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얼마나 힘이 세졌는지 보자"

[둠벙일기5] 밭작물을 키우는 생명수 둠벙

등록 2007.03.12 08:37수정 2007.03.1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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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둠벙은 아버지와 나,그리고 아이들이 미래에서 기억하게 될 과거가 있다

둠벙은 아버지와 나,그리고 아이들이 미래에서 기억하게 될 과거가 있다 ⓒ 송성영

둠벙 앞에 세워 놓은 대나무 비닐하우스가 일 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찢겨져 나갔습니다. 바람이라도 불면 정신 나간 여자의 치맛자락처럼 사납게 펄럭거렸습니다. 얇은 비닐에도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비닐하우스 중간 중간에 부러진 뼈처럼 툭 툭 터져 나온 대나무 탓이 컸습니다.


작년 이맘때 한창 대나무 하우스를 짓고 있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그랬습니다.

"고거 일 년두 못 갈 틴디…."

시대를 거꾸로 살아가는 내 꼬락서니를 지켜보다 못해 혀를 찼던 동네 어르신들은 진즉에 알아먹었던 것입니다. 철재 하우스를 만들면 해마다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사서 그 짓거리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철재 하우스는 최소 기백만 원의 비용을 요구하지만 대나무 하우스는 2만 몇 천 원짜리 비닐만 구입하면 됩니다. 농협 이자가 싸든지 말든지 빚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산비탈 밭 옆에는 작은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번거롭지만 한 해만 지나면 하늘을 찌를 듯 쑥쑥 솟아납니다. 그 대나무를 이용하면 됩니다.

철재 비닐하우스를 만들 여유도 단 한 평의 땅도 없지만 단 한 푼의 빚도 없습니다. 그렇게 뱃속 편하게 남들이 혀를 차든 말든 세월아 내월아 갈라터지고 쪼개진 대나무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낭창낭창한 대나무로 새롭게 잇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웃사촌들의 도움을 받아 공룡뼈처럼 앙상한 세워진 대나무에 새 살을 입혔습니다. 비닐을 씌워 놓으니 금세 새 집이 되었습니다.

a 둠벙가 벚나무가 새순을 맺을 무렵이면 농사를 시작한다

둠벙가 벚나무가 새순을 맺을 무렵이면 농사를 시작한다 ⓒ 송성영

새 비닐하우스 안에 씨를 뿌렸습니다. 푸슬푸슬한 흙을 만지며 상추며 청경채, 케일, 시금치 등의 씨를 뿌렸습니다. 둠벙 가득 고인 물을 퍼날러 비닐하우스 안을 축축하게 적셔준 지 사나흘 쯤 지나자 제일 먼저 청경채와 시금치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둠벙은 온갖 채소들을 키워줍니다. 그 채소들은 사람들을 건강하게 해줍니다. 거기다가 우리 식구의 생계까지 도와주고 있으니 둠벙은 또한 우리 식구의 젖줄이기도 합니다.

그 젖줄을 퍼올리다가 문득 둠벙가 벚나무를 봅니다. 어느새 새 순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겨우내 옷을 벗었던 비닐하우스가 새 옷으로 갈아입었듯이 벚나무 역시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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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둠벙가 벗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세월을 잊게 됩니다. 벚나무는 조만간 새잎으로 푸르게 단장할 것이고 잠깐 사이 수줍게 감추고 있던 꽃봉우리를 활짝 터뜨려 크게 웃음을 웃을 것입니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습니다. 내년에도 그럴 것입니다. 꿈을 꾸듯 세월을 앞질러갑니다.

그렇게 세월을 앞질러가다 보면 욕심 따위를 채울 것도 비울 것도 없어지게 됩니다. 또한 그러다 보면 지난 세월들이 둠벙 가득 수놓았던 꽃잎처럼 아름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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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어릴 적 화전을 일구던 아버지의 산비탈 밭 어디쯤인가에도 벚나무가 있었습니다. 벚나무가 아프게 새잎을 틔울 무렵이면 아버지는 산비탈 밭을 갈았습니다. 우리 집에는 밭갈이 소가 없었습니다. 밭을 갈지 못하는 소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소처럼 밭을 갈았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일찌감치 학업을 접어두고 주먹잽이로 나선 큰 형과 밭을 갈았습니다. 성질이 불같았던 큰 형은 그 무렵 엄니의 애지중지 쌍가락지를 팔아 싸움 상대에게 금니를 박아줘야 할 정도로 사고뭉치였습니다.

큰 형은 그 대가로 아버지의 쟁기에 묶여 소처럼 밭을 갈아야 했습니다. 쟁기를 끄는 큰 형은 고통스런 얼굴빛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습니다. 자식을 쟁기에 묶어 소처럼 몰아야 했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버지는 쟁기로 큰 형을 사람 만들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큰형을 쟁기에 묶어 십우도(十牛圖)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둠벙에서 몸을 씻습니다. 또한 밭작물이 고개를 내밀 무렵이면 그 둠벙에서 생명수를 퍼올렸습니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에게 있어서도 역시 둠벙은 밭작물을 키워내는 젖줄이었습니다.

"밭에 물 좀 퍼날라 봐라, 어디 우리 셋째가 얼마나 힘이 세졌는지 보자."

아버지는 가끔씩 어린 내게 둠벙 가까이에 있는 밭을 떠맡기셨습니다. 나는 미군 철모로 만든 똥바가지로 부지런히 물을 퍼날랐습니다. 하지만 밭작물에 목을 축여 주기도 전에 똥바가지에는 물이 반도 차 있지 않았습니다. 질질 흘려가며 밭에 물을 대는 내 모습이 대견한지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던져 주었습니다.

a 늘 그 자리에 있는 둠벙과 벚나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둠벙과 벚나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 송성영

아버지의 함박웃음을 떠올리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우리 집 아이들이 대나무 숲 저만치에서 몸을 숨겨가며 밭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왔습니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짜씩들아!"
"에이, 아빠 놀래켜 주려 했는디…."

"재미있게 놀다왔어? 근디 왜 학교 다녀왔습니다 안 혀?"
"아, 깜빡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짜씩들이 엎드려 절받기네, 니들 마침 잘 왔다, 둠벙에 조리개 갖구 가서 물 좀 퍼 와라! 자씩들 힘이 얼마나 쎄졌는지 어디 한 번 보자."

나는 먼 훗날 아이들이 기억하게 될 '과거의 둠벙'으로 물심부름을 시킵니다. 아버지가 어린 내게 '미래의 둠벙'을 가슴 속 깊이 새겨 줬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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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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