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인 마이클에게 왜 거짓말을 했을까?

만우절, 수업시간에 생긴 일

등록 2006.04.03 11:22수정 2006.04.0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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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이었다.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한 아이가 나를 보자 환히 웃으며 목례를 하더니 잠시 후 대뜸 이렇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오늘 거짓말 많이 하지 마세요."
"응? 거짓말이라니?"

"오늘이 만우절이잖아요."
"아, 그렇지. 오늘이 만우절이지."

그런 짧은 대화가 오고 간 뒤, 나는 몇 걸음 앞서서 걷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희야, 사랑해!"

그리고는 씩 웃는 내 모습이 어딘지 수상쩍어 보였을까? 명희는 함께 가던 동무를 바라보며 이렇게 투덜거렸다.
"뭐야? 그럼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잖아."

만우절 날 사랑한다고 말했으니 그것은 곧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 물론 나는 그런 뜻으로 농을 던진 것이지만, 일단 목적을 이루었으니 입에서 나간 말을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명희야, 사랑한다는 말 거짓말 아니야. 정말 사랑해."
"에이, 그 말도 거짓말이잖아요."

어차피 즐거운 농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뜻하지 않은 아이의 대꾸에 나는 한 순간 당황이 되기도 했다. 하긴 만우절에는 어떤 말을 해도 거짓으로 들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말문이 막힌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정말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해도 내일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와도 진실한 소통이 불가능한 곳이라면 얼마나 답답할까?

수업종이 울려 교실에 들어가 보니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않아 있는 아이들은 얼굴이 익지 않은 다른 반 아이들이었다. 만우절에 흔히 보는 풍경이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몰라 망연히 서 있는데 5분이 채 안되어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굴에 어린 실망어린 표정을 보니 조금 짠한 생각이 들었다.


"일을 저질렀으면 끝장을 봐야지 왜 그렇게 빨리 들어오니?"
"재미없어요, 선생님."

"그래? 그럼 수업이나 하자."
"에이, 선생님 오늘 수업 하지 마요."


"그럴까? 그럼 오늘은 수업하지 말고 편지나 쓰자. 영어로."
"에이, 그게 그거죠 뭐."

아이들은 뭔가 섭섭한 눈치였지만 출석을 부르고 책과 공책을 펴라고 하자 놀고 싶은 마음을 접었는지 순순히 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수업시간에 해야 할 수행과제를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가상의 외국인 친구에게 영문 편지를 쓰는 수행평가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 오늘은 지난 시간에 예고한대로 여러분이 외국인 친구들과 펜팔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영어로 편지를 써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편지글을 여러분 상황에 맞게 몇 가지만 고치고 나머지는 그대로 모방해서 쓰는 것이니까 어렵지 않을 거예요. 모르는 것은 선생님에게 물어봐도 좋습니다."

교과서에 소개된 영문 편지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학교생활에 관한 글이다. 한국 학생인 가람이 미국에 사는 같은 또래인 마이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너의 평소 학교생활은 어떠니? 나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8시가 되기 직전에 학교에 도착해. 우리는 모두 흰색과 짙은 남색이 섞인 교복을 입어. 우리 반에는 약 40명의 학생들이 있어. 반 규모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니? 자율학습을 한 후에 1교시 수업이 9시 정각에 시작해. 각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들이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오셔. 영어와 생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야. 가끔 수업을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우리들은 대체로 좋은 학생들이야. 점심시간은 12시 50분부터 1시 30분까지야. 그리고 오후 3시 30분에 하교를 하지.'

수업을 시작한 지 십 분쯤 지났을까?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가람이가 마이클에게 거짓말 했어요."
"거짓말이라니?"
"하교 시간 말이에요. 오후 3시 30분에 하교하는 학교가 어디 있어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고등학교라면 정규수업을 마치고 바로 하교를 해도 3시 30분은 말이 안 된다. 거기에 보충수업을 하고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면 아무리 빨라도 밤 9시는 넘어야 하교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의 말대로 가람이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거짓말을 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람이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것은 책을 쓴 저자가 거짓말을 한 셈이다. 아침에 한 시간씩 자율학습을 한다는 사실을 편지에 적은 것을 보면 저자는 한국 고교생들의 학교생활에 대해서 훤히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저자는 밤늦도록 학생들을 학교에 붙잡아 두고 강제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에 대하여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제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 아니겠는가.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봐도 한참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공부만 하도록 강요하는 나라가 없을 터이니 그런 비상식적이고 엄연한 인권침해의 소지마저 있는 학교 모습을 교과서에 언급하는 것이 어찌 고민이 되지 않았겠는가.

최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여 펴낸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 <길에서 만난 세상(우리교육)>에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일과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06:00 기상
07:20 등교
07:45 학교 도착
07:50 영어 듣기 수업
08:30 정규수업 시작
12:20 오전 수업 끝/점심 식사
13:10 오후 수업 시작
16:00 정규수업 끝/청소
16:30 보충수업
17:20 EBS 교육방송 시청
18:20 저녁 식사
19:10 1차 야간자율학습
21:10 2차 야간자율학습
21:20 하교(주 2회 수학 과외, 12: 30분 귀가)
01:00 취침


그 책에는 '학교를 계속 다닌다면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중학교 2학년 때 자퇴를 결정한 아이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학교를 자퇴한 후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를 좁혀보기 위해 노력한 나머지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식구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잔뜩 희망을 안고 들어간 고등학교는 그가 보기에는 출구와 퇴로마저 막혀버린 경쟁이 전부였다.

결국 그는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도 자퇴하고 만다. 행복과 진실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랐던 그로서는 진실한 소통이 불가능한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거짓말을 해도 우스개로 넘기고 마는 만우절. 나는 그날 수업을 하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우절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이제는 함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듯이 우리나라 고교생들의 학교생활을 일부 왜곡할 수밖에 없을 만큼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도 내일이 오면 하루분의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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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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