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당과 부용대에서 유성룡의 흔적을 찾다

여름이 오기 전 안동 땅 하회마을에 가다 ②

등록 2007.05.08 10:50수정 2007.05.0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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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충효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랑채: 아주 단아한 모습이다.

충효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랑채: 아주 단아한 모습이다. ⓒ 이상기


하회마을의 중심 가옥은 아무래도 양진당과 충효당(忠孝堂)이다. 보물 제414호인 충효당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집으로 서애 류성룡의 손자인 졸재 류원지(柳元之 1598-1674)에 의해 지어졌다. 그리고 졸재의 아들인 류의하(柳宜河 1616-1698)에 의해 52칸으로 확장되었으며, 충효당이라는 당호를 가지게 되었다.

a 충효당 현판 위 서까래 옆에 제비집이 보인다.

충효당 현판 위 서까래 옆에 제비집이 보인다. ⓒ 이상기

충효당에 들어가면 '충효당'이라는 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현종에서 숙종 대에 걸쳐 남인의 영수였던 정치가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전서로 글씨체가 상당히 독특하다. 행서의 필법을 전서에 응용한 독자적인 서체를 보여주고 있다. 미수는 조선시대에 이미 글자 디자인 즉 타이포그라피를 시도한 진보적인 서예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 충효당에 허목의 현판이 걸려있는 것은 학맥과 관련이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의 고제(高弟 덕과 학식이 높은 제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를 이야기한다. 허목은 바로 한강 정구의 제자이므로 스승의 사형인 서애의 유택에 현판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더욱이 미수 허목은 '서애유사(西厓遺事)'를 썼는데, 그곳에서 류성룡의 적절한 인재등용을 높이 평가했다. 임진왜란 당시 서애 류성룡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는데, 당시 둘은 모두 하급무관이어서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들의 천거는 당시 모험일 수 있었으나 류성룡은 과감하게 이들을 등용,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a 봄기운을 한껏 마셔 연두색 잎을 피운 모과나무

봄기운을 한껏 마셔 연두색 잎을 피운 모과나무 ⓒ 이상기


충효당 현판 위 서까래 아래에는 강남에서 온 제비가 집을 짓고 먹이를 찾느라 열심히 드나들고 있었다. 요즘처럼 제비 보기가 어려운 때 이곳에서 제비를 보다니, 역시 충효당은 사람뿐 아니라 날짐승도 살기 좋은 터전인가보다. 충효당 봉당에 올라 왼쪽을 바라보니 갓 피어나는 연록의 이파리들이 빗물에 젖어 청초하기 이를 데 없다. 봄은 역시 만물을 소생케 하는 계절이다.

a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 ⓒ 이상기


a 류성룡 선생의 풍원부원군 임명 교지

류성룡 선생의 풍원부원군 임명 교지 ⓒ 이상기

사랑채를 돌아 뒤쪽으로 가니 사당이 보인다. 문이 닫혀 들어갈 수는 없지만 삼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상당히 큰 편이다. 영의정을 지내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진 공경대부를 모신 집이어서 사당을 이렇게 크게 지은 것 같다. 사당 앞으로는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이 있으며,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고졸한 충효당과 잘 어울리지는 않는 편이다.

영모각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이며, 이곳에는 서애 선생의 대표적인 저서인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과 고문서(보물 제160호) 그리고 유물들(보물 제 460호)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징비록은 순회 전시를 위해 나가 있어서 복제본만 볼 수 있었으며, 1592년 서애 선생을 푸원부원군에 임명한 '만력(萬曆) 31년' 교지 등은 원본을 볼 수 있다.


영모각을 나온 우리 일행은 서애 선생의 12대손인 류선우씨의 집인 담연재(澹然齋)를 잠깐 본다. 이 건물은 전통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본 따 최근에 지은 것으로 '맑고 편안한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대문 밖에 손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이곳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약간의 돈이 넣어놓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가난한 자를 배려하던 양반가의 아량을 엿볼 수 있다.

a '맑고 편안한 집' 담연재의 보시(布施) 구멍

'맑고 편안한 집' 담연재의 보시(布施) 구멍 ⓒ 이상기

담연재를 지나자 이제는 서북쪽 강변으로 푸른 소나무 숲인 만송정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민속놀이 마당에는 비 때문에 주인을 찾지 못한 그네가 한가히 서 있고, 만송정 너머로는 깎아지른 부용대(芙蓉臺)가 하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부용은 연꽃봉오리 뜻하며 연꽃이 마치 물에 뜬 것 같아 부용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용대는 원래 북애(北崖)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 절벽이 마을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용대 아래로는 낙동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굽이쳐 흐르며, 강변에 옥연정사, 겸암정사, 화천서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옥연정사는 1586년 류성룡 선생이 지은 집으로 임진왜란 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징비록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암정사는 1567년 류운룡 선생이 세워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그리고 화천서원은 류운룡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786년 유림에서 설립한 서원으로, 1966년 일부 건물을 복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a 하회마을 북쪽의 절벽인 부용대

하회마을 북쪽의 절벽인 부용대 ⓒ 이상기

덧붙이는 글 |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통해 안동의 문화와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된장마을, 한지전시관을 통해 안동의 맛과 멋을 보여주려고 한다. 4회에 걸쳐 연재한다.

덧붙이는 글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통해 안동의 문화와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된장마을, 한지전시관을 통해 안동의 맛과 멋을 보여주려고 한다.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충효당 #서애 류성룡 #부용대 #옥연정사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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