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선 투표 안하면 감옥 간다?

[해외리포트] 경이적인 95%투표율 어떻게 나오나

등록 2006.07.30 12:14수정 2006.07.3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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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호주의 투표소 풍경. 강제투표제도 덕에 호주의 투표율은 항상 90%이상이 나오고 있다.

호주의 투표소 풍경. 강제투표제도 덕에 호주의 투표율은 항상 90%이상이 나오고 있다. ⓒ 호주 선관위

한국은 25%, 호주는 95%

한국에서 실시된 7.26 재·보선에서 24.8%라는 사상최저 투표율이 기록됐다. 지나치게 낮은 투표율 때문에 당선된 국회의원의 대표성 시비도 나왔다. 꼭 열흘 뒤인 8월 5일에 호주에서도 보궐선거가 실시된다. 호주의 사정은 어떨까?

호주선관위 브라이언 할레트 부위원장은 28일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8월 5일 실시될 예정인 호주의 보궐선거 투표율은 약 95% 정도로 예상된다”면서 “2001년과 2004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94.85%, 94.32%를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간접민주주의 제도에서는 투표참여로 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할 수밖에 없는데, 투표율 25%와 95%의 엄청난 차이는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한국의 ‘정치 무관심’과 호주의 ‘정치 과잉’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정치관심도를 간접적으로 측정해 볼 수 있는 두 나라 언론의 보도행태를 보면 그렇지 않다. 한국 언론이 비교적 정치기사를 비중 있게 다루는 반면, 호주신문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정치소식을 머리기사로 올리지 않는다. 빈도로 치자면 스포츠뉴스가 훨씬 더 많다. 2001년 투표일에도 페트릭 라프터의 US오픈테니스 우승이 머리기사였다.

선택사항인가? 의무조항인가?

a 호주 연방 국회의사당 지붕

호주 연방 국회의사당 지붕 ⓒ 윤여문

개인의 자유의지(free will)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현대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일정한 영역 안에서 강제력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동체’가 국가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국민, 즉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 또는 집단 전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강제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공공복리 증진을 위한 국가활동에 협력해야 한다는 국민의 인식과 동의’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쓰여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 계약을 맺어 국가를 구성했다고 보는 것이다.

독점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선거를 통한 선택)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국가는 개인뿐 아니라 단체에게도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호주의 강제투표제도(compulsory voting)는 이런 배경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유럽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개인주의에 대한 가치가 크게 옹호되는 호주에서 투표에 참가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는 강제투표제도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투표에 기권하는 것 또한 하나의 정치행위이기 때문에 자율권 침해라는 논란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호주의회의 결정은 명료하다. 투표 참가율을 높임으로써 진정한 국민 다수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어 민주정치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참정권을 민주국가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제투표제도가 자율권을 침해하는 제도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해지면 정치권력의 대표성이 작아져서 정치적 효율성이 떨어지게 되고, 국민을 무시하는 정책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이념에 어긋난다는 판단도 강제투표제를 실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결국 호주에서의 투표참여는 선택사항이 아닌 의무조항이다.

a "영국 꺼져라!" 호주는 1901년 6개 식민지 국가에서 연방국가로 거듭났다. 당시 시사잡지 <블리튼>의 만평.

"영국 꺼져라!" 호주는 1901년 6개 식민지 국가에서 연방국가로 거듭났다. 당시 시사잡지 <블리튼>의 만평.

정치무관심을 극복시킨 강제투표제도

호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대목이 있다. 1788년, 호주에 백인국가가 생길 때부터 한 개의 나라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 것. 사실은 그렇지 않다. 6개의 개별적인 식민지 국가였다가 1901년에 하나의 연방국가(federation)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 당시, 6개 식민지국가 리더들은 하나의 통일국가로 거듭나서 영국으로부터 당당하게 독립하자는 의지가 아주 강했다. 그러나 일반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연방국가 탄생이 탐탁지 않았다. 다만 국경을 넘을 때마다 내야하는 관세가 없어진다는 이유로 정치리더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런 정도의 낮은 정치의식을 갖고 연방국가로 출범한 호주는 정치적 무관심과 낮은 투표율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시쳇말로 "정치가 밥 먹여 주냐?"는 국민들의 시큰둥한 반응을 반전시킬 방도를 궁리하던 호주연방의회는 그 당시 벨기에에서 논의 중이던 강제투표제 실시를 검토했다.

18세 이상의 국민이 합당한 사유 없이 투표에 불참하면 벌금을 내야하는 강제투표제도는 도무지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국민들을 투표장으로 끌어 모으기 위해서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던 것. 그러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호주는 1913년에 강제투표제도의 법령을 마련하여 1915년 퀸즐랜드 주 지방정부 선거에서 처음 시험실시 해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에 고무된 연방의회는 1924년에 강제투표법을 제정하여, 1925년 총선에서 전국단위로는 세계 최초로 강제투표제도를 실시했다.

이렇듯 8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호주의 강제투표제도는 현재 32개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선거제도다. 그중 19개국에서는 모든 선거에 적용하고, 나머지 13개 국가(프랑스, 이태리, 네덜란드 등)는 일부의 선거에만 적용한다.

OECD국가 30개국 중에서 7개 국가(호주, 벨기에, 오스트리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스위스, 터키)는 완전시행 국가다. 특히 남미 대부분의 국가들(브라질, 멕시코,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에콰도르)이 강제투표제도를 완전시행하고 있는데, 이 제도를 채택한 후의 투표율은 거의 수직상승에 가깝다.

