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무슨 수용소로 향하는 느낌이 들더라"

'0교시·야자 수업'을 해야 하는 고1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07.03.10 14:45수정 2007.03.10 16:3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랑하는 내 딸!


먼저 이번에 네가 고등학생이 되어서 아버지는 기쁘고,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이제 너의 생각도 너의 몸피만큼 쑥쑥 자라겠지! 어쩌면 고등학교 시절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첫 번째 고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지금껏 해온 것처럼 잘 이겨내어 훌륭한 성취를 이루어 낼 것으로 아버지는 믿는다. 아버지도 너에게 힘을 보태마!

0교시 수업 없애자

a 꽃샘 추위에 시든 목련꽃 봉오리(3. 7. 창원)

꽃샘 추위에 시든 목련꽃 봉오리(3. 7. 창원) ⓒ 한성수

오전 6시! 자명종 시계가 빽빽 울어대고, 우리 가족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지. 너는 서둘러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는데 금세 6시 40분! 네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놓았는데도 너는 한 술도 뜨지 못하더구나. 아버지도 속이 거북해서 맹물에 밥 한 숟갈 말아서 입안에 털어 넣고 집을 나서는데, 벌써 시계는 7시!

초등학교 모퉁이에서 기다리는 네 친구를 태우고 학교로 향하는 길에는 벌써 등교하는 다른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지. 차 안에서 네 어머니가 챙겨준 딸기를, 너는 굳이 아버지의 입에 넣어 주었지. 정말 고마워! 그런데 오늘 딸기는 너무 시더라. 학교 앞에 도착하니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태우고 온 수많은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차와 학생들이 서로 얽혀 있었지.

7시 30분! 너희들이 차 사이를 뚫고 학교로 들어가는데, 아버지는 너희가 무슨 수용소로 향하는 느낌이 들었단다. 한참을 네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아버지의 가슴이 아려오더라. 너희는 7시 50분까지 교실에 들어가서 영어듣기 수업을 해야 된다고 했지. 소위 '0교시 수업이라는 것이겠지. 조금 늦은 몇 명의 아이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냅다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더구나. 그런데 찻길 옆에는 빛바랜 목련이 줄지어 있었어!

a 찬땅에 떨어진 붉은 동백(위 같은 장소, 일시)

찬땅에 떨어진 붉은 동백(위 같은 장소, 일시) ⓒ 한성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기 전의 목련은 뽀얀 젖빛이었어. 아버지는 무명옷 빛깔을 닮은 목련꽃을 볼 때면 네 할머니가 생각났단다. 순백의 꽃잎 속에 수줍게 감춘 꽃술은 참으로 아름답단다. 올해 여든 아홉이신 고운 네 할머니께 너도 자주 전화 드리고 종종 뵈러 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그런데 그 목련꽃의 빛깔이 누렇게 물들었더구나. 아마 꽃샘추위를 이기지 못한 탓이겠지.


직장에 도착해서 시든 목련꽃을 보는데, 아버지의 가슴 속에 너의 기침소리가 조그맣게 울리다가 점점 크게 원을 그리더니 마침내 전신을 휘감아 오더구나. 그래, 어쩌면 대학입시도 중요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새벽녘에, 한참 성장할 너희에게 선잠을 깨우고서는 학교로 내몰아서야 되겠는가! 경쟁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획일적으로 머리를 깎이고, 같은 옷을 입혀서 출석을 하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a 아랑곳하지 않는 매화

아랑곳하지 않는 매화 ⓒ 한성수

해방된지 60년이 훨씬 넘었고, 민주화를 이룬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건만 너희는 어찌하여 아직도 일제 식민주의 교육, 독재정권하의 군대식 교육을 받아야한단 말이냐! 기성세대인 아버지는 너희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드는구나.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0교시 수업'만은 지각 있는 학부모와 의식 있는 선생님들이 힘을 합쳐 없앴으면 좋겠다. 그도 힘들다면 집에서 '교육방송'시청으로 바꾸었으면 네게 따스한 아침밥 한 공기는 먹일 수 있겠지!


