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액션'에 막 내린 '히딩크 매직쇼'

[해외리포트] 졌지만 카퍼레이드 준비하는 호주

등록 2006.06.27 10:16수정 2006.08.1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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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7일 새벽 클럽에 모인 호주 응원단이 호주-이탈리아전을 관전하고 있다.

27일 새벽 클럽에 모인 호주 응원단이 호주-이탈리아전을 관전하고 있다. ⓒ 윤여문

호주대표 팀 '사커루'에겐 통한의 10초였다. 90분 내내 막강한 전력의 이탈리아 팀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이면서 우세한 경기를 펼친 호주 팀이 불과 10초 남은 스톱워치 타임을 버티지 못하고 페널티킥을 허용한 것.

페널티킥 선언은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오심이었다. 이탈리아 공격수 그로소의 '할리우드 액션'에 스페인 출신 주심이 깜빡 속았다. 오히려 호주의 수비수 루카스 닐은 그로소와 부딪지 않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신체 접촉은 거의 없었다.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미국 빙상선수 오노의 연기는 그로소의 연기에 비하면 서툰 것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부터 다이브(dive)를 엄격하게 처벌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코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고도 주심은 오른손을 내려서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토티의 깔끔한 페널티킥이 호주의 네트를 흔들면서 경기는 종료됐다. 고의성은 없었겠지만, 심판의 실수로 나무랄 데 없이 좋은 경기를 펼친 호주-이탈리아 월드컵 16강전의 승패가 판가름 난 것.

그 순간 박지성과 이운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심판의 오심으로 16강 진출에 실패한 후 "심판의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고 말한 박지성과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FIFA가 원망스럽다"고 말한 이운재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두 선수의 언급이 잘 싸우고도 패배한 호주 팀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건 한국 팀도 마찬가지였다. 오프사이드 반칙이 골로 연결되고 페널티아크에서의 핸들링 반칙도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팀은 패배의 고통을 삼켜야 했다.

축구를 최고 인기 스포츠로 만든 히딩크


a 27일 새벽(한국시간)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 프리츠-발터 스타디온에서 열린 2006 독일월드컵 이탈리아-호주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게 1-0으로 패배한 후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을 위로하고 있다.

27일 새벽(한국시간)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 프리츠-발터 스타디온에서 열린 2006 독일월드컵 이탈리아-호주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게 1-0으로 패배한 후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을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상균

FIFA 랭킹 44위의 호주 팀을 이끌고, 호주 월드컵 역사상 첫 골과 첫 승을 일구어낸 히딩크 감독은 경기종료 후 몹시 허탈한 모습이었지만, 거의 울듯 한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주저앉은 선수들의 일으켜 세우며 위로하는 일부터 했다.

그는 경기 후에 가진 공식 인터뷰에서 페널티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짧게 언급했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판정이었다. 기자들도 페널티킥 상황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는 호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사커루'와 지내는 동안 나는 아주 행복했다. 호주는 머지않아 세계 톱클래스 팀이 될 것"이라며 "호주에서 한동안 지내고 싶지만 며칠 밖에는 시간이 없다. 다음 임무를 위해서 러시아로 가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온정주의'에 익숙한 한국에서는 그의 언행이 조금 매몰차게 들리겠지만 '이성중심주의'적인 호주에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히딩크 매직'에 흠뻑 빠진 일부 축구팬들이 "'히딩크 세금'을 걷어서라도 그를 붙잡아야 한다"면서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호주 팀이 독일월드컵 16강에 오르기까지 히딩크 감독은 수준 높은 경기를 펼치면서 호주에서 비인기 종목인 축구를 최고 인기스포츠로 만들어 놓았다. 비록 호주의 월드컵 캠페인이 16강에서 막을 내렸지만, 스포츠에는 럭비나 크리켓 밖에 없는 줄 아는 호주 국민에게 축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호주를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히딩크 감독은 조별예선 첫 경기인 일본전에서 적시에 '조커'를 투입하는 용병술로 3대 1의 대역전승을 엮어내어 호주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이어 만년 우승후보인 브라질에게 0대2로 패했으나, 조별예선 최종3차전에서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극적으로 무승부를 거두며 호주를 16강으로 이끌었다. 호주 팀에는 주장 마크 비두카를 비롯한 7명의 크로아티아계 선수가 포진했고 크로아티아에도 호주출생의 선수가 3명이나 있어 크로아티아와의 경기는 경기외적으로도 아주 힘든 경기였다.

