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입후보자 많은 곳은 안 걸렸으면...

어느 개표종사원의 '빡센' 하루

등록 2006.06.01 10:06수정 2006.06.0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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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는 되어 있으되 달력에 빨간 날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쉬는 날인지 근무 날인지 헷갈리는 날이 바로 선거일이다.

50%를 갓 넘긴 투표율 탓에 쉬는 의미와 관계없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절반에 육박하고 있지만, 남들 쉬는 선거일에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차원을 넘어 평소 근무일보다 더욱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개표 종사원들이다.

얼마 전 아내는 나에게 선거일에 무슨 계획을 짤까 하면서 멋진 야외나들이를 제안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주말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낮잠을 자버리기 일쑤고, 또 봄철을 맞아 결혼식 등 경조사 찾아다니기로 바빴던 탓에 간만에 찾아온 황금 같은 휴일을 휴일답게 보내고자 했나 보다. 그런 아내에게 난 개표종사원으로 뽑혀 아침에 선거하고 오후에는 개표하러 가야한다며 부푼 희망을 바로 꺾어버렸다.

개표 종사원으로 지원(?)하다

선거가 다가오면 각 지역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학교나 시청 등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에 협조 공문을 보내 개표 종사원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공공기관에 협조 요청을 하는 것은 같은 공무원이라고 지원받기 편한 면도 있지만,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자리이고 관료제적 특성을 체화하고 있는 공무원들이 개표 업무에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은 평소 숫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업무 특성상 투표용지를 세는 업무와 잘 연결이 된다.

개표 종사원 차출 공문이 오면 학교에서는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그 귀찮은 일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가야 될 사람은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연공서열이 강한 교직사회에서 나이 순으로 아래로부터 차출 인원만큼 역으로 올라가면 된다. 가끔 집이 멀거나 자가용이 없는 여교사의 경우 등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이 같은 공식은 거의 모든 학교에서 통용되고 있다. 따라서 집도 학교와 가깝고 나이도 젊은 축에 속한 나로서는 아내가 불만을 가져도 피해갈 수 없는 업무이다.

a 개표 업무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개표종사원들

개표 업무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개표종사원들 ⓒ 전대원

내가 속한 투표구는 하남시 선거관리위원회 관할이다. 개표 장소는 하남시에 위치한 신장초등학교 강당이다. 대부분 지역들이 개표 장소로 학교 강당을 많이 이용한다. 확 트인 공간에 정치색이 없는 학교 건물이라 투개표 장소로는 최적지라 할 수 있다.


투표를 마치고 오후 4시에 개표 장소로 간 나는 개표요원 등록을 한 뒤 간단한 개표 종사원 교육을 받았다. 모인 사람들은 나와 같은 교사들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농협 직원, 시청 공무원 순이었다.

'제발, 하남시의회 의원 선거 개표만은...'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가짓수가 적은 비례대표나 경기도지사 선거가 걸려라! 그도 아니라면 최소한 하남시의회 의원 선거만은 피해가자.' 하남시의회는 입후보자만 12명이기 때문이다. 분류에 애를 먹는 것은 물론이고, 무효표도 가장 많이 속출하는 투표다.

개표 담당 임무는 크게 세 부서로 나누어졌다. 먼저 투표함을 열고 투표용지를 각각의 종류별로 분류하는 '개함부'가 있다. 개함부에 속한 사람들은 투표용지를 분류해야 하기 때문에 손을 계속 써야 하지만 가장 먼저 끝나는 이점이 있다.

a 투표지를 분류하는 '개함부' 개표종사원들

투표지를 분류하는 '개함부' 개표종사원들 ⓒ 전대원

다음은 '투표지분류기운용부'이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재검표 소동을 일으켰던 장본인이 바로 투표지 분류기다. 한나라당에서 자동 개표기인 투표지 분류기로 나온 결과를 조작가능성을 들며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재검표 소동 끝에 투표지 분류기는 신뢰성을 획득하여 이제 모든 개표는 투표지 분류기로 실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부서를 담당한 사람은 자동으로 분류된 투표 용지를 후보별 투표 용지로 묶어주기만 하면 된다. 후보별 득표 수는 물론 자동으로 계산된다. '투표지분류기운용부'는 전원 농협직원으로 구성되었다. 평소 금융 업무를 하는 사람들인 탓에 계수가 주 업무인 이 부서에 배치한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옛날 같았으면 가장 일이 많았을 부서인데, 지금은 비교적 가장 편한 부서가 되어버렸다.

a 투표지 분류기로 개표 업무를 하고 있는 모습

투표지 분류기로 개표 업무를 하고 있는 모습 ⓒ 전대원

무효표, 유효표도 가지가지

마지막으로 '심사집계부'가 있다. '심사집계부'는 '투표지분류기운용부'에서 미분류된 투표용지를 수작업으로 분류하는 곳이다. 미분류된 투표용지에는 무효표와 희미하게 작성된 표, 찍으라는 곳에 찍지 않고 엉뚱한 곳에 기표를 한 불량(?) 유권자가 찍은 표 등 온갖 희한한 표들이 총 집합되어 있다.

