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대 칼바람 속에서 극락을 예약하다

아름다운 설경의 속리산 문장대를 오르며 새해 소망을 빌다

등록 2007.01.01 13:58수정 2007.01.0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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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054m의 문장대 정상. ⓒ 전갑남

@BRI@방학이 시작되었다. 내가 근무하는 강남중학교는 매년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학생수련회를 한다. 올해는 속리산을 택했다. 수련회를 통해 학생들은 호연지기를 기르고, 친구들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좋은 기회를 갖는다. 선생님들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학생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미래의 꿈을 키우는 제자들을 격려한다.

수련회 시작 이튿날. 속리산 문장대를 등반하기로 한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통 세상이 하얗다. 살을 에는 듯 날도 차갑다.

산행이 걱정되는지 남학생 녀석이 아침을 먹고 내게 다가 와 묻는다.

"선생님, 문장대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그럼. 올라가야지."
"우린 다 간다는데, 여자 애들은 못 간다고 아우성이에요."
"그래? 여학생들은 엄살이 좀 있지. 그래도 가자고 독려하면 나설 거야!"

각자 오를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힘닿는 데까지 가기로 했다. 겨울 산행은 무리할 수 없기에 체력과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간밤에 내린 눈이 산행에 지장을 줄 것 같아 이런저런 걱정이 많다.

그래도 저마다 복장을 든든히 하고 상쾌한 출발! 추운 날씨라 엉금엉금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입에서는 하얀 김이 나온다. 생각보다는 길이 크게 미끄럽지 않아 천만 다행이다.

참가 인원 전원 첫 번째 목표는 세심정까지 가는 것. 법주사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세심정까지는 호젓한 산길이다. 한 시간 남짓 천천히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본격적인 산행 준비 운동으로 적합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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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결의를 다진 우리 학교 남학생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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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게 산에 오르는 여학생들. ⓒ 전갑남

세심정에 도착한 우리는 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남학생들이 먼저 눈에 띈다. 의기양양하게 올라오는 학생들에게서 청년의 기상이 느껴진다. 쉬는 것도 마다하고 바삐 올라간다.

뒤따라 올라오는 여학생들의 표정도 힘들어 보이지만 씩씩하다. 숨넘어가는 소리로 한 녀석이 어리광을 부린다.

"선생님, 저희들 그만 가면 안돼요?"
"왜? 힘들어서? 그래도 힘을 내야지! 좀 더 가보고 생각해 보자."

선생님들의 독려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행군을 계속한다. 낙엽이 쌓인 길에 내린 눈이 푸석푸석하다. 겨울 등산장비가 없어도 의지력만 있으면 충분히 정상까지 갈 것 같다.

힘들어도 오르는 산

힘들다 하면서도 학생들의 발걸음은 빠르다. 세심정을 출발하여 용바위골휴게소를 지나자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앞선 사람들을 따라가는 데 내가 힘에 붙인다.

나에게 이번 문장대 등반은 세 번째다. 대학 때 친구들과 함께 오르고, 결혼 전 아내와 함께 오르기도 했다. 그 때의 기억은 힘들었다기보다는 속리산의 아름다운 풍광만이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오늘은 다리가 팍팍하다. 쉬어가자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오십 중반이 가까워지고 보니 몸이 예전만 못하다. 앞으로 문장대와 같은 높은 산을 몇 봉우리나 오를 수 있을까? 몸 따로 마음 따로 이니 무상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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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 내리며 산에 오르다. ⓒ 전갑남

점점 계단이 많아지고 가팔라진다. 숨이 턱에 차오른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보현재휴게소가 나온다. 휴게소 옆 할딱고개라는 푯말이 재미있다. 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다.

할딱고개에 올라서자 먼저 올라온 여학생들이 컵라면을 먹으며 반가운 듯 호들갑을 떤다.

"선생님, 남자애들은 죄다 올라갔어요. 저흰 더 이상 못 가겠어요. 그만 내려가도 되죠? 너무 힘들어요.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하죠?"

함께 온 여선생님 몇 분도 애들과 함께 내려가야겠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정상을 밞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세 분의 선생님과 발길을 옮겼다. 차가운 날씨에도 등허리에 땀이 밴다.

산행을 마치고 몇몇 등산객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 부러운 생각이 든다. 내가 물었다.

"아저씨, 정상까지 얼마나 가야 해요?"
"이제 다 왔네요. 기운내세요."

얼마 안 남았다는 말에 새로운 힘이 난다. 아름다운 속리산의 멋진 설경과 기암괴석의 풍광도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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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의 기암괴석. 억겁의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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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정상에서 본 산하. ⓒ 전갑남

새해 소망을 담다

있는 힘을 다하여 발길을 옮기는데도 오르막길은 연속이다. 오르고 또 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등산로에 올라서니 문장대의 표지석이 눈앞이다. 사방이 툭 틔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주변에 넓고 엄청나게 큰 바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맑은 햇살에 빛나고 있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학생들이 손짓을 한다. 정상 바위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내려오는 모양이다. 매서운 칼바람에도 정상을 정복한 뿌듯함에 자랑스럽게 서있는 학생들이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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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 정상을 정복한 학생들이 자랑스런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다. ⓒ 전갑남

"우리가 이렇게 높은 곳까지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문장대 높이가 1000m 넘는대요."
"이런 곳을 여자애들도 와봐야 하는데... 후회할 걸요."

뭔가 해냈다는 자부심에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차가운 바람에 얼굴에는 홍조를 띠고 있다.

"정상에 빨리 오릅시다."

우리도 정상의 바위산을 밟기 위해 철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상 끝까지 온 선생님은 체육선생님과 여선생님 두 분이다.

"선생님, 철계단 조심해서 오르세요.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한 학생이 주의를 준다. 양손으로 난간을 힘껏 붙잡았다. 한발 한발 조심해서 오르니 문장대 바위산의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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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 바위산 정상에서 정복의 기쁨을 누린 우리 일행. ⓒ 전갑남

매서운 칼바람이 사정없이 뺨을 때린다. 이렇게 차가운 바람을 맞아보기는 난생 처음인 것 같다. 굽이굽이 겹쳐있는 산하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아무리 날이 차가운 비람이 휘몰아쳐도 자연은 끄떡없이 제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정해년 새해의 소망을 빌어본다. 앞으로도 이런 산을 거침없이 오를 수 있는 건강이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학생들도 온갖 어렵고 힘든 과정에서도 꿈쩍하지 않은 문장대의 바위처럼 굳굳하게 자라기를 기대해본다.

"선생님, 너무 추워요."

여 선생님이 휴게소에서 뜨끈한 국물이라도 있나 보자며 빨리 내려가자고 한다. 우리는 정상에 있는 휴게소에서 언 몸을 녹였다. 시래기 토장국 국물에 찬 막걸리를 들이켰다. 뜨끈한 국물에 막걸리 한 잔이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를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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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의 설경의 아름다운 모습. ⓒ 전갑남

올라갔던 길을 되밟아 내려가면 속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고 산장지기가 알려준다. 신선대, 경업대로 이어지는 구간을 따라 우리는 하산했다. 코스를 달리하니 오를 때와 또 다른 느낌이 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설경과 속리산 암릉의 멋스러움에 하산하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다듬어진 속리산의 바위들은 여느 산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여섯 시간 가까운 산행을 마치자 날이 어둑어둑하다. 세 번 오르면 극락세계에 간다는 문장대! 그러고 보면 나는 이번 산행으로 세 번째 올랐으니 극락세계는 예약한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전갑남 기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강남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전갑남 기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강남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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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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