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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은 힘이 세다

[J씨의 영화일기] <내일의 기억>

07.06.13 09:51최종업데이트07.06.1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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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했다. 무료했다. J는 그랬다.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는 일상이었다. J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난다. 아침식사 준비를 마치고 나면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낸 뒤 남편 출근을 도왔다. 그들이 간 뒤에는 설거지와 청소, 세탁 등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집안일을 마친 뒤에는 커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니면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기도 했다. 가끔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보기도 했고 장을 보기도 했다. 기분이 내키면 영화관이나 서점도 한 번씩 들렀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올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온 J는 아이들 간식을 챙겨준 뒤 저녁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은 뒤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면 아이들 숙제와 준비물 등을 챙겨주었다. 아이들까지 다 재운 뒤 J는 가끔 일찍 귀가한 남편과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 심야 토크쇼를 보며 낄낄거리며 웃곤 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그리고는 어김없이 6시 30분의 모닝콜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열곤 했다.

J는 이러한 일상이 너무 단조로웠다. 불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도 못했다. 가끔은 모든 것을 다 잊고 떠나고 싶었다. J는 자신의 인생을,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던 백색의 도화지 그 시점으로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내 인생엔 쓸데없는 낙서가 너무 많아…' J는 소파에 앉아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인생의 도화지엔 쓸데없는 낙서가 많아...

 영화 <내일의 기억> 한 장면
ⓒ UPI

아직 많은 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J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가끔 되돌려보곤 했다. 행복했던 순간은 많았다. 대학시험 합격통보를 받았던 날, 남편에게 청혼을 받았던 그날, 오랜 산고 끝에 첫아이를 낳았던 날의 기억 등일 것이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는 첫눈까지 내려 그러잖아도 퉁퉁 부은 J의 얼굴을 더욱 붓게 만들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물론 있었다. 친정아빠가 쓰러졌던 날의 암담함, 기대했던 취직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던 날의 기억, 태어난 지 백일도 안된 둘째아이가 급성폐렴으로 입원해야 했던 기억까지 J의 머릿속에 함께 동전의 양면처럼 사이좋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 기억은 좋은 거야. 추억할 거리가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생각하며 J는 괴었던 턱을 풀었다. 그러나 지난날을 추억해서 뭣할까. 추억이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추억은 추억일 뿐이었다. 현재 내 삶에는 직접적으로 아무 도움도 못 된다고 J는 생각했다. 적어도 <내일의 기억>을 볼 때까지는.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손안의 모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J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적했다.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미친 듯 옥상으로 뛰쳐올라 간 사에키에게 담당 의사는 절규하듯 말한다.

"저의 아버지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사에키상.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늙는다는 것도 인간의 숙명입니다. 병에도 걸립니다. 인체라는 것은 최초로 십수년을 제외하고는 다음은 멸망해갈 뿐입니다."

깊은 첼로 현이 빚어내는 우울하고 쓸쓸한 음악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잔인하다, 고 J는 생각했다. 의사가 잔인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영원하고 불멸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 잔인하기만 했다. 거기에는 J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사에키는 광고회사의 부장이었다.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 탄탄일로를 걸었다. 야심도 컸고 꿈도 컸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핑크빛 희망으로 가득찬 시간들이었다. 그런 그가 50도 안된 49세의 나이에, 인생의 나머지 시간을 지우며 살게 될 줄 꿈엔들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의 가족, 일, 꿈… 결국은 자신에 관한 것까지 모두 다.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 있다면 그것이 '행복'

 영화 <내일의 기억> 한 장면.
ⓒ UPI

공기 속의 연기처럼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기억들을 추억하기 위해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기억할 어제가 있고 추억할 오늘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고마워하기로 했다.

사에키에게 그 사람은 바로 아내 에미코였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둘이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가마터를 찾아가며 그는 잊고 살았던 소중한 지난날의 추억을 하나둘씩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내놓기 시작한다.

자신의 딸 리에의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던 사에키는, 인사를 하던 도중 북받쳐 울고 만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히 했던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가슴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었을까.

'리에의 뱃속에는 생명이 잉태되어있습니다. 가족이 하나 늘었습니다. 가족이 는다는 것은 추억이 하나하나 쌓여간다는 것입니다. 한때 두 사람을 경솔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감사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에키는 점차 기억력을 상실해간다. 기억력과 함께 현실감도 사라져가는 것일까. 사에키는 갈수록 멍해지고 피폐해진다. 그런 사에키가 끝까지 놓지 않는 기억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에미코와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이다. 비록 현실의 에미코는 기억하지 못해도 처녀적 에미코와의 추억은 사에키에게 기억의 원형처럼 남아있다.

<내일의 기억>을 본 뒤 J는 일상을 사랑하기로 다짐했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되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도 있는 순간순간이었다. J는 남편이 미워질 때면, 10년 전 청혼을 받았던 그날을 추억하기로 했다. 아이가 말썽을 피우거나 힘들게 할 때면 자신에게 처음으로 왔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삶이 너무 심심하거나 무료하다고 느껴질 때면 친정아빠가 쓰러졌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 건강히 지내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추억은 힘이 세다. 그 추억이 아름답건 추하건 간에 그것들이 존재하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는 것 아닐까. 그 누구의 삶에도 쓸데없는, 지워버려도 될 하찮은 낙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J는 쇼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곧 학교에서 아이들이 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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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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