결국 조별예선에서 1승1무1패를 기록, F조 2위로 16강에 오른 호주는 E조 1위 이탈리아와 16강서 맞붙어 억울하게(?) 패퇴했다. 기세 좋게 우승까지 갈 것 같던 '사커루의 행진'이 막을 내린 것이다.

a 호주 대표팀이 막판 10초를 못 버티고 어이없이 패하자 응원하던 호주 시민들이 얼굴을 파묻고 괴로워하고 있다.

호주 대표팀이 막판 10초를 못 버티고 어이없이 패하자 응원하던 호주 시민들이 얼굴을 파묻고 괴로워하고 있다. ⓒ 윤여문

'사커루'의 아름다운 에필로그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두고 산화(散花)라고 한다. 최선을 다하고 패배한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장엄한 산화'라는 말은 바로 그런 경우에 꼭 맞는 말이다. '태극전사'와 '사커루'의 패배야말로 '장엄한 산화'였다.

호주 당국은 선수들이 귀국하면 시드니 멜버른 등의 대도시에서 카퍼레이드를 펼칠 예정이다. 이런 결정은 이탈리아와의 경기 이전에 정해진 것이다. 16강 진출 성공으로 목표를 달성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히딩크 감독에게는 국민훈장(Order of Australia)을 수여하고 명예 호주인 증서를 수여할 예정이다.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6월 26일 인도네시아 방문길에 오르면서 "국민훈장은 주로 국경일인 호주의 날(Australian Day)에 수여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사정을 감안해서 시기를 앞당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호주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6강 진출은 카퍼레이드까지 펼칠만한 업적이 아니다. 또한 나는 러시아 임무를 시작하기 전에 며칠 동안의 휴가 밖에 없다"고 말해서 호주당국이 준비하고 있는 카퍼레이드에 참여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히딩크 감독의 이런 발언은 '호주 팀의 16강 진출이 당초 그가 목적했던 도착점이 아니었다'는 그의 속내를 내비치는 대목이다. 반면에 '사커루' 주장 마크 비두카는 "16강 진출 이후의 게임은 모두 우리에게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라고 말해서, 히딩크 감독의 목표와 선수들의 목표에 차이가 있었음을 잠작하게 만들었다.

a 호주일간지 <데일리텔리그래프> 인터넷판의 제목 '너무 가혹해!'.

호주일간지 <데일리텔리그래프> 인터넷판의 제목 '너무 가혹해!'.

호주와 이탈리아 전이 펼쳐진 27일 새벽 1시부터 3시까지(호주동부 시간), 한국의 '붉은 악마' 격인 '그린 앤드 골드 군대(Green and Gold Army)'의 시드니 북부지역 본부인 '더 란츠 클럽'은 입추의 여지없이 축구팬들로 가득 찼다.

예상 밖으로 호주가 월드컵 3회 우승팀인 이탈리아를 상대로 90분 내내 압도하는 경기를 펼치자 클럽 안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게임종료 10초를 남겨놓고(스톱워치 타임) '할리우드 액션'이 발생했고 '히딩크 매직쇼'는 무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린 앤드 골드 군대' 응원단장 마크 워렌은 90분 내내 흔들어댔던 국기에 얼굴을 묻고 오랫동안 흐느꼈다. 악마의 주술에 걸린 듯 명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축구팬들은 클럽에 임시로 설치된 대형스크린이 철거되는 모습을 보고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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