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출입 금지", 도대체 어떤 수도원이기에?

[내가 만난 아프리카⑧] 청나일의 발원지 타나 호수

등록 2007.01.01 20:00수정 2007.01.0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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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 호숫가에서 집단으로 모여 먹이를 잡고 있는 펠리컨 떼. ⓒ 김성호

청나일의 발원지 타나 호수 위에서

@BRI@청나일 폭포를 같이 구경했던 수호천사 남매와 함께 바하르다르 시내로 돌아와 점심을 같이 먹고 헤어졌다. 몇 시간 밖에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최초의 아프리카 현지인과의 동행이어서인지 헤어지면서 마음이 많이 쓰렸다.

나는 수도원을 찾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타나 호수의 섬에 있는 수도원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다. 타나 호수 위의 37개 섬에는 무려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다. 배타는 곳은 바로 내가 묵는 숙소의 바로 옆에 있었다.

나는 작은 모터 배인 통통배를 타고 타나 호수로 들어갔다. 타나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실제로도 크기가 3500㎢나 된다. 통통배를 모는 젊은 남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호수는 빅토리아 호수이고, 두 번째는 탕가니카 호수이고, 세 번째가 타나 호수"라며 "그러나 물이 맑고 수도원이 있어 아름답기로는 타나 호수가 최고"라고 자랑했다.

작은 배를 타는 선착장 주변의 호숫가에는 수백 마리의 펠리컨들이 집단으로 모여 먹이를 잡거나 깃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펠리컨은 긴 부리에 몸통은 흰색으로 큰놈은 크기가 2m에 달하는 황새의 일종이다.

먹이를 잡아 삼키면 아랫부리가 주머니처럼 크게 늘어나는 것이 특색인 펠리컨은 타나 호수 주변에 많이 있는 파피루스에 둥지를 틀고 있다. 타나 호수는 에티오티아의 젖줄로서뿐 아니라 기러기와 독수리, 물수리 등 각종 새들과 하마, 파피루스의 서식지로 알려졌다.

통통배가 호수 중심 쪽으로 조금 달리자 3척의 작은 배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바로 현지인들이 탕크와(tankwa)라고 부르는 파피루스로 만든 배다. 3명의 어부가 파피루스 풀의 줄기로 만든 배에 각각 한명씩 타고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종이인 'paper'의 어원인 파피루스(papyrus) 풀은 이집트에서는 껍질로 종이를 만들었고, 에티오피아에서는 줄기를 묶어 배를 만들었다. 탕크와는 여전히 이곳 주민들에게는 공예품과 땔감, 심지어 황소까지 실어 나르는 중요한 해상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파피루스로 만든 탕크와는 주로 시내에서 2km 떨어진 웨이토 마을에서 만들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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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 호수 위에서 파피루스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어부들. ⓒ 김성호

바다 같이 넓은 타나 호수는 바로 청나일강이 시작되는 시원지로 유명하다. 나일강은 이곳 동부 아프리카 청나일의 시원지인 타나 호수에서 흘러드는 물과 중부 아프리카 백나일의 시원지인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에 접해 있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흘러드는 물이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만나 이집트를 거쳐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청나일(Blue Nile)은 말 그대로 물의 색깔이 푸른 색에 가깝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고, 백나일(White Nile)은 청나일보다 맑은 흰색에 가깝다는 이유에서 붙여졌다.

청나일은 나일강 수량의 2/3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길이가 짧고 흐름이 고르지 않아 백나일강의 빅토리아 호수에 묻혀 덜 알려졌다. 그러나 청나일은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서 많은 양의 유기물을 실어 와 이집트 하류에 비옥한 점토층을 만들어 주워 농업발달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이집트 고대문명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유럽인들이 나일강 탐험에 나섰던 이유는

청나일은 고대부터 이집트에서는 촐로에 팔루스, 그리스에서는 프세보에라고 불렸다. 근세에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북아프리카 알제리 주재 영국영사로 재임 중이던 제임스 브루스가 1770년 타나 호수를 탐험한 뒤 1790년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라는 여행기를 출간하면서.

제임스 브루스는 당시 청나일강과 다른 백나일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유럽인들이 갈망하던 나일강의 수원에 대한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었다고 선언하는 호기를 부렸다. 청나일의 경우에도 이미 16, 17세기에 걸쳐 두 명의 포르투갈인 예수회 신부인 프란시스코 알바레스와 페드로 파에스가 타나 호수를 탐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빛이 바랬지만.

