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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22명이 내 휘슬 아래에 있죠"

24일 <오마이뉴스> 축구대회 3조 예선 주인공은 '주부 심판 4인방'

07.05.25 12:02최종업데이트07.05.28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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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 오전 9시 서울 중랑구 중랑구립잔디구장에서 '2007 제5회 전국 직장인 및 시민사회단체 축구대회' 서울지역예선 3조 경기가 진행됐다. '질풍노도'(위)와 '녹색병원(아래)'이 첫 경기에 나섰다.

ⓒ 안윤학

▲ 경기장에 여성 심판 4인방이 떴다. 왼쪽부터 박복순, 백정미, 백종순, 오미숙씨.

ⓒ 안윤학

"남자 22명을 내 휘슬로 좌지우지 하는 게 묘한 매력이죠."

축구 심판 6년차 백종순씨의 말이다. 백씨는 두 아들을 둔 주부다. 평일엔 가사를 돌보다 휴일 시합이 있는 날이면 축구장을 휘젓고 다닌다. 남성들은 그의 판정 아래 울고 웃는다. 팀이 초상집이 되느냐, 잔칫집이 되느냐는 그의 손에 달렸다.

지난 24일 오전 9시 서울 중랑구 중랑구립잔디구장에 백씨를 포함한 4명의 여성 심판이 등장했다. 백종순·박복순·백정미·오미숙씨 등이 그들이다. <오마이뉴스> 주최 '2007 제5회 전국 직장인 및 시민사회단체 축구대회' 서울지역예선 3조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다.

아마추어 축구 경기에 여성 심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6∼7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기자에겐 낯선 광경이었다.

남성에 비해 체격이 왜소한데다가 30∼40대 주부들이란다. '총 6경기인데 벅차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하늘도 우중충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했다. 전날 일기예보에서도 많은 비를 예상했다. '체력소모가 더 클 텐데' 우려가 앞섰다.

이날은 '녹색병원' 대 '질풍노도'의 경기를 시작으로 '오피스웨이', '더불어 숲' 등 4팀이 리그전을 치렀다. 4명의 여성 심판은 1명의 남성 감독관과 함께 돌아가며 주심·부심을 맡았다. 기자는 이들이 경기에 나서지 않는 틈타 인터뷰를 시도했다.

30∼40대 주부 심판의 등장... "뛰는 것엔 자신 있어요"

여성 심판이 되기까진

여성 심판 4인방 서울시축구연합회 산하 심판위원회 소속이다. 대부분 전국1급 자격증을 가졌고 오씨만 1급 승급을 앞두고 있다. 서울시축구연합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생활체육 심판은 총 2270명이다. 전국1급은 237명이고 이중 여성은 24~25명 가량이라고 한다.

심판은 1년에 한번 승급심사를 본다. 필기시험에 체력테스트까지 거쳐야 한다. '문무'를 겸비한 자만이 심판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 안윤학


20여 명의 남성을 지휘하는 매력에 심판이 된 백종순(44)씨. 그의 운동 경력은 성북구 어머니축구단이 전부다. 축구는 잘못하고 뛰는 것만은 자신 있단다. 포지션은 박지성과 같은 측면공격수다.

백씨는 여성 심판으로서의 고충에 대해 "왜소한 체격과 약한 체력"이라고 했다. 보통 아마추어 대회에선 전·후반 25분 총 50분을 뛰어야 하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란다. 그래서 평소 수영, 달리기 등으로 체력을 다지고 있다.

또 하나 어려운 점은 "여성 심판이 드물다 보니 한 번 오심을 내리면 그 파장이 오래 간다"는 것이다. 선수들 기억에 남기가 쉽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나 스스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토로했다. "남의 잔치를 망쳐놨다는 생각에 괴롭다"는 것이다.

에피소드를 묻자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경고·퇴장 카드를 꺼낼 땐 서 있는 선수 앞에서 카드를 높이 올려야 해요. 그런데 한번은 선수가 넘어진 상태에서 그 얼굴 앞에다 경고 카드를 꺼낸 적이 있어요. 응원석에서 엄청난 폭소가 터져 나왔죠. 경고를 받은 당사자도 웃고."

