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면 핸드크림 드려요"

한 대학 총학 선거에서 등장... 유권자 범위부터 재정립해야

등록 2006.11.24 18:31수정 2006.11.2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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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A "웬 핸드크림이야? 얼마 주고 샀어?"
학생 B "아~ 이거? 오늘이 총학생회 선거일이잖아. 선거하니까 주던데."
학생 A "정말? 나도 선거하러 가야겠다. 귀찮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학생 B "빨리 해. 투표할 때 얼핏 보니까 얼마 안 남은 거 같았거든."


a 학생회 선거를 위해 학생들이 투표하는 모습.

학생회 선거를 위해 학생들이 투표하는 모습. ⓒ 허환주

대학의 총학생회 선거에서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이색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서울 A대학에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선관위)에서 시가 2600원 상당의 핸드크림 4000개를 마련, 이를 투표한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를 두고 '학생회가 학우들에게 더 접근하기 위한 노력이며 적절했다'는 의견과 '선거의 공정성을 해치면서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가'하는 회의적인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학생회 투표에 핸드크림까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현실 문제에 무관심한 대학교 재학생들의 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각 대학이 직면한, 50%에도 못 미치는 투표율은 학생들의 개인주의 성향과 취업에만 관심을 두게 하는 사회 풍조의 합작품인 셈이다.

특히 마지막 학기를 이수하는 예비 졸업생에게 학생회 선거는 별 의미가 없다. 선거유세는 시끄럽고 자신을 방해하는 '행사 중 하나'일 뿐이다. 이유는 한 가지.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실제로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4학년 학생들에게 과연 학생회 선거가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같은 맥락에서, 곧 학교를 떠나는 이들이 학생회 유권자로 속해 있어야 하는지도 아리송해 한다.

선거와 상관없는 4학년 유권자


하반기 취업을 위해 토익과 면접 스터디를 동시에 준비하고 있는 이 학교 4학년 강모(24)씨는 학생회 선거가 짜증난다고 한다. 강씨는 "얼마 전 수업을 듣고 있는데 교실 바로 앞에서 노래 부르고 고함치는 등 너무 시끄러웠다"고 말하고 "유세도 좋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좀 조용히 해줬으면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4학년 이모(25)씨도 같은 의견이다. 이씨는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선거가 학업 분위기를 망친다"고 비판한 뒤 "선거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면 선거 때문에 방해받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선거 때문에 피해 보는 게 답답하다고 말했다.


4학년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선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학생회장이 선출되더라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학생회장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떠날 4학년들에게 '차기 학생회장'은 관심 밖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전히' 유권자인 4학년들에게 투표권은 달갑지만은 않은 권리다.

실제로 4학년들의 투표율은 상당히 저조하다. 졸업 전에 취업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거는 남의 일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회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4학년생들도 있지만 소수다. 서울에 있는 B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선관위원은 "4학년은 다른 학년에 비해 투표율이 상당히 저조하다"고 밝히고 "대략 10%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학교를 떠나는 4학년이 유권자? 그럼 1학년은?

A대학은 작년 11월에 총학생회 선거를 치렀을 때, 선관위에서 집계한 유권자 수는 5872명이었고 그 중 4학년은 1198명이었다. 이들이 모두 투표를 한다 해도 약 20%의 유권자는 당선된 학생회장이 선거공약을 제대로 지키는지도 알 수 없다.

예비 졸업생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이들도 있다. 바로 신입생들이다. 올해 A대학에 들어온 입학생은 1766명. 앞으로 학교에서 생활하게 될 전체 학생 중 30%에 육박하는 인원이다. 하지만 이들은 총학생회장이 어떤 공약을 내세웠는지 알지 못한다.

올해 이 대학에 입학한 최모(20)씨는 "학생회가 추진하는 사업이 무엇이었는지 솔직히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내가 선거유세를 듣지 않았으니 학생회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공약을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신입생 박모(20)씨는 "학생들의 개인주의가 학생회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한 것 같다"고 말하고 "하지만 신입생들이 학생회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데는 (자신들이 선출한 학생회가 아니라는) 구조적인 문제도 어느 정도 있다"고 지적했다.

졸업예정자를 정족수에서 빼는 고려대와 중앙대

학생회에 무관심한 학생들,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학생회, 그런데도 매년 치러지는 학생회 선거. 대안은 없는 것일까.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유권자의 범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미 몇몇 대학에서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학생회 선거를 치르고 있다.

중앙대의 경우, 4학년 학생 중에서 이듬해 8월 졸업생은 투표권이 있지만 2월 졸업생의 경우에는 투표권이 없다. 8월 졸업생의 경우, 새로운 총학생회가 활동하는 이듬해 1학기에 학교를 다니기 때문이다.

김주식 중앙대 선거관리위원장은 "내년에는 동문회에 속해 있을 학생이 투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학교에 없을 사람들이 후배들을 위해 학생회 투표를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4학년이 유권자가 될 수 없도록 선거 세칙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고려대도 중앙대와 비슷한 선거세칙을 올해부터 실시한다. 고려대는 선거의 정족수 자체를 유동적인 개념으로 바꿨다. 즉 1, 2, 3학년 인원을 기본 정족수로 하고, 졸업예정자인 4학년의 경우 투표에 참여하는 이들만 개별적으로 정족수에 넣기로 한 것. 투표를 하지 않은 4학년은 전체 투표율 등을 계산할 때 기본 수치가 되는 정족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형균 고려대 중앙선거관리위원은 "4학년의 투표 참여율이 저조하고 졸업예정자들에게 새 총학생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 등을 감안해 이렇게 결정했다"고 밝혔다.

곧 졸업하고 학교를 떠날 4학년 학생들이 후배들을 위해, 혹은 학교를 위해 투표를 미리 하는 것은 학생에게도, 학생회에도 좋지 않다. 또한 1년 간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뛰어야 할 학생회장을 직접 뽑지도 못한 채, 단순히 선배들이 선출한 학생회장을 인정해야 하는 대다수의 신입생들은 어떤가. 이 역시 학생회와 재학생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다.

오랫동안 학생회에서 활동해온 서모씨는 투표율이 저조한 원인을 학생들의 개인주의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서씨는 "실제로 학생들이 과거와 비교해서 탈정치화, 개인주의 성향을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그것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학생들과 함께 하지 못한 학생회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서씨는 "단순하게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일회성 정책이나 과거만 답습하는 제도 대신 많은 재학생이 학생회에 참여하며 자신이 학교 구성원임을 인식하게 하는 기반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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