물론 훨씬 뒤인 1858년 영국인 존 해닝 스피크에 의해 청나일강보다 더 긴 백나일강의 수원이 빅토리아 호수라는 사실이 밝혀져 나일강의 수원에 대한 유럽인들의 오랜 의문이 마침내 풀렸다. 유럽인들이 이처럼 나일강의 수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애초에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생지인 나일강에 대한 신비와 호기심에서 출발해 제국주의적 영토야욕, 인류의 진화와 이동경로에 대한 관심으로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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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수도원이 있는 타나 호수 위의 두개의 섬. ⓒ 김성호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미 B.C. 5세기에 이집트를 여행한 뒤에 <역사>라는 책에서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기록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은 옛날부터 유럽인들에게 신성한 대상이었고 지리학적 신비로 남아 있었다.

나일강은 어디에서 흘러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탐험으로 이어졌다. 로마의 5대 황제 네로(재위 54~68)는 나일강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직접 탐험대를 파견해 수단의 남부까지 도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유럽 제국주의의 영토야욕에 의해 본격적으로 나일강 탐사가 이뤄졌다. 1858년 백나일강의 수원인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한 존 해닝 스피크는 바로 영국 정부가 파견한 당시 인도 주둔 영국군 장교였다.

찰스 다윈이 지난 1859년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주장하면서 나일강은 인류 진화와 이동의 주요한 경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간이 원숭이 등 유인원에서 진화되었다고 주장한 다윈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아프리카 침팬지가 살고 있는 아프리카를 인류의 발생지로 꼽았던 것.

아프리카 중에서도 에티오피아와 케냐를 중심으로 고대 인류화석이 발견되면서 인류고고학자들은 백나일강과 청나일강을 따라 인류가 유럽과 아시아 대륙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일강은 단순히 고대 이집트 문명뿐 아니라 고대 인류의 진화와 함께 흘러왔던 것이다. 나일강은 이처럼 초기 인류의 발자취에서 고대 문명의 흔적까지 묻혀 있는 인류역사의 보고이다.

'청아한 아이다'의 노래소리가 청나일강으로 흐르고...

산악지대를 흘러가는 맑은 청나일강과 평지를 흐르는 우윳빛 백나일강이 만나 하나가 되는 나일강은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이미 1만 년 전인 B.C. 8000년에 인간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일강과 인간이 합쳐지면서 오아시스와 농사, 문명과 문화, 전설과 신화, 전쟁과 평화, 사랑과 배신의 스릴 넘치는 원초적 본능의 인간과 자연이 뒤범벅이 되는 역사를 만들어 왔다.

람세스 2세와 젊은 파라오 투탕카멘, 시바의 여왕과 클레오파트라 여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태양의 종교와 모세의 출애굽기를 통한 유대교 및 기독교, 옛 에티오피아 영토였으나 지금은 수단에 속하는 누비아 왕국의 공주 아이다와 고대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의 비극적 사랑을 담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의 이야기도 나일강 물을 따라 흘러 흘러 우리에게 다다르고 있다. 출렁거리는 타나 호수의 물은 사랑하는 연인을 애절하게 부르는 호세 카레라스의 아리아 '청아한 아이다(Celeste Aida)'를 싣고 청나일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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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토스 이야수 수도원의 오래된 양가죽 암하릭어 성경. ⓒ 김성호

팔십 노수사가 맞는 신비로운 엔토스 이야수 수도원

호수 위에는 고기를 잡기 위해 물속으로 깊게 들어가는 물새도 보였다. 이름 모를 이 물새는 자신의 몸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속 깊이 들어간 뒤 우리 배가 다 지나갈 때까지 물위로 솟아오르지 않았다. 시원한 호수 위를 달리면서 아름다운 장면들을 구경하다 보니 호수 한 가운데에 두 개의 나무로 뒤덮인 섬이 보였다. 바로 오늘 방문하는 수도원이다. 통통배로 30분 정도 달려왔다.

온통 나무와 숲으로 가려 아무런 건물도 보이지 않은 섬에 도착하니 80살 정도의 남자 수도자가 내려와 우리를 맞았다. 엔토스 이야수 수도원에 도착한 것이다.

울창한 숲속을 걸어가니 '파티샤'라고 쓰인 기도하는 동굴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흰머리 수건을 쓴 여자 수도자인 수녀가 곤다르 양식의 십자가와 양가죽으로 만든 오래된 성경, 나뭇조각품등을 보여주었다.

