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으로 사라진 해를 봉화산에서 만나다

해에 대한 상상력과 무공해 여행에 대하여

등록 2007.01.01 18:17수정 2007.01.0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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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용산에서 본 해넘이 -2006년 12월 31일 오후 5시 37분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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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봉화산에서 본 해돋이-2007년 1월 1일 오전 7시 35분 ⓒ 안준철

@BRI@12월 31일 어제 순천만을 다녀왔습니다. 한 해를 갈무리할 마음으로 마지막 해넘이를 보러 갔지요.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아내에게는 조금 무리일 듯싶어 갈 때는 시내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순천만 대대포구에 닿은 시간은 오후 4시 45분. 아내는 행여 해넘이 시간을 놓칠까 봐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지만, 가끔은 뉘엿뉘엿 지는 해의 마지막 햇살을 받고 있는 잘 그을린 갈대의 피부색에 반한 탓인지 발걸음이 늦어지기도 했습니다.

푸른 보리밭을 연상시키는 봄의 순천만도 나름대로 멋있지만 아무래도 갈대의 제철은 늦은 가을부터입니다. 꽃은 대부분 필 때는 아름답지만 질 때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갈대는 필 때보다 지는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갈대밭을 거닐다 보면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껏 신뢰가 깊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철든 소년 같은 생각도 하게 되지요.

순천만 대대포구에서 용산 전망대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족합니다. 그래도 처음 오르막길은 깎아지른 듯한 산세가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한 계단 한 계단 착실하게 올라가야 합니다. 서둘러 빨리 오르다 보면 오히려 뒤쳐질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고 해도 단숨에 오르기는 어렵기 때문이지요. 이런 단순하고 당연한 사실조차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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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 안준철

용산 전망대에 도착하자 막 해가 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해가 진다는 생각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 해가 진다는 생각은 더욱 그렇지요. 오늘 지는 해와 내일 지는 해가 다르지 않을 텐데 거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해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네 인생을 좀 덜 지루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 저도 해에 대한 상상력을 자주 발휘합니다. 사과 한쪽을 베어 먹다가도 문득 해를 생각합니다. 사과의 동그랗고 붉은 자태가 영락없이 해를 닮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과의 사각사각한 맛의 촉감과 은은한 향기가 해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사과나무의 가지와 줄기와 이파리와 열매에 와 닿지 않았다면 사과의 싱싱한 맛은커녕 생산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사과라는 탐스러운 과실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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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 안준철

어린 아이들의 맑은 눈을 보면서도 저는 해를 생각합니다. 태양이 조금만 더 지구에 가깝게 다가와도, 혹은 조금만 지구에서 떨어져도 무릇 모든 생명체는 예외 없이 타죽거나 얼어 죽고 맙니다. 생명 중의 생명인 어린 아이, 그 영혼의 창인 맑은 눈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 끔찍한 재앙이 어떻게, 왜 일어나겠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인간)는 그 재앙 안으로 이미 몇 발짝 들어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오존층 파괴가 자외선 통과를 도와 지구를 부분적으로 초토화시키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사막화가 가속되어가고 있는 죽음의 땅에서 살고 있는 어린 아이들은 맑은 눈빛은커녕 생명조차 위협받고 있습니다.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는 예전과 다름이 없지만 지금 지구의 일부분은 이미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문명화된 우리(인간)의 자연환경에 대한 몰이해와 탐욕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제가 해에게 배우는 것은 평등한 사랑입니다. 하늘에 해가 뜨면 온 누리가 밝아집니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라고 해가 더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마땅히 아이들을 평등하게 사랑하려고 합니다. 진실한 아이나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나 같은 생명으로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가끔은 진실성이 결여된 아이에게 좀더 많은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중증환자에게 좀더 강한 처방을 내리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인성이 부족한 아이라면 좀더 오랜 사랑으로 안아주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저는 요즘 '무공해 여행'을 자주 합니다. 무공해 여행이란 말 그대로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은 여행을 말합니다.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오는 여행이 가장 좋고, 걸어가기에 너무 먼 거리일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물론 가끔 택시를 타기도 합니다. 친구나 동료들의 차를 함께 타기도 합니다. 저는 그분들이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무공해 여행을 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 같은 촌스러운 사람도 있어야 세상 돌아가는 속도가 조금이나마 늦춰지지 않을까 싶은 것이지요.

좀 엉뚱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저의 무공해 여행도 평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서만 평등이 유지된다고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도 평등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서로가 서로를 동등한 가치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평등의 철학입니다. 저는 그것을 해에게서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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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 안준철

어제 순천만 화포 근처 산 너머로 사라진 해를 오늘 아침 봉화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포기하고 돌아갈 뻔하다가 만나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동네 뒷산이나 다름없는 봉화산에 떠오른 해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제, 그리고 오늘 해 구경을 하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해가 지는 모양이나 떠오르는 모양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은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처럼 말이지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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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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