐 국물만 쪽 빠지게 하고 건더기와 껍질은 버린다. '아이고, 간단하다더니 보통이 아닐세'라고 나를 구박하지 마시라. 아서라. 다 끝났다. 뭐든 한번 먹어보려면 실상은 재료 준비에 들어간 공이 더 크지 않더냐.

들깨국물을 넉넉하게 잡고 볶아놓은 호박쪼가리를 넣고 맘껏 끓여주자. 속이 부글부글 끓듯 다갈다갈 끓는 모습을 한번 보라. 과장된 영화장면에서나 본 듯하다. 방구들이 지진 영향을 받아 들썩인다. 용암이 거품을 뽀글뽀글 뱉어내듯 얇실하고 넓게 뜬 수제비처럼 기지개를 한껏 켜고 양이 더 늘어만 간다.

여긴 흰 국물과 하얗고 포롬한 연둣빛이 다소 섞여 있을 뿐이다. 고춧가루는 애당초 쓸 명분이 없다. 국물 한 번만 떠먹어보고는 더 이상 퍼지지 않게 뚜껑을 열어 차가운 곳에 놔두자. 아직 오곡찰밥과 갖가지 나물이 대령하기엔 이를 뿐 아니라 호박나물은 시원하게, 가능한 차갑게 먹어야 진가가 발휘되니 "참아야 하느니라"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풋풋하고 달보드레하고 감칠맛 나고 쫄깃한 감동

식혀서 쌀쌀한 바깥에 두면 더 좋으련만. 상에 차릴 것 다 차려지는 동안 속에 부담되지 않은 것부터 한 수저 떠먹는 시식 시간이 잠깐 있으면 좋으리라. 그 중에서도 맨 먼저 내 손을 움직이게 하는 음식은 여태 만들어놓았던 호박고지나물이다. 다시 한기를 머금어 금세 약간은 쪼그라들었다.

a 요즘도 오곡찰밥을 시루에 쪄서 먹는 사람 과연 얼마나 될까? 쌀 미리 불리고 팥 따위를 삶아 물기를 쪽 뺀다음 시루핀을 붙이고 바닥에 깔고... 참 일이 많았지만 맛은 최고였다. 저 팥과 강낭콩을 섞으면 더 포근포근한 맛이 난다.

요즘도 오곡찰밥을 시루에 쪄서 먹는 사람 과연 얼마나 될까? 쌀 미리 불리고 팥 따위를 삶아 물기를 쪽 뺀다음 시루핀을 붙이고 바닥에 깔고... 참 일이 많았지만 맛은 최고였다. 저 팥과 강낭콩을 섞으면 더 포근포근한 맛이 난다. ⓒ sigoli 고향

국물 한 술 먼저 뜨니 입안이 잔잔한 감동으로 가득하다. 들깨 알에서 빠져나온 자잘한 알갱이, 분말이 혀를 감싼다. 살포시 내린 큼지막한 눈발이 포근히 내려앉은 느낌이다. 주당들이 약주를 거나하게 할 요량으로 미리 우유나 기름진 걸 위벽에 바를 때와 다르지 않으니 뭐든 받아들일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손이 바빠진다. 고루 잘 퍼진 찐 찰밥이 당도하여 찹쌀과 팥이 으깨지면서 진득한 끈기로 풍악을 울리니 마침내 나는 자작한 국물과 건더기가 있는 호박나물을 떠 넣는다. 목멜 듯하다가 이내 정상을 되찾았다. 오랜 가뭄 끝 단비라고나 할까.

질겅질겅 씹힌다.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보드라운 입감에 질기지 않는 쫄깃함까지 곁들여졌다. 호박씨마저 볼가져 나와 이가 심심할 새도 없다. 달보드레하고 감칠맛이 난다는 건 이럴 때라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하찮은 호박쪼가리가 내게 이런 근사한 감동을 선사하다니!

a 여기서 간단히 소개된 무나물이 왼쪽에 있다. 뿌리를 채 썰어 육수 넣고 간하여 끓이면 된다. 고사리와 고구마순도 쫄깃쫄깃하겠네. 실고추를 써야 맛이 깔끔하다.

여기서 간단히 소개된 무나물이 왼쪽에 있다. 뿌리를 채 썰어 육수 넣고 간하여 끓이면 된다. 고사리와 고구마순도 쫄깃쫄깃하겠네. 실고추를 써야 맛이 깔끔하다. ⓒ sigoli 고향

늦가을 풋풋한 들을 다시 만난 듯 향기롭다. 혀에 감칠나게 감기고 나서는 한 번 두 번 씹으면 아삭아삭. 넘어가는 기분도 참으로 좋다. 이렇게 난 시원한 맛에 가을 향기를 가득 머금고도 모자라 다그치고 졸라대니 연신 밀어 넣기에 바빴다. 왜 그리 자주 손이 가는지 희한하다.

한참을 정신없이 먹고 있노라면 옆에 있던 사람이 불쑥 한마디 던지는 게 일상이었다.

"너 혼자 다 먹을라고 그러냐?"
"바깥에 많으니까 또 갖다먹으면 되잖녀."

미안한 마음에 부엌을 들락거렸다. 이게 볶음이던가. 조림일까. 에라 모르겠다. 볶다가 졸였으니 알아서 이름 짓자. 호박고지, 호박쪼가리 나물은 맞지 않은가.

나는 아직도 30년 전 어머니가 대충 만들어줬던 지독한 사랑,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오늘 오후를 어찌 보낼지가 명확해졌다. 오늘같이 좋은 날 어디 있는가. 아이와 아내를 위한 밸런타인데이에 작은 설 대보름까지 겹쳐 있으니 한번 부지런히 움직여도 아깝지 않은 날 아닌가.

a 맛있는 대보름 맞이를 위해 가까운 시장으로 나가보자. 미어터지면 좋겠다

맛있는 대보름 맞이를 위해 가까운 시장으로 나가보자. 미어터지면 좋겠다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시골맛, 고향맛, 어머니손맛을 찾아 과거로 추억여행을 떠납니다. 고향 맛 원형을 찾기 위해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었습니다. 오셔서 건강과 맛을 챙겨가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시골맛, 고향맛, 어머니손맛을 찾아 과거로 추억여행을 떠납니다. 고향 맛 원형을 찾기 위해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었습니다. 오셔서 건강과 맛을 챙겨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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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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