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시인. 조운기념사업협회
또한 영광청년회와 영농회 등을 결성하여 1919년 영광의 3·1독립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피신했다가 단편소설 <탈출기>로 잘 알려진 서해 최학송을 만나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함께 방황하며 금강산과 해주, 개성 지역의 고적지를 답사하였는데, 최학송은 훗날 조운과 처남매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사립 영광학원의 국어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문예지를 발간하며 문예부흥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인 것은 구습이고, 새로 밀려 들어오는 서양의 문물은 어쩐지 세련되게 느끼던 당시의 '식민지적 무의식 상태'에서 치열한 고민을 통해 초기의 자유시 시작활동을 접고 시조를 택했다.
조운 선생은 해방정국에서 영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았고 1947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해 동국대학에서 시조론, 시조사를 강의하다가 1949년에 월북했다. 대표작은 '석류'를 비롯해 '구룡폭포' '석담신음' '법성포 12경' 등의 시조와 '불 살러 주오' '초승달이 재 넘을 때' 등이 있다.
조운 선생이 남긴 시편은 조운기념사업협회에서 2000년에 신문, 잡지 등에 실렸던 작품들을 한권의 책으로 펴낸 <조운시조집> 단 한 권뿐이다.
손광은 전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시조야말로 우리 민족의 정서와 한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그릇이다. 조운 선생은 우리 문학사에 큰 빛을 남기신 분이다"라고 말한다.
조운 선생의 생가는 월북 후 선생의 질녀뻘 되는 이가 살다가 경매에 부쳐졌던 것을 영광의 향토시인이자 민족문학작가회의 영광지부장인 장진기씨가 낙찰 받아 관리하고 있으나, 지금은 거의 폐가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도래지 전경. 오승준
조운 선생의 생가를 나와 국도 22호선을 달려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가 있는 법성포로 이동했다. 불교 최초 도래지가 있는 법성면 진내리 좌우두 마을은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 존자(尊者·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부처의 제자를 높여 이르는 말)가 중국 동진에서 백제로 들어와 불교를 전할 때 처음 발을 디딘 곳으로 알려져있다.
법성포(法聖浦)란 지명도 '(성인이) 불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또 영광 불갑산의 불갑사(佛甲寺)는 마라난타 존자가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라는 뜻에서 '부처 불(佛)'과 '첫째 갑(甲)'을 썼다고 한다.
고증을 거쳐 백제불교 최초 전래지가 법성포임을 확인한 영광군은 1997년부터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관광명소화 사업'에서 1만3000평 부지의 만다라광장을 비롯하여 108계단·부용루·탑원·팔각정·상징문과 간다라 양식의 불교전시관, 23.7m 높이의 마라난타 존자상을 세웠다.

▲108계단 위에서 단체사진 한 컷. 오승준
108계단 위 동산에 철쭉으로 수놓은 부처 불자, 간다라 건축양식, 백양사에서 기증했다는 보리수와 노랑, 빨강의 튤립꽃 향연, 부처의 마음 전하는 목탁 소리. 자비와 평화의 큰 물결로 가슴에 젖어든다. (계속 이어집니다.)

▲철쭉으로 새긴 글자 부처 불. 오승준
덧붙이는 글 | 문학춘추작가회 회원들과 함께한 문학기행을 <'석류' 시인 조운과 조우하다>와 <'고향의 하늘 밑에서' 이수복을 만나다>라는 두 기사로 나누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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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자인 공무원으로서, 또 문학을 사랑하는 시인과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또 다른 삶의 즐거움으로 알고 사는 청소년선도위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이웃을 위한 사랑나눔과 아름다운 일들을 찾아 알리고 싶어 기자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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