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사감'과 'K사감'에 대한 소고

아이의 기숙사 사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등록 2006.05.08 18:42수정 2006.05.0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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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천예술고등학교 기숙사 입구 전경

김천예술고등학교 기숙사 입구 전경 ⓒ 김천예술고등학교


'B사감'


'사감'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현진건'의 소설 < B사감과 러브레터 >에서 묘사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소설에서의 '사감'은 열등의식에 빠져서 기숙사생들에게 권위적이고 엄격하여 남학생들의 방문이나 그들의 러브레터에 대하여 과도한 간섭을 일삼지만, 정작은 여학생들에게 온 러브레터를 한밤중에 몰래 읽으며 이상한 행동을 연출하다가 발각되기에 이르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 노릇을 하는 B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꾼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죽은 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훌렁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법대로 쪽찌거나 틀어 올리지를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어 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염소 똥만 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앙다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노릴 때엔 기숙생들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치리만큼 그는 엄격하고 매서웠다 - < B사감과 러브레터 중 >


< B사감과 러브레터 >가 반어와 풍자를 이용하여 인간의 '이율배반성'을 나타낸 수작이라는 문학적인 평가에 어찌 반론을 제기할까마는, 소설의 의의가 명백한 만큼 상대적으로 그 주제를 살리기 위하여 기제로 동원된 '사감'은 뭔가 비정상적인 인격체로만 인식되는 선입견에 놓인 것은 아닐까?

고1인 첫째 아이가 얼마 전부터 타지인 김천예술고등학교로 전학을 해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가 기숙사 생활을 통하여 좀 더 성숙한 사회성을 체득하고, 가정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교육적 기대를 하고 있음은 물론인데,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기숙사를 관리하는 '사감 선생님'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였음은 그간 '사감'이라는 직종에 종사하는 분을 만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순전히 [B사감과 러브레터]를 읽은 탓일 것이다.

a 4인 1실 기숙사 내부

4인 1실 기숙사 내부 ⓒ 김천예술고등학교

'K사감'(그니의 이름은 곽해옥이다. 그래서 K사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과의 대화


아이의 짐을 기숙사로 옮기면서 'K사감'과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대화의 결과는 매우 실망(?)이었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B사감'처럼 뭔가 괴기하고 냉냉한 분위기를 풍겨야, 그를 대하는 맛(?)이 날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사감으로 근무한 지가 3년차라는 그니는 넉넉하여서 막힘이 없고, 소탈하여서 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아이가 첫 주간 기숙사 생활을 보냈다. 주말동안 집에 있게 될 아이를 데리러 가서, 'K사감'을 만난 김에 그와 몇 마디 나누었다.


a 김천예술고등학교 곽(K)해옥 사감 선생님

김천예술고등학교 곽(K)해옥 사감 선생님 ⓒ 김천예술고등학교

- 이전의 직업을 말해 달라
"김천지역에 연고를 둔 '삼산이수'라는 극단에서 연극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역 방송국에서 스태프로 근무한 적도 있다."

- 연극배우라니 아주 특이하다. 기억나는 배역이 있나?
"최초의 출연작은 훼르난도 아나발의 작품인 '싸움터의 산책'라는 연극이었고, 당시 배역은 주인공인 병사의 아버지 역할이었다. 남장을 해서 출연한 것이다. 한 번은 공연 도중에, 어떤 관객이 내가 남장을 하고 출연하는 것을 알아보고는 '여자다. 여자'라는 말을 크게 하는 바람에 굉장히 당황한 적이 있었다. 공연 분위기가 약간 이상해지고 말았다." 크하하하(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 'B사감과 러브레터'를 읽은 적은? 그 소설에서처럼 냉냉하게 보여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부모님들이 으레 하시는 말씀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소설로 인하여 사감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것이 있나 보다."

-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의 수와 운영시간을 알고 싶다.
"입소하고 있는 학생 수는 약 70명 정도이며, 입소 우선순위는 통학거리나 학생들의 성적을 고려하여 선별하고 있다. 저녁에 기숙사를 개방하는 시간은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밤10시 이후이고 저녁 11시 이후 기숙사 정문을 통제하며, 다음 날 오전 6시30분에 기상 벨을 울리고 6시 30분부터 7시까지 오전식사시간이 있고, 오전 8시 이후부터 저녁 10시까지 폐문조치를 한다."

