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시장을 닮은 봄의 책

[서평] 화가 황주리의 산문집 <세월>

등록 2006.03.08 12:15수정 2006.03.08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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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홍익대 주변 피카소 거리의   벼룩시장 풍경

홍익대 주변 피카소 거리의 벼룩시장 풍경 ⓒ 박소영

바야흐로 봄이다. 봄은 '보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봄 구경에 몸이 근질대는 도시인들은 어디로 떠나야 할까. 나의 봄은 홍익대 주변 피카소 거리의 벼룩시장을 닮았다.

'벼룩이 들끓을 정도의 고물을 판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벼룩시장에서 자질구레한 물품들은 세상사 바라보는 만화경이 되고,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일상의 때까지도 발랄한 예술품으로 승화된다. 봄 햇살을 마주 대하며 각양각색의 소소한 물건들을 하나씩 만나다보면 어느새 내 마음은 봄의 빛깔로 바뀐다.


손때 묻은 장난감과 인형들을 펼쳐놓은 아이들, 기타를 들고 자기 흥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추억의 LP판들을 선보이는 젊은이들, 봄의 화려함과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고 나선 젊음 그대로가 봄인 아가씨들, 등산용 모자와 이러저러한 책 가지들을 펴놓은 중년의 부부들…. 벼룩시장은 이들에게 축제의 장이 돼준다.

활기가 넘치는 그곳엔 삶과 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들의 시간이 한창 물오르는 봄 햇살처럼 따스한 희망으로 그려지길 바라면서 봄날에 어울리는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벼룩시장처럼 봄의 다양한 원색을 고스란히 담아 올리는 화가 황주리, 그녀의 3번째 산문집 <세월>이다.

도시 소시민의 일상을 까만 뿔테 안경 너머로 책 하나 들고 서서 지켜보는 저자는 홍대 주변의 작은 카페에서 자신의 흔적과 갑갑하고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가는 사람들의 하루를 봄 구경하듯 카페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듯하다.

a <세월>의 표지

<세월>의 표지 ⓒ 이레

우리들의 일상을 만화처럼 여기저기 심어놓은 그림으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놓은,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 다재다능한 그녀. 이제는 내가 닮고 싶은 여자 1순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세상과 인간 삶의 기미에 대한 과장 없는 포착의 시선은 어떤 낭만적 포장에 싸인 근사한 언어의 유희를 용납하지 않는다. 성공이란 그저 저널리즘의 단어이고 실패란 삶 자체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단어라고 삶에 대한 소감을 말한다.


그녀의 소소한 일상의 기록들과 그림들이 봄과 연상관되어지는 이유는 무얼까? 만물의 색들이 기지개를 펴며 자기 색을 드러내듯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감각기관이 알록달록한 일상의 색을 찾아 관찰하고 꿈꾸는 예술가이다.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시간을 통해 애틋하게 그려내는 솜씨를 지녔다.

'세월'은 4계절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름을 시작으로 봄에 이르러 끝을 맺는다. 언제나 계절은 반복되듯 우리들 삶도 세월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부피와 무게의 짓눌림으로 그저 지나가버린 것에 망연자실 할 따름이지만 칼라 꿈을 꾸는 그녀 특유의 시각은 그녀만의 자유로운 기록을 완성한다.


'내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일은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시간들을 붙잡기 위한 소박한 밥상'이었듯 그녀의 글들은 그녀의 정확한 호흡으로 자신의 삶을 다채롭게 꾸려간다.

문득 끼리끼리 알아주며 머리를 끄덕거리는 어려운 현대미술을 하는 사람의 자부심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고 마는 영화의 한 장면에 더 큰 울림이 있는 '화가의 꿈', 인간 세상 이 아귀다툼으로 얼룩진 시끄러운 낙서판 속에 그래도 세상모르고 살아가는 느긋한 존재들이 조금은 있어 행복할 수 있는 '달려라 베티', 이데올로기 보다는 그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지키려는 인간 투지의 소산으로 여기고 싶은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에 대한 '아주 특별한 삶의 기록'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폭넓은 상상력과 삶에 대한 깨달음이 담담하고 폭넓게 그려져 있다.

"유한한 삶 앞에서 우리 모두는 쓸쓸하다. 어느 날 그대도 백발이 성성 하리니 오늘은 내일의 젊음이라 그저 열심히 살아갈밖에...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때마다 늘 나름의 행복한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늙어감을 그리 슬퍼하지는 말 일이다. 어떤 추억도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수압보다 더 센 물결은 없지 않을까.”

그녀의 고백을 통해 보기에는 무르지만 내밀한 중심에는 단단한 거름을 다지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봄이 화사함에 손짓을 보내고 싶은가. 우리의 일상이 삭막한 방에 갇혀 있다면 그녀로 인해 봄바람 한 자락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유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다고 아무리 우겨 봐도 그리 행복한 것 같지 않은 우리들의 일상이 사실은 계절마다 바뀌는 제철 음식으로 차려진 식탁 같은, 조촐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풍성하고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우리들의 밥상처럼. 작은 우리들의 비망록에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비결을 그녀가 속삭여준다.

세월

황주리 지음,
이레,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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