그건 80년 전의 호주도 마찬가지였다. 1903년 첫 연방선거의 투표율이 46.8%이었는데 법을 도입한 이후에 실시한 1925년 연방선거에서는 91.3%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호주선관위의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 6억3천만 명이 강제투표제도에 의거해서 투표했다. 18세 이상 인구의 9.6%다.

아직도 논란의 여지는 많아

a "투표 안하면 면허증도 없다," 호주 한 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선거캠페인 연극.

"투표 안하면 면허증도 없다," 호주 한 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선거캠페인 연극. ⓒ TNT

호주의 강제투표제도가 크게 성공했음에도 정당성 여부의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물며 여러 부서의 장관을 역임한 닉 민친 상원의원은 “3년에 1번 정도(실제로는 지방선거를 포함해서 1년에 1번 정도임) 투표장으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UN의 한 인권 관련 기구에서도 “강제투표제도가 선택의 권리를 제한 한다”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는 국민 다수의 뜻에 따르는 것. 1996년, 호주 선관위는 <뉴스 폴>이라는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서 강제투표제도에 관한 국민의 뜻을 물어봤다. 결과는 74%가 찬성했다.

높은 찬성률에 고무된 의회는 그 다음 해인 1997년, 선거법개정안을 투표에 부치면서 강제투표제도를 한시적으로 중지했다. 말썽 많은 강제투표제도를 폐지해도 여전히 투표율이 높게 나온다면 그 제도를 없앨 요량이었다.

그러나 막상 선거를 해보니 기대했던 것과 사뭇 다른 결과가 나왔다. 투표가 비록 우편투표제로 실시됐지만 투표 참여율이 47% 밖에 되지 않았던 것. 결국 강제투표제도 실시 여부를 놓고 계속해서 논란을 벌인다는 건 국력 낭비라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a "투표도 하고 DVD도 탑시다." 선거인등록 장려 캠페인에 참석한 젊은이들.

"투표도 하고 DVD도 탑시다." 선거인등록 장려 캠페인에 참석한 젊은이들. ⓒ 호주 선관위

투표불참자는 재판거쳐 벌금형... 실형 받기도

호주의 투표율이 95% 이상이기 때문에 실제로 처벌 대상자는 많지 않다. 끝까지 불참사유를 해명하지 않아 법정으로 가는 사람은 1% 미만이다. 벌금은 20호주달러 정도(약 1만6000원). 그러나 선관위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법정으로 가서 패소하면 50호주달러의 벌금과 법정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판사의 이의신청 기각에 불복하거나 끝까지 벌금을 내지 않은 사람은 실형언도를 받는다. 이에 대해 너무 심하다는 반응이 있지만, 선거법에 관해서 호주선관위는 아무런 공식견해가 없다. 의회에서 법을 만들고 판결은 판사가 한다.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는 법, 호주의 강제투표제도가 투표불참자를 처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호주 선관위는 투표참여율을 높이기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한다. 특히 투표에 처음 참여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집중적인 투자를 한다.

브라이언 할레트 부위원장은 “선거기간에는 신문 TV 광고 등을 대대적으로 펼쳐서 선거무드를 조성한다. 그러나 선거가 없는 동안은 주로 학교로 찾아가서 설명회를 갖고 선거인등록도 받는다. 호주국민의 주요한 의무는 납세, 교육, 선거참여, 배심원 활동 등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록그룹을 초청해서 ‘선거인등록 장려 록 콘서트’를 열고 경품추첨을 통해 휴대전화나 DVD 등을 시상하는 활동도 호주선관위의 몫이다. 행사장에 모인 젊은이들 수천 명이 등록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이동투표소(Mobile polling)도 호주선관위가 창안한 성공사례다. 양로원, 병원, 독립가옥이 있는 오지는 물론이고 감옥에까지 이동투표소가 설치된 차량을 몰고 찾아간다. 호주에선 5년형 미만의 죄수들도 투표권을 갖는다.

그것 말고도 호주 선관위는 유권자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한다. 사전투표와 우편투표 등이 있고 선거일 20일 전부터 투표할 수 있도록 해 여행을 앞둔 유권자는 미리 투표할 수 있다. 또한 거주지에서 8km 이상 떨어진 지역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우편투표를 신청할 수 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호주에서도 선거 당일의 날씨가 투표율에 영향을 미친다. 날씨가 좋으면 젊은이들이 야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아 투표율이 낮아지는 것. 반면에 날씨가 나쁘면 노동당이 불리하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오래 전의 얘기지만, 노동당을 주로 지지하는 노동자와 서민은 정치의식이 낮고 자동차 보유율도 낮아서 비를 맞으며 먼 투표장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투표일 오후에 열리는 토요럭비 때문에 노동자의 투표율이 낮아진다는 호주선관위의 지적이 나오자 방송사가 선거 당일의 럭비중계를 자제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핍박받던 시절 기억해야

호주선관위 브라이언 할레트 부위원장과의 전화인터뷰를 끝내면서, 한국의 낮은 투표율에 대한 반응을 알아보았다. 그는 7.26 재·보선에서 24.8%라는 사상최저 투표율이 기록됐다는 뉴스에 깜짝 놀라면서도 공식적인 언급을 피했다.

다만 사견임을 전제로 “그런 정도의 투표율로는 간접민주주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본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뽑으면서 겨우 25% 정도만 의사를 표시하면 나머지 75%는 소수의 의견에 승복하겠다는 건가? 그래서야 어떻게 법의 권위가 공고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가 무척 망설이다가 내뱉은 다음과 같은 말이 오랫동안 귓전에 맴돌았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투표불참은 자기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일이다. 귀찮다거나 쉬고 싶다는 이유로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사람은 민주주의가 핍박받던 시절을 한 번쯤 곱씹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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