- 직업상 애로사항을 이야기 해 달라
"근무시간이 주로 야간에 집중되어 있어서 사회생활이 거의 없다. 낮밤이 바뀌어 있으니 친구들 만나기가 어렵고, 교회를 다니는 관계로 주말에도 시간을 활용할 수 없다."

a 첫째의 낙서장에서 '비보이'

첫째의 낙서장에서 '비보이' ⓒ 정학윤

- 기숙사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사건 같은 것은 없나?
"밤 12시 이후 음식물을 반입하거나 먹을 수 없도록 한 기숙사 관리규정이 있다. 이와 관련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저녁 11시가 넘으면 기숙사의 문을 잠그고 학생들의 이동을 통제한다. 출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취식을 금지하는 시간임에도 아이들이 음식점에 음식을 주문하여 받아먹은 적이 있었다. 그 방법이 참으로 기발한데, 배달원들이 도착하여 아이들이 기숙사 윗층에서 내려둔 밧줄에 음식을 매어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두레박을 건지듯 음식을 달아 올리는 것이고... 아이들에겐 머리를 길러보고 싶은 충동만큼이나 사감 몰래 뭔가를 하는 것에서 느끼는 재미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장난에 불과하여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원칙은 원칙이어서, 아이들이 음식을 받기 위해서 내려 둔 밧줄을 몇 번 걷은 적이 있다." (밧줄에 달아 올려서 몰래 먹는 그들의 음식 맛이란 어떤 것일까? 군대시절 참호에 투입되어서 판초우의를 덮고 끓여먹던 '라면 맛'쯤 될까? 너무 재미나게 느껴졌다)

- 사감으로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또래의 집단생활을 통하여 사회성을 익히고 규칙에 적응하며 생활해나가는 아이들의 변화가 참 반갑다. 또한 졸업 후에 찾아와서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 지금부터 선생님과 'B사감과 러브레터'에 나오는 B사감과 유사한 점을 찾기 위한 질문을 하겠다. 혹시 부드러운 맛은 없고 딱딱한 사람을 일컫는 딱장대 같은 사람인가? 독신주의자인가? 찰진 야소꾼(기독교 신자)인가? 40대이며 노처녀인가? 아이들에게 온 러브레터를 뜯어보고 즐긴 적은 없는가? 죽은 깨투성이인데 화장으로 위장한 것은 아닌가? 답을 하시라.
(크하하하~ 그니는 장난스런 질문 내내 호방한 웃음을 웃었다. 그니의 털털한 성격은 그 웃음으로 모두 증명이 되는 듯하였다. 그와 'B사감'과 일치하는 점이 몇 가지가 있긴 했다. 말 끝마다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꼬박 꼬박 표현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이고, 40대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독신주의자는 아니어서 현재는 미혼인 정도이다.)

'B사감'과 'K사감'은 달랐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아이를 기숙사에게 맡기게 된 것에 대한 우려로 만나게 된 그와의 대화는 거침없는 그의 성격으로인해 아주 유쾌하게 진행됐다. 특히나 아이들이 밧줄을 내려 음식을 시켜 먹기도 한다는 대목에서, 어찌 어찌해서 미성년관람불가의 상영관에 들어갔거나, 수학여행을 가서 저지른 기자의 사소한 비행(?)들이 떠올라 기자의 마음도 몽글 몽글한 옛 추억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a K사감의 "크하하하'라는 호방한 웃음소리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사진 찍히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실갱이 끝에 겨우 한 장 건진 사진

K사감의 "크하하하'라는 호방한 웃음소리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사진 찍히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실갱이 끝에 겨우 한 장 건진 사진 ⓒ 정학윤

어른들 역시 그런 성장과정을 겪었으므로 이해는 하지만, 어른의 입장에서 굳이 '규칙의 준수'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아직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회생활에는 자신의 호기심 충족이나 사소해 보이는 일탈과는 무관하게, 집단을 유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갈 것으로 믿는다.

또한 그런 원칙들과 부딪히면서 자신에게 불편했던 필요없는 원칙을 새롭게 세우거나 수정해야 하는 과정이 앞으로 자신들의 삶에서 끊임없이 노정될 것이며, 자신들이 책임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나설 때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원칙들을 고쳐나가는 것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의 임무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아갈 것이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의 학부모님에게 한 말씀 해 달라"는 마지막 질문에 그니는 "제가 있어서 행복하실 겁니다. 크~하하하"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의미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니 'K사감'에게서 소설 속의 'B사감'의 모습을 탐색하고자 했음이 선입견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새삼 느끼고,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것에서 여전히 부족하다는 자책이 들었다.

아이와 함께 돌아오면서 "우리 아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라며 남긴 말이, 어쩔 수 없는 부모의 이기심으로 비롯된 발화였지만, 우리 아이만을 특별대우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하여 달라는 당부'로 들었기 바라는 마음이다.

a 김천예술고등학교 기숙사 식당

김천예술고등학교 기숙사 식당 ⓒ 김천예술고등학교

실망(?)이다. 소설 속의 'B사감'과 현실의 'K사감'은 너무나 달랐다.

그니에게 행복이 임하기를, 또한 그와 같이 호흡하는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학창생활과 건강함이 허락되기를 바란다. "네 시작은 비록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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