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라도 '입'을 막아서는 안된다

등록 2007.06.12 09:34수정 2007.06.1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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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정치로 풀어야 한다

지난 6월 8일의 원광대 강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전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참여정부평가포럼의 강연에서 한 자신의 발언을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결정한 데 대한 반박이다.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대통령의 말이 맞다.

논란이 된 사건의 실체는 이렇다.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모임에서 한 강연에서,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자신을 비판해 온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 정치적인 견해를 밝혔다는 것이다.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맞다.

"끔찍하다"라고 하면 "끔찍하지 않다"라고 받아야 하는 것이다. 왜 끔찍한지 왜 끔찍하지 않은지 정치적인 논쟁을 이어가며 경쟁을 해서, 국민들로 하여금 보다 깊고 다양하게 판단하고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법을 옳게 해석해야 한다

물론 법에 애매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 대통령은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정치인이며, 선출된 이후에도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 동시에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며, 선거에서의 중립의무를 진다. 그래서 대통령의 활동이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인지를 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식 시험답안 찍듯이 기계적으로 법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법은 역사와 정신을 고려하고 또 일관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8일 한 선관위원은 선관위의 결정을 옹호하면서, 대통령이 "선거부정이나 관권선거가 성행했던 우리나라만의 특수성이 반영된 우리나라 선거법의 역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며 비판했다고 한다. 역사성에 대한 지적은 맞지만, 역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 선관위원이다.

우리의 공직선거법은 과거의 "선거부정이나 관권선거"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 맞다. 과거 대통령이나 그의 지시를 받은 공무원들이 선거철이면 지방을 돌며 공약을 남발하고, 대통령이 공무원에게 불법선거를 획책하고, 야당 정치인의 입을 막기 위해 아예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이 잘못이었다라는 반성 때문에 만들어진 법이다.


그런데, 도대체 노 대통령의 말이 위의 어느 "역사"에 해당한다는 것인가?

어쩌면 그 선관위원이 "이해"한 "역사성"은 이런 것인지 모른다. 과거에는 대통령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중립성'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대통령이 말을 하면 공무원들이 휘둘린다는 이유도 덧붙여졌다. 그런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머리 속에는 대통령이 선거에 관련된 말을 하면 절대 안된다라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 대통령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부정한 힘과 부정한 돈을 휘두르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을 움직이기 위해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직선거법은 바로 그 잘못된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대통령의 말에 과거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선거법의 역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대통령에게 휘둘리지 않게 된 공무원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또한 법은 그 정신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대통령과 야당이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야당은 대통령의 정책은 물론이고 인격에 대해서까지 일상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말로 경쟁하는 두 당사자 중 한쪽의 입은 막아 놓고 다른 쪽은 마음껏 떠들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불공정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할 것이다. 공정성이야말로 법의 중요한 정신이다. 따라서 선관위의 결정은 잘못된 법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법은 일관되게 해석해야 한다. 원광대 강연이 참평포럼 강연과 무엇이 다른가? 정치적 견해의 표명이라는 점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 그런데 선관위는 이건 위법이 아니라고 한다. "끔찍하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말꼬리 잡기일 뿐이며, 애당초 법해석으로서의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후자가 위법이라면 전자도 위법이라고 해야 맞다. 그렇게 못한다면, 전자가 위법이 아니듯이 후자도 위법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시인하는 것이 맞다.

법은 자제해야 한다

비록 자초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관위의 '곤경'의 출발점은, 자칭 '정치'인이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정치 밖의 힘을 빌려 묻어버리려고 한 데 있다. 정치적인 문제가 불거지기만 하면 곧장 선관위로 헌재로 달려가 '법대로 해주세요'라며 매달리는 '고발'인이 '정치'판에서 우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문제를 법대로만 할 것 같으면 정치인은 왜 필요한 것이며, 정당은 왜 필요한 것인가? 정치인이 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존립기반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이 능력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치인이 철이 없다고 해서 법까지 중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법은 자신의 자리를 확실하게 지키며 다른 영역들이 건강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겸손하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주제넘은 영역 침해로 다른 영역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없도록 자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의 보루'가 갖추어야 할 기본소양이다.