"선수들이 더 잘 따르죠, 남자 심판보다 더"

▲ 언니 백종순씨와 동생 백정미씨는 자매다. 어딘지 닮아 보인다.

ⓒ 안윤학
4년차 백정미(38)씨는 백종순씨의 동생이다. 그러고 보니 많이 닮은 듯했다.

백씨 자매는 이 때문에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어떤 시합엔 얼굴도 안 비쳤는데, 그 경기에서 뛰었던 선수가 다가와 "거기서 뵈었죠?"라며 말을 걸기도 했다. 언니 백씨는 "쌍둥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는 "모르는 애"라고 잡아뗐단다.

동생 정미씨는 "언니가 심판 보는 모습에 반해 심판 공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필드로 나섰다. 평일엔 아이들(1남 1녀)을 돌보고 주말엔 축구장에 나와 운동을 하니 금상첨화란다.

정미씨는 "선수들이 남자 심판이 나설 때보다 판정에 더 잘 따른다"는 데서 여성 심판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선수간, 선수-심판간 다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경기 분위기가 부드러워 일부러 여성 심판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단다.

그러나 남자들 세계에서 여성이 심판을 본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정미씨는 "선수 옷 색과 겹치지 않기 위해 노랑, 빨강, 검정 옷을 준비하는 데 간혹 옷을 갈아입을 때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해 불편하다"고 털어놨다. 또 간혹 험상궂은 분들에게서 '듣기 거북한 말'도 듣는단다.

"젊은 오빠, 왜 그래요"... 여성 심판은 '분위기 메이커'

▲ 박복순씨. 박씨는 경기가 거칠어질 때 "젊은 오빠, 왜 그러세요"라는 애교를 무기로 쓴다고.

ⓒ 안윤학

박복순(41)씨는 5년차다. '숨쉬기 운동'만 하다 축구에도 '주부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도전정신' 하나만으로 심판 세계에 뛰어들었다. 2년차부터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22명의 남자를 제압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매력"에 말이다.

목표도 확고하다. 감독관이 되는 것이다. 감독관은 각 경기에 심판을 배정하고 시합 전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는다. 전국 1급을 자격을 취득한 뒤 5년의 경력을 쌓으면 자격이 주어진다. 물론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박씨는 "현재 나이를 봐 욕심에 그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박씨에게 용납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여자라는 차별을 받는 것'이다.

"지난해 모 대회 결승전 주심을 봤을 때였어요. 복부에 공을 맞고 1분가량 의식을 잃었죠. 눈을 뜨고 보니 선수, 심판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죠. '주심 교체해야 한다'고들 했죠. 하지만 오기가 발동했어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휘슬을 놓지 않았죠. 남자들이 부심을 서고 있는데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어요."

박씨에 따르면, 보통 나이 지긋하신(?) 선수들이 욕설을 내뱉는다. 이럴 때 그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을 무기로 험악한 분위기를 무마시키곤 했다. 웃으며 "젊은 오빠, 왜 그러세요"라며 애교 섞인 말을 건넸다. 그러면 선수의 응어리진 마음이 이내 풀리곤 했단다.

"심판에게 선수는 '직장 상사'... 욕먹으면 회의감이 들어"

▲ 오미숙씨가 경기장의 선배(주심) 위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공부의 일환이다.

ⓒ 안윤학
선수 출신인 오미숙(32)씨는 "남자들의 입이 거친데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고 했다.

오씨는 "직장 상사에게 욕을 먹으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라면서 "심판에게 직장 상사는 선수들인데, 이들에게 욕먹으면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오씨는 '인간적인 경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넘어진 선수에게 "괜찮아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면 선수들은 시합에 져도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겼다. 경고 카드를 꺼낼 땐 "잘못 하셨죠? 경고 받으셔야겠죠?"라고 물었다. 그러면 선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단다. 이럴 땐 보람이 있었다.

오씨는 초·중등학교에 출강하는 특기적성 강사다. 축구 규칙을 전문적으로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해 현재 3년차다. 올해부터 주심에 투입됐다. 주심 경험을 1년간 쌓아야 전국 1급을 딸 수 있다. 현재는 1급 대상자.

