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여사가 대통령이 돼야 해!"

목욕탕에서 만난 부자의 대화를 듣고...

등록 2007.02.21 20:17수정 2007.02.2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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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전날(17일) 새벽에 아내와 함께 목욕탕에 갔었다. 꼭 이날에 목욕을 해야만 할 몸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여러모로 힘들었던 한 해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새해에 대한 희망을 경건하고 정갈하게 맞이하고자 하는 속물적 의도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아내를 여탕으로 들여보내고 물론 나는 남탕 탈의실로 들어갔다.


표를 탈의실 카운터에 주고 탈의함 열쇠를 받아드는데 안쪽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떠들썩하게 울려 나왔다. 내 번호를 찾아 들어가니 마침 내 탈의함이 그 떠드는 주인공 옆, 옆이었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중년 남자였는데, 그도 방금 들어왔는지 막 방한복 웃옷을 벗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의 아들로 보이는 앳된 소년이 함께 옷을 벗고 있다.

@BRI@"봐라, 새파랗게 젊은 눔덜이 길바닥에서 담배를 피우질 않나, 그러다가는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휙 버리질 않나, 쌈박질을 하지 않나, 나라 꼬라지가 이래서야 되겄어…."

무엇을 보고 왔는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진 모르나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앗따, 그 사람 목소리 되게 크군'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걸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 하는 말은 누구나가 일상적으로 겪고 보는 이 사회의 불편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나라 꼬라지'라고 하기보다는 '세상꼬라지'라고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흡함이 느껴졌지만 그걸 딱히 구분하자고 드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 아니던가.


"너도 이제 중학생이 되니께 매사를 조심하고 똑바르고 옳게 살아야 하능겨어. 은혜도 알아야 히야. 이 아부지는 못살아도 그런 신념으로 지금껏 살아왔어…."

아하, 역시 짐작대로 부자지간이구나. 순진하고 복스럽게 생긴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옷을 벗으면서 매우 공손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훈육은 이 아들을 나무라자는데 목적을 두고 있어 보이진 않았다. 이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니 자못 소년이 되었다.


한 단계 높은 인생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나름의 교육을 주입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나이, 이런 자리에서 듣는 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평생을 두고 가슴에 새겨지게 될 것이다. 사리를 판단하게 될 나이가 되더라도 별다른 계기 없이는 아버지의 어릴 적 교훈을 뒤집어엎는 가치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묵묵히 옷을 벗던 나는 문득 손놀림의 속도를 늦추었다. 옷 벗는 속도가 느린 것은 그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 아들은 후딱 옷을 다 벗은 상태였지만 아버지는 옷 하나 벗고 이야기하고, 또 하나 벗고 이야기하고 하였다.

"이 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살게 맹근 거여어…. 소신이 분명하게 딱 서있는 분이었거든. 그것도 모르고 나라에 빨갱이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하면서 지끔 혼란스러운 거여어."

무엇을 보고 빨갱이가 득실거린다 하고, 무엇을 두고 지금 혼란의 시점이라 하는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우리 집을 내놓기 위해 부동산 사무실에 몇 번 가면서 얼핏 스치듯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 사무실에 있던 중년 서넛도 "지금 빨갱이들이 너무 설친다"고 했던 거였다. 그 당시는 그 말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려니 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었다.

지금 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아까 왜 '세상 꼬라지'라 하지 않고 '나라 꼬라지'라 했는지 짐작이 갔다. 듣고 보니 '빨갱이' 콤플렉스 현상이 이 나라에 적잖이 퍼져있구나 하는 우려가 생겨났다.

그러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나라를 잘 살게 만든 민주주의자이고, 이른바 '빨갱이들'은 그 소신과 성과에 반대하여 지금 '설치고 있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의 무지한 논리로만 치부해 두기에는 그 무지한 논리가 이 사회에 너무 많이, 아무런 제약도 없이 널려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 아들 어린 소년은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강의(?)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듣는다.

"지끔 박정희 대통령 따님이신 박근혜 여사가 대통령에 나온다고 하고 있어. 보다보다 못해서 여자지만 나온다는 거 아니겄어…. 훌륭한 아버지를 따라서 배웠으니께 제일 잘할 거여…."

내가 화장실을 들러 욕탕실로 들어갔을 때 그들 부자는 저쪽에서 물을 끼얹으며 여전히 떠들고 있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나라를 잘 살게 '맹글었'건, 세간에서 말하고 있듯 민주정권을 뒤엎고 총칼로 인권을 불의하게 유린했건, 그런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또한 겪은 일들에 대하여 '과거 청산' 차원이 아니더라도 역사가들이나 정의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 문제에 관해 논의하고 정리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성장기에 들어선 그 소년이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아버지가 금과옥조처럼 가르친 교육 이외의 진실을 보기까지는 상당한 세월만으로도 안될 것이라는 우려가 깊게 자리하는 것이다.

어떤 아버지가 '이 나라를 잘 살게 만든 대통령'이어서 그 딸이 역시 국민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소년이 그 아버지의 편견에 쌓인 때(垢)로부터 벗어나서 장차 객관적이고 정의로운 눈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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