파티샤를 지나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보니 야채를 재배하는 작은 텃밭도 보이고, 망고 등 과일나무들도 심어져 있었다. 숲길을 지나 제일 높은 곳에 다다르니 수도원이 있었다. 남자 수도자인 수사도 보인다. 이곳은 수사와 수녀가 함께 수행하는 수도원이다. 수도원 안팎에는 4면이 강렬한 색상의 성화가 그려져 있어 종교적 신비로움을 물씬 풍겼다.

여성 출입 금지 수도원에는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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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출입할 수 없는 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 ⓒ 김성호

엔토스 이야수 수도원에서 내려오니 처음 우리를 맞았던 80대 노수사가 통통배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줄곧 배의 밧줄을 꼭 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밧줄을 잡고 있던 노수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수도원에 들어가려면 약간의 입장료를 내야 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섬으로 배를 타고 갔다. 두 번째 방문한 수도원은 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이다. 섬에서 내리자 흙과 돌로 지운 출입문이 있고, 나무 팻말이 걸려 있다. 영어와 암하릭어로 되어 있다.

"NO ENTRANCE FOR LADY(여성출입 금지)."

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은 타나 호수 수도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곳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호수 위에 있는 수도원의 대부분은 남자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다. 호수에서는 수도원이 나무와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수도원 위에서 멀리 바라보니 호수가 훤히 보인다. 수도원은 섬의 제일 높은 쪽에 수풀로 가려져 있었다.

수도원에 이르자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은 2마리의 대머리 독수리였다. 수도원 옆의 나뭇가지 제일 높은 곳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독수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섬뜩할 지경이었다. 검은 갈색의 대머리 독수리는 눈빛뿐 아니라 부리와 발톱도 날카롭기가 예사롭지 않다. 마치 자신이 외부인으로부터 수도원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실제로 대머리 독수리는 썩은 동물과 고기를 깨끗이 먹어치워 야생의 청소부라 불린다.

17세기에 세워진 둥근 원형 모양의 수도원은 12개의 기둥으로 이뤄져 있고, 수도원 앞에는 두들기는 위치에 따라 다른 음악소리를 내는 두 개의 돌기둥이 나무에 옆으로 매달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옆으로 매달려 있는 돌기둥을 두들기자 "도레미파솔라시"라며 각기 다른 7음색 소리를 내어 신기했다. 수도원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와 부활, 최후의 만찬 등이 그려져 있었다.

수도원 바로 밑에는 작은 박물관이랄까, 아니면 창고가 있었다. 동굴 같은 장소에 수백 년의 세월의 때가 묻은 양가죽에 쓴 성경과 다양한 양식의 십자가, 종교의식에 쓰이는 도구 등을 잘 보관해 놓고 있었다. 역대 왕들의 왕관들도 보였다. 수도원 안과 밖의 건물 기둥에 기대어 성경을 읽고 있는 수사들은 여행객에 아랑곳없이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엔토스 이야수 수도원과 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 2곳을 둘러보니 이곳만큼 수도원으로 좋은 장소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 한 가운데 있어 육지와 멀리 떨어져 진데다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여 마음의 수행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머리 독수리들이 멀리서 혹시 외부인이 오지나 않나 그 무서운 눈알을 부라리며 지켜주고 있으니. 주로 16,17세기에 세워진 이곳 수도원들은 대부분 에티오피아의 유명한 성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외부와 격리되다보니 정교회의 성경과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도구, 옛 왕궁의 유물들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타나 호수에는 순교의 슬픈 역사가 아른 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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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 안에 그려진 성화.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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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 안에 그려진 성화. ⓒ 김성호

수도원은 에티오피아의 복잡한 종교적 역사와 밀접히 관련이 있다. 17세기에 남쪽으로부터 물밀듯이 밀려오는 오로모족으로 인해 정치적 위협을 느낀 에티오피아 왕조는 예수회 수도자들(the Jesuits)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주민들에게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했다. 당시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인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강력하게 무장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통통배의 젊은 운전사는 "개종을 강요 당한 당시 에티오피아 정교회 수도자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섬 가운데 있는 수도원으로 몰려 왔다"고 설명한다. 당시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반대하다 숨진 정교회 신자 숫자가 바하르다르 지역을 중심으로 3만2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호수 가운데 고립된 섬에 위치해 있는 데다 나무와 숲으로 완전히 가려져 외부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깊은 숲속에 수도원을 지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수도원을 떠나 배를 타고 돌아오는 타나 호수의 잔잔한 물결에는 피로 물든 순교의 슬픈 역사가 아른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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