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세 끼 먹는 게 쉽다고요?

20년 넘게 묵혔던 묵정밭을 새로 일구며

등록 2007.03.27 11:23수정 2007.03.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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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요즘 밭을 좀 더 늘려보겠다고 20년 넘게 묵혀 있던 산 아래 묵정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온통 갈대와 칡뿌리로 얽혀 있는 묵정밭에 몸을 굴리니 온 삭신이 쑤셔 옵니다. 허리가 결리고 어깨가 뻑뻑해져 옵니다. 기름칠 하지 않은 기계처럼 온몸이 삐그덕거립니다. 겨우내 굳어 있던 근육들이 풀려나가는 호전현상이기도 했습니다. 밭일을 시작한 지 이틀쯤 지나자 몸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을 부드럽게 해주고 있는 것은 바로 흙이었습니다. 산비탈 묵정밭의 흙은 '쌩쌩' 하니 살아 있습니다. 농약에 찌든 흙을 만지면 손끝이 찌릿찌릿하지만 온전히 살아 있는 흙은 부드럽게 감겨옵니다.

흙은 내게 스스럼없이 몸을 내줍니다. 얼마나 곱고 부드러운지 어루만져 보라고 온몸을 내 줍니다. 나는 흙을 애무합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흙을 만지다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굳어 있던 온 몸이 기분 좋게 풀려나갑니다. 나는 조만간 그 '기분 좋음'으로 온갖 생명의 씨를 뿌릴 것입니다. 흙은 그 생명들을 온몸으로 받아내 키워낼 것입니다.

삼라만상 '나' 아닌 것이 없다 했듯이 흙은 내 자신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목숨 다하는 날 내 몸은 흙에 안겨 흙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흙으로 부활하여 숱한 생명들을 키워낼 것입니다. 그렇게 흙을 만지고 있노라면 먼저 떠난 사람들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디 사람뿐이겠습니까? 흙 속에는 이 땅에 살다간 모든 생명들의 살과 뼈와 피가 뒤섞여 있습니다. 흙을 만지는 것은 그들과 몸을 부비는 일입니다.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과거의 흔적을 어루만지고 미래의 나와 교감하는 일입니다.


한숨 돌리고 나서 다시 쇠스랑을 듭니다. 오랫동안 묵혀 있던 묵정밭 곳곳에는 갈대뿌리와 칡뿌리들이 심줄처럼 얽혀 있습니다. 그것들을 뽑아내야 밭 구실을 하게 됩니다. 칡뿌리가 말썽을 부립니다. 잘 뽑혀 나오지 않습니다. 숨이 찹니다. 온 힘을 다해 힘껏 잡아 댕겨 봅니다. 칡뿌리가 뚝 끊어져 버립니다.

"어이쿠, 씨펄!"


뒤로 발라당 나자빠지는 순간 내 입에서 욕설이 툭 튀어 나옵니다. 평소 쓰지 않던 욕설이었습니다. '젠장할', '빌어먹을' 뭐 이런 고상한 욕이었다면 덜 무안했을 것입니다. 우리 집 개, 곰순이가 성큼 다가와 '얼레? 이 양반이 갑자기 왜 그런 디야'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흙이 어쩌니 생명이 어쩌니 고상 떨지 말고, 그냥 생각 없이 밭이나 갈라 이르는 듯합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지만 숨이 목까지 차오릅니다. 갑자기 하루 세 끼 먹고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싶어집니다. 나는 우리 네 식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 세 끼만 제대로 먹고 살게 해 주십사 농사를 짓습니다. 바르게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하루 세 끼 먹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냐 하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게으르면 세 끼 다 챙겨 먹기 어렵고 조금만 욕심 부리면 세 끼 이상을 먹게 됩니다.

세 끼 이상을 먹으면 좋지 않냐구요? 하루 세 끼 이상을 더 많이 먹고자 한다면 온전한 '자본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큰 탈이 납니다. 어떤 형태로든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농작물을 더 많이 뽑아내겠다고 달려들면 흙도 탈이 나는데 사람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오늘도 묵정밭을 서너 평쯤을 일궜습니다. 서너 평에 불과하다지만 거기서 나온 갈대와 칡뿌리가 밭 가장자리에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미리 간벌해 놓은 땔나무와 칡뿌리를 지게에 얹었습니다. 지게 작대기에 의지해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불끈 일어섭니다.

"으~차!"

요 며칠 밭일에 몰두해서 그런지 겨우내 빈둥거렸던 두 다리에 부쩍 힘이 생겼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땀 젖은 몸뚱아리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기분이 참 좋습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하루 세 끼를 바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기분 좋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한미 FTA 협상은 좀 더 온전한 '자본의 노예'가 되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덧붙이는 글 한미 FTA 협상은 좀 더 온전한 '자본의 노예'가 되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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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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