법의 겸손과 자제는 민주화 이후 법의 역할이 급격하게 커진 때문에 더욱 중요해졌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돌멩이와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과, 역시 거리에서 '구사대'와 전경을 동원해서 그들을 막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모두 법원으로 선관위로 헌재로 몰려가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 것처럼, '각하'라는 명칭을 빠뜨리면 큰 일 날 존재였던 대통령의 지위와 행동마저 법률가의 결정에 의해 심대한 영향을 받기에 이르렀다. 지면의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법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는 일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권력의 도구였던 법이 국민들의 기대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법치주의의 발전으로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기대와 주목이 곧 신뢰와 지지를 의미한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법의 역할이 커진 것은, 법이 잘하기 때문이기보다는, 다른 영역이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6·10에서 비롯된 민주화의 결과 권위주의체제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체제는 아직 확고하게 서지 못했다. 억압적인 권력에 의해 '처리'되었던 수많은 문제들이, 이제 사회의 각 영역이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할 몫으로 돌려졌지만, 충분한 해결 능력은 아직 갖추어지지 못했다. 미숙한 정치가 법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이 주제넘게 다른 영역의 문제에 개입하게 되면, 사회 전체의 건강한 발전을 해치게 된다. '고발'인이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법은 자제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과거의 잘못된 역사 속에 매몰된 인식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법률가가 개입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법이 신경 써야 할 일은 다른 곳에 있다.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돌아보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체질을 갖추어,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어내는 일이다. 권력의 시녀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죄하는 일, 전관예우라는 해괴한 악습을 하루빨리 제거하는 일, 변호사의 숫자를 묶어 놓기 위해 8지선다형의 객관식 시험으로 법률가를 뽑는 '곡예'를 그만두고 법률가를 옳게 길러내는 일, 여전히 국민들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좌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범죄와 형벌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일, 이런 일에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이 논의와 관련해서 정치적 의도나 함의는 부차적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분명 일정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언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발언이 그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모으게 될지, 아니면 흩어지게 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떨어져 있다가 열광하며 모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여 있다가 짜증내며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 손익계산은 추후의 문제이다. 따라서 지금 정치적 의도나 함의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법이 나서서 말을 하지 말라고 대통령의 입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 듣기 싫다고 그의 입을 틀어막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게다가 그 입을 틀어막는 도구가 법이라면, 그것은 법치주의도 아니다.

*여담 - 내용으로 승부하라

노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한 언론의 비판 중에는, 대통령이 "그 놈의 헌법"이라고 한 것은 헌법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라는 것도 있다. 대통령이 "그 놈의 헌법"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점잖은 말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빌미로 대통령을 반헌법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역시 적절하지도 점잖지도 않은 일이다.

강연의 전후 문맥을 읽어 보면, 발언의 취지는, 대통령이 나서서 보다 적극적으로 토론을 하고 싶은데 헌법상의 제약이 있어서 어렵다는 것이다. 헌법을 지키겠다는 이야기이지 헌법을 깨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표현이 거칠다고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내용이 반헌법적이지 않은 이상, 일부 표현만을 따로 떼어 문제 삼는 것은 말꼬리 잡기일 뿐이다.

스타일은 이제 그만 내버려두라. 우리 사회도 '그 사람 그런 때 그런 곳에서는 그런 스타일이지'라며 받아넘기는 관용의 여유를 가질 만큼은 커지지 않았는가? 지금 대통령의 스타일을 문제 삼는 언론이 과연 어떤 언론인가? 과거 헌법을 '헌 법'으로 만들었던 독재자의 고압적인 스타일을 '사나이답다'라고 칭송했던 바로 그 언론이다.

그 때 '조폭스럽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스타일 문제니까 그냥 넘긴 사람들 많다. 치기에서 벗어나라. 자기 스타일이면 까무러치고 아니면 저주하는 것은 책임 있는 언론이 취할 '스타일'이 아니다. - 2007.6.10
#노무현 #선관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법 #공직선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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