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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섣불리 보편성을 얻으려는 욕망

07.06.13 11:33최종업데이트07.06.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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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봤습니다. 소문이 자자한 만큼, 몇몇 장면에서 전도연은 잊을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전도연의 슬픔은 그다지 전염성이 높지는 않았습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건 사실 꽤 어려운 일이기에 눈물을 헤프게 쏟아내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신애라는 여자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양은 보편적인 공간이고 하나의 세계이며 우주인 셈입니다. 신애의 비극이라는 것도 스스로에겐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 어떤 인간이든 그런 고통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창동 감독(이동진 영화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이 인터뷰를 읽고서야 <밀양>을 보면서 신애의 고통이 아니라 왜 자꾸 그녀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려고 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각설하고 말하자면, 그건 감독이 신애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신애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개인의 고통을 인간 모두의 고통으로 그려내기 위해서 신애라는 인물 개인이 느끼는 고통은 사라져버립니다. 이 영화에서 신애는 배신당한 '나', 아이를 잃어버린 '나'라는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도연은 신애라는 여자를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당연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면에서 전도연은 정말 감이 뛰어난 배우 같아요.)

신애는 구체적인 개인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체현하는 인간 보편의 상징으로 추상으로 그려진 인물입니다. 감독은 신애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거의 주지 않으면서 신애의 고유성을 삭제해나갑니다. 이 영화에서 신애는 좀처럼 익숙하고 경험적인 신파적 정서로 빠지지 않는데, 아마 이 점이 이 영화가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제가 이창동 영화에서 다루는 고통이 때로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고유성과 보편성

▲ 신애는 구체적인 개인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체현하는 인간 보편의 상징으로 추상으로 그려진 인물입니다. 그렇다 보니 신애의 고유성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 시네마서비스
누구에게나 이런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나에게 그 고통이 일어났다는 건 참 다른 일입니다. 이창동 감독이 고통에 대해 그토록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닿지 못한 지점이 바로 이 보편성과 고유성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의 죽음'은 고통의 보편성이고, '죽은 아이'는 고통의 고유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이들이 죽었다는 사실과, 내 아이가 죽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고통인 것이죠. 그리고 이런 고통의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엄청난 도약이 필요합니다.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과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는 북한의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싸구려 동정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죽음과 그 아이들의 죽음 사이의 경계와 거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보편적 인권과 정의의 원칙을 넘어, 나 자신이 그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는 윤리적 책임을 지는 문제인데, 그런 도약을 해낸 사람은 우리가 '성자'라는 명칭을 붙여서 기억할 정도로 희귀하지요.

그래서 저는 고통의 보편성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고유성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신애라는 한 여자의 고통에서 출발하면서도, 그녀의 고통이 기인해있는 자기부정과 회피의 역사를 고스란히 남겨놓고 신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그리고 결국 신애가 신에게 복수하고자 시도한 자살소동은 싱거운 무위로 돌아갑니다. 보편성이 각각의 고유성들의 귀납으로부터 도출된다면, 이 영화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의 심정에 대해 너무나 인색하고 성급하게 굽니다.

약함과 악함

누구나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도 있는 고통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밀양>에서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고통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신애의 남편은 바람을 피웠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아이와 함께 옵니다. 그리고 밀양에서 돈 많은 척 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지요. 그리고 이것은 유괴범이 신애의 아이를 납치하는 동기로 작용합니다. 심지어는 아이가 유괴되면서 걸었던 전화를 노래방에 있다가 받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라면 이 모든 행동이 아이의 죽음과 직접적인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들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죽은 아이'를 보내는 어머니들의 입에서 종종 나오는 "나 때문"이라는 위악적인 죄의식이 신애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애에게는 이미 죽은 아이에 대한 애도보다는, 아이를 죽인 범인에 대한 복수심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종교를 만나 신의 이름으로 범인을 용서하고자 할 때에도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죽은 아이를 '대신'해서 신애가 어떻게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오로라 공주>에서 엄정화는 딸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도 죽게 되지요.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이를 잃은 엄마의 고통과 그런 고통을 야기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약함과 악함 사이에 놓인 습자지에 피가 흐르면, 경계는 바로 찢어지고 사라지는 거죠.

하지만 신애가 추구하는 것은 '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이뿐입니다. 아이는 죽었고, 신애는 그저 남겨졌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망치거나 복수를 하거나 정신이 나가거나 혹은 고통을 애써 외면하는 것 외에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요.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용서를 베푸는 것으로 신애는 또 한번 자신 앞에 놓인 고통을 외면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신애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죄의식을 느끼는 범인의 딸을 만나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신애의 자살과 미용실에서 딸을 만나는 장면, 이 영화는 두 번 멈출 수 있는 기회를 모두 지나쳐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이건 정말 감독의 욕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성을 얻으려는 욕망 말이죠.

죄를 사해주노라?

이 영화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충격이 큰 장면은 납치와 유괴, 살인을 저지르고도 신에게서 용서받은 자의 표정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만든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 바로 이 점에서, 영화 <밀양>은 신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과 적당히 화해하고 타협하고 살아가는 송강호와 신에게 용서받은 유괴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네 편(<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은 모두 가해자 남성들의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초록물고기>의 막둥이(한석규 분)와 <박하사탕>의 김영호(설경구 분), <오아시스>의 종두(설경구 분), <밀양>의 종찬(송강호 분), 이창동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부르주아의 삶을 꿈꾸면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답답하고 절박한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인물들로 그려집니다.

그의 앞선 두 편의 영화에서 여자들은 남성들의 비정한 세계에서 유일한 안식처이자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박하사탕>의 문소리 분, <초록물고기>의 심혜진 분). 그리고 세 번째 영화 <오아시스>에서부터는 화자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뀝니다. 이 여성들은 앞선 두 영화의 주인공 남성들처럼 자살하거나 동료의 칼에 찔려 죽지 않습니다. 대신 앞선 남자주인공들이 저질렀던 강간, 납치, 배신, 살인의 죄를 용서해주는 존재로 나옵니다.

이창동 감독은 여성의 입과 몸을 빌려 그 남자들의 죄를 사해주지만, 이 여성들은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존재로, 환상으로, 추상으로 만들어냅니다. 아마 그래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면면히 흐르는 고통과 슬픔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의 당사자였던 사람들이 항의하는 일이 생기는 걸 것입니다.

종두와 공주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신애 옆에 있는 종찬의 마음은 아름답지만, 그래도 여전히 언제든지 범할 수 있는 무력한 존재로 장애 여성을 생각하는 파렴치한들도, 아이를 유괴해서 돈을 요구하는 냉혈한들이 지금 여기에,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타인이 된 자들의 '타자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텐데, 보편자가 되고 싶은 마음들은 참 죄를 쉽게도 저지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봤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는데 말이죠. 아마 언제든지 용서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일까요?

고통과 용서,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는, 아이가 죽고 난 다음에 출간된 박완서님의 묵상집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이 주는 성찰만큼 아름다운 것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민망하지 않았어요. 이런 것을 보편적 정서라고 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일 참입니다.
2007-06-13 11:33 ⓒ 2007 OhmyNews
전도연 보편성 고유성 이창동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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