오씨는 위례정보산업고-울산대를 나온 선수 출신이다. 중학 때 마라톤을 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공을 차기 시작했다. 선수 생활은 슬럼프 때문에 그만둬야 했다. 그러나 축구와 맺어진 인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심판을 하다가도 종종 시합에 나선다. 현역에서 은퇴한 여자 선수들과 함께 팀을 꾸렸다.

가끔 남자팀과 맞붙기도 한다. 질 때도 있지만 이길 때도 많다. 이길 때 남자들은 쉽게 흥분을 한단다. '너네는 힘 약한 여자인데' 분하다는 식이다. 오씨는 "심판 설 때도 '어떻게 여자가 (축구) 룰을 알고 축구를 아느냐'는 반응이 많다"고 전했다.

경기장 주인공이 여성 심판 4인방

오씨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경기장에 선 주심의 위치를 유심히 관찰했다. 선배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익히려는 듯했다. 열정이 느껴졌다.

오씨만이 아니었다. 모두 비에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얼굴엔 함박웃음을 띄었다. 즐기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축구를 사랑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복순씨는 "어떤 게임이든 선수들과 즐긴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한다"고 말했다.

감독관을 맡은 이병운(남·48)씨는 "여성 심판도 남자 못지않게 실전에 많이 투입된다"면서 "오히려 여성 심판이 경기를 부드럽게 진행시키고 선수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 더 노력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중랑구립잔디구장의 주인공은 여성 심판들이었다. 4명이 한데 모여 사진을 찍을 땐 "멋있다∼!", "자∼알 생겼다!"는 응원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경기장엔 웃음이 가득했다.

한편, 이날 경기에선 '질풍노도(2승 1무)'와 '더불어 숲(2승 1패)'이 서울지역예선 6강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녹생병원(2무 1패)'와 '오피스웨이(1무 2패)'는 탈락했다.

▲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양팀간 예의을 권하는 백종순, 이병운, 백정미씨. 숨은 거칠고 옷은 비에 젖었지만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 안윤학


덧붙이는 글 | <서울지역예선 3조 순위>

1 위: '질풍노도' 2승 1무 - 4득점 1실점 (서울지역예선 6강전 진출)
2 위: '더불어 숲' 2승 1패 - 3득점 3실점 (서울지역예선 6강전 진출)
3 위: '녹색병원' 2무 1패 - 3득점 4실점
4 위: '오피스웨이' 1무 2패 - 3득점 5실점 

<각 경기 결과>

녹색병원 0 - 0 질풍노도
오피스웨이 0 -1 더불어 숲
녹색병원 2-2 오피스웨이
질풍노도 2-0 더불어 숲
녹색병원 1-2 더불어 숲
오피스웨이 1-2 질풍노도

<향후 경기 일정>

서울지역예선 6강전 경기는 6월 3일 10시부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법무 연수원에서 열립니다. 6강에 오른 팀은 '오마이사커', '차돌이', '한국 YMCA전국연맹', '경실련', '질풍노도', '더불어 숲' 등입니다.

2007-05-25 12:02ⓒ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서울지역예선 3조 순위>

1 위: '질풍노도' 2승 1무 - 4득점 1실점 (서울지역예선 6강전 진출)
2 위: '더불어 숲' 2승 1패 - 3득점 3실점 (서울지역예선 6강전 진출)
3 위: '녹색병원' 2무 1패 - 3득점 4실점
4 위: '오피스웨이' 1무 2패 - 3득점 5실점

<각 경기 결과>

녹색병원 0 - 0 질풍노도
오피스웨이 0 -1 더불어 숲
녹색병원 2-2 오피스웨이
질풍노도 2-0 더불어 숲
녹색병원 1-2 더불어 숲
오피스웨이 1-2 질풍노도

<향후 경기 일정>

서울지역예선 6강전 경기는 6월 3일 10시부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법무 연수원에서 열립니다. 6강에 오른 팀은 '오마이사커', '차돌이', '한국 YMCA전국연맹', '경실련', '질풍노도', '더불어 숲' 등입니다.
오마이뉴스 축구대회 여자심판 백종순 백정미 오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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