허울뿐인 '야간자율학습'도 이름답게 '자율'로!

사랑하는 내 딸아! 목련꽃 옆에는 붉은 동백꽃이 피어있는데 목련과 묘한 대조를 이루어 보기가 좋았단다. 그런데 찬 땅 위에는 떨어진 동백꽃이 슬프게 뒹굴고 있었어! 그러나 매화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움과 향기를 발산하고, 거리에는 샛노란 산수유가 꽃샘추위를 비웃으며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어.

a 새로 꽃망울을 터트리는 산수유(경남경찰청 앞)

새로 꽃망울을 터트리는 산수유(경남경찰청 앞) ⓒ 한성수

네가 자율이란 허울뿐인, 아니 강제의 성격이 더 강한 야자(야간자율학습)를 마치고 집에 오는 시각은 밤 9시! 무려 14시간을 학교생활(등하교 포함)을 하는 셈이니, 너희에게 무슨 마음의 여유가 생기겠느냐! 아버지는 야간자율학습도 그야말로 자율적으로 운영되었으면 좋겠다. 야자를 마친 뒤에도 네 친구 중 몇은 학원에 갔다가 밤 12시경에 집으로 향한다는데….

내 딸아! 너는 이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움추린 가슴을 펴고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켜 보거라. 더러 먼 산과 푸른 하늘에 마음과 눈을 두기도 하려무나. 이번 주말에는 네가 책을 잠시 접고 푹 쉬어서 감기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이미 봄이 왔으므로 꽃샘추위가 더 차게 느껴지는 거란다. 네 생각만큼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다! 읽어주어서 고맙다.

3월 9일 오후3시 꽃샘추위로 떨어진 목련 꽃 봉오리를 보며, 아버지가

덧붙이는 글 | 지난 3월 3일, 제천에서 강압적인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거부감을 느낀 고등학생들이 학교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자율이란 이름을 빌려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교육행태가 이런 상처를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교육당국과 학부모들의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며칠간의 꽃샘추위로, 겨우내 갈무리한 영향소를 겨워내어 겨우 폈던 젖빛 목련은 봉오리채 누렇게 빛을 바랬고, 추위에 그렇게 당당하던 붉은 동백꽃마저 떨어져 찬 땅위에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얀 매화는 꿋꿋하게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부르고, 산수유는 꽃샘추위 쯤은 가벼이 여기며 여유롭게 샛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어떤 애가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으면서 나는 아이들이 좀 더 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옥죄었던 여러 족쇄를 풀어서 조금의 여유를 주는 것은 지금 현재시점의 대한민국 어른들의 몫이란 생각입니다. 
-------------------
이 글은 다음의 제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3월 3일, 제천에서 강압적인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거부감을 느낀 고등학생들이 학교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자율이란 이름을 빌려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교육행태가 이런 상처를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교육당국과 학부모들의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며칠간의 꽃샘추위로, 겨우내 갈무리한 영향소를 겨워내어 겨우 폈던 젖빛 목련은 봉오리채 누렇게 빛을 바랬고, 추위에 그렇게 당당하던 붉은 동백꽃마저 떨어져 찬 땅위에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얀 매화는 꿋꿋하게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부르고, 산수유는 꽃샘추위 쯤은 가벼이 여기며 여유롭게 샛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어떤 애가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으면서 나는 아이들이 좀 더 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옥죄었던 여러 족쇄를 풀어서 조금의 여유를 주는 것은 지금 현재시점의 대한민국 어른들의 몫이란 생각입니다. 
-------------------
이 글은 다음의 제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2. 2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3. 3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4. 4 임종 앞둔 아버지, '앙금'만 쌓인 세 딸들의 속내 임종 앞둔 아버지, '앙금'만 쌓인 세 딸들의 속내
  5. 5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