각 정당에서 파견된 선거 참관인들도 가장 신경을 곤두서며 지켜보는 곳이다. 다른 것이야 기계가 분류하니 상관이 없고, 이곳은 개표 종사원의 주관이 가장 많이 개입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장 피곤한 이곳에 내가 배치되었다는 것. 그것도 가장 피해갔으면 했던, 12명이 출마한 시의회 의원선거를 맡게 되었다.

무효표를 분류하다보면 참 가지가지 표가 다 나온다. 12명 후보자 전원에게 기표한 표, 아니면 자신의 인장을 찍은 표, 찍으라는 네모 칸 안에 안 찍고 이름에다가 기표한 표 등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다 보인다. 유효와 무효를 가르는 기준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투표소에게 제공한 기표 용구를 사용했는가 여부이다. 만일 다른 펜이나 지장을 찍은 것은 모두 무효이다. 두 번째로 찍으라는 곳에 찍지 않아도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면 유효로 처리된다. 즉, 이름 옆의 칸에 찍지 않고 후보자 이름이나 기호 위에 찍어도 선관위 제공 기표 용구를 사용했다면 유효표로 분류된다. 차라리 무효표가 되면 모를까 이런 것은 개표 종사원에게 가장 싫은 표가 된다.

이번 시의회 선거는 중선거구제라 압승이 예상되는 가운데 한나라당은 한 지역구에 복수 공천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2-가', '2-나', '2-다' 이렇게 3명이나 한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았다. 제일 불쌍한 후보가 '2-나', '2-다'였다.

'2-가'에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표가 쏠리는 바람에 애꿎게 표가 갈려 열린우리당 후보나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밀리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적당히 표가 분산만 되었다면 당선권인데,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는 바람에 유권자들도 헷갈렸는지, 한나라당 3명 모두에게 기표를 하여 무효가 된 표가 상당수 나왔다. 열렬 한나라당 지지자였나본데, 한나라당 관계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 같았다.

개표 장소에는 선관위 직원과 차출된 개표 요원 외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경찰과 소방관 등이 근무한다. 경찰은 개표 장소 외곽에 경비를 서고, 소방관은 아마 화재를 대비하여 있는 것 같았다.

선거 참관인들도 현장 중계를?

또 무시할 수 없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으니 선거 참관인들이다.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개표 업무를 지켜본다. 그러나 과거처럼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표를 부정개표에 의해 도둑맞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 그들의 임무는 개표 결과를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선거 본부로 전달하는 역할이다. 연신 휴대전화를 돌리며 개표 현황을 후보에게 보고한다.

a 개표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참관인들

개표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참관인들 ⓒ 전대원

참관인들 덕분에 개표하면서 쓰던 펜들이 자꾸 없어졌다. 한 통이나 갖다 놓았는데, 어디서 없어졌는지 모르게 없어져 버린 것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참관인들이 개표 결과 보고를 위하여 자기들끼리 집계를 하면서 펜을 안 보는 사이에 한 개씩 한 개씩 가져가 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투표 용지 분류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사람들이 펜 집어가는 것까지 신경 쓰게 되었다.

밤 10시가 되자 빵과 우유 등의 간식이 나왔다. 간식을 주는 것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개표 업무가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간식과 함께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출마자가 많은 선거를 맡았으니 끝나는 시간이 가장 늦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황금 같은 휴일이 나에겐 격무의 시달리는 날로 바뀌고 있었다.

하루 수당이 통장으로 들어갈 줄이야...

12시가 넘어가자 모든 투표함이 개함되었다. 선관위 직원은 개함부 일이 모두 끝났음을 선포하고 개함부에 있는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도 좋다고 하였다. 개함부에 있던 같은 학교 선생님들은 역시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하면서, 가장 먼저 끝내고 귀가하였다. 줄을 잘못(?) 선 나는 결국 1시간여 정도를 더 일하고서야 모든 업무를 마칠 수 있었다.

모든 개표 업무를 끝마치고 나니 시계 바늘이 새벽 2시를 가리켰다. 다 끝내고 나니 갑자기 오늘 수당이 생각났다. 많지 않아도 수당을 줄 텐데, 개표가 다 끝났는데도 돈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관위 직원이 말해주길 이번 선거부터는 월급 통장에 바로 입금이 된다는 것이다. 아내 몰래 비상금을 마련해 놓으려던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유부남들이 아주 아쉬워하는 눈치들이었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도와주지 않는 날인가 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개표 종사원인 나는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내가 찍은 후보들은 죄다 떨어졌다는 소식이다. 이래저래 몸도 마음도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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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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