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아미고'의 뜻을 알게 되다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 20] 바디 랭귀지만 믿고 떠난 무모한 여행

등록 2006.11.07 11:48수정 2006.11.0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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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 ⓒ 정민호

새벽 6시 35분, 알베르게를 나왔다. 길이 어둡지만, 순례자들과 함께 걷기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 이날의 목적지는 아르주아. 29km를 걸어야 한다. 길이 유난히 예쁘다. 색색의 꽃들은 물론이고 그 꽃들과 함께 우거진 숲이 나를 설레게 한다. 물론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예쁜 길은 아름다운 길로 다가오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동물들을 볼 기회가 많다. 특히 소들이 많은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소들을 방치(?)하고 있다. 들판에 소들을 풀어놓은 것이다. 언젠가 어른들이 소와 말을 향해 "마소! 마소!" 외친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한번 따라해 봤다. 그 소들, 꿈쩍도 안하고 나를 빤히 본다. '쟤 뭐 하니?'하는 눈빛이다. 멋쩍은 순간이다.

다리 상태가 좋다. 그래서 아르주아 3km전, 리바디소에서 평소에 부러워하던 것을 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뛰기! 아주 드물지만, 젊은 사람들은 내리막길에서 뛰어갈 때가 있다. 웃음을 한껏 머금고 뛰어 내려가는데 물집 때문에 끙끙거리던 나는 마냥 그것이 부럽기만 했다.

하지만 이날은 가능할 것 같았다. 만용일지 모르지만,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고 "으아!"소리를 내며 내리막길을 뛰었다. 뛰면서 만나는 순례자들에게 "올라!"를 외치며 또한 "부엔 카미노!"를 외쳤다. 내가 뛰다니! 내가 뛰다니! 뛰면서도 참 신기했다. 가방의 무게와 가속도를 못 이겨 얼마 못가 자빠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 상쾌함은 잊을 수 없다.

레스토랑에서 인터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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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 ⓒ 정민호

오후 1시 10분, 아르주아에 도착하자마자 호스피탈레로에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적어둔 항공사 전화번호가 비에 젖어 알아볼 수 없어 새로 확보해야 했다. 호스피탈레로는 놀랍게도 중앙도로 반대편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라고 한다. 레스토랑?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맞단다.

그곳을 쉽게 찾기는 했는데, 쉽게 들어갈 수는 없었다. 레스토랑에 인터넷 하러 들어왔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상황이 다급하니 일단 들어갔다. 놀랍게도 레스토랑 한가운데에 컴퓨터 두개가 놓여있다. 인터넷 사용은 물론이고 프린터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캠도 있다. 가격은 10분에 0.5유로이다. 주변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터넷 하는 기분이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번호를 찾아낸 뒤에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외국에서 외국으로 전화를 하는 것이다. 일단 동전 몇 개를 넣고 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수화기 저 먼 곳에서 스페인 아가씨의 목소리가 담긴 기계음이 잘도 솰라솰라한다.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번호를 잘못 눌렀다는 말일까? 아니면 누르는 것이 늦었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아무래도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하는 것인 만큼 동전을 더 넣으라는 말인 것일까? 도통 바디랭귀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알베르게의 내 침대 주변을 장악한 스페인 삼총사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우리 대화 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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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 내부 ⓒ 정민호

스페인 삼총사는 남자 둘, 여자 하나인데 영어를 못한다. 내가 "패밀리?"해도 고개를 끄덕하고, "프렌드?"해도 고개를 끄덕한다. 그러니 좀처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체불명의 삼총사라고 불렀는데 이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알베르게에 가보니 아래 침대에 두 명은 자고 있고 내 옆 자리의 청년은 다리 운동을 하고 있다. 나는 과감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스페인에서 프랑스에 전화를 걸 때 얼마를 넣고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디스, 에스파뇰, 폰, 따르르릉, 투, 프렌치 파리, 유즈 유로 코인"이라는 말을 한 뒤에 "얼마야?"라는 단어들을 붙여야 하는데 이것만큼은 한국에서 적어둔 스페인어가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어로 "얼마입니까?"라고 적은 종이를 보여줬다.

스페인 청년은 고개를 갸웃한다. 한참 고민하더니 솰라솰라한다. 왜 이리 길게 말하지? 숫자를 적어달라고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그런데 아뿔싸! 문장을 적는다. 그리고 끝에는 물음표를 붙인다. 어라? 곰곰이 보니, 그것은 불어다. "얼마입니까?"라는 스페인어를 불어로 번역해준 것이다.

나와 청년의 눈이 마주쳤다. 청년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눈치다. 다시 물어보고 싶지만, 내가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그라시아스."라고 말했다. 그 청년, 꽤 좋아한다. 나는 언어의 어려움을 느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내가 왜 웃는지 모르고 그 청년도 따라 웃는다. 울랄라!

너는 나의 아미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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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주아 ⓒ 정민호

알베르게를 돌아다니다가 일본인이 붙여놓은 쪽지를 봤다. 그것은 뒤에 오는 다른 순례자를 위해 남긴 글이다. 그것을 보다가 문득, '아미고'라는 단어의 뜻을 물어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것에 대한 궁금증은 며칠 전부터 생겼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아미고"라고 말했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몰려 있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영어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미고?"라고, 말의 끝에 악센트를 상당히 주며 '물음'이라고 알려줬는데 다들 "아미노!"하더니, 당황스럽게도 날 껴안는다. 뭐지? 답답해서 "아미고!"라고 말한 뒤에 손으로 물음표를 그려 보이기까지 했지만 허사다. 아미고, 아미고 하며 나를 붙잡더니 되레 어디서 온 꼬레앙이냐고 묻는다.

도대체 아미고가 뭔가? 무헤르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고, 헤이버그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했는데, 도대체 그게 뭐지? 그 사이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영국인 할아버지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영어로 대화를 했다.

"아미고가 무슨 뜻이에요?"
"아미고는 친구를 뜻하는 거야."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특히 무뚝뚝했던 헤이버그 할아버지는 나를 친구라고 불러줬던 것인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올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친구라고 하지만, 그래도 표현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정말 한심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때서야 '아미고'라는 노래 제목도 있었다는 것도 기억했으니 오죽하랴. 도대체 나는 왜 무조건 모르는 단어라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알베르게를 나왔다. 혹시나 싶어서 마을의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가봤다. 그곳에 헤이버그 할아버지는 없었다. 주변에 있는 펜션에 가서 인상착의를 설명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가이드북에 나온 코스대로 움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전 마을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참 미안한데, 정말 안타까운데,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 운이 좋다면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다시 보면, 꼭 먼저 말할게요. 할아버지, 부엔 카미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내가 온 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난히 콧등이 시큰거리는 날이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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