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탐험가, 지렁이

달내일기(113)-뜨거운 땡볕 아래 묵묵히 길을 가는 지렁이를 보며

등록 2007.07.28 14:44수정 2007.07.2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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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어제 경남 합천의 낮 기온이 36.7도였고, 오늘도 그 정도는 된다는 소식을 듣지 않더라도 덥다 못해 뜨겁다. 아니 따갑다. 땡볕이 수직으로 꽂히니 불볕더위란 말에 한치 어김없다. 그래도 여름이 여름다움은 태양의 광기(狂氣)가 발휘돼야 제 맛이 아닌가.


그런 따가움은 달내마을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는다. 어제 낮 거실 온도계를 봤더니 30도였다. 바깥 기온보다 5도쯤 떨어질 테니 여기도 35도쯤 된다는 말이다. 이 정도면 아무리 산골마을이라 해도 집에 있을 수 없다. 지난 주 잘려나간 감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이 더위를 막아주기엔 부족해 물가를 찾기로 했다.

a 불볕더위를 피해 평상 밑에 잔뜩 웅크린 풍산개 태백

불볕더위를 피해 평상 밑에 잔뜩 웅크린 풍산개 태백 ⓒ 정판수

수건 하나 달랑 들고 나서는 길에 불볕더위가 사람만 데우는 게 아닌지 보이는 풀꽃 모두 몸을 비틀고 있다. 화분에 심어 놓은 풍로초는 물을 겨우 사흘쯤 안 줬는데 시들시들하고, 호박잎도 뽕잎도 두릅잎도 잎사귀를 오므린다. 아마도 활짝 펼치는 것보다는 그러는 게 더위를 피하는 방법인 것 같다.

물가를 찾아가는 길에 이번 더위의 가장 피해자를 봤다. 지렁이였다. 지렁이… 시골 사는 이가 아니라면 징그러운 존재이리라. 그러나 시골에선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 온몸을 뒹굴며 땅을 가장 기름지게 만들어주니까.

헌데 지렁이가 도로 위에 말라죽어 가고 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 처음에는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땅 속에 그냥 머물러 있었으면 아무리 바깥이 뜨거워도 말라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만약 땅 밑 얕은 곳이 마르면 더 깊은 곳을 찾으면 될 테고. 습기 많을 곳을 찾아가는 건 녀석들의 본능일 테니까.

그러나 자리를 옮기면 다르다. 다행히 비가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게 없으련만, 마른 맨 땅이거나 옮기는 도중에 순식간에 말라버리면 어쩔 수 없이 거기서 타 죽을 수밖에 없다.


a 땅 속에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다가 땡볕에 말라죽은 지렁이들

땅 속에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다가 땡볕에 말라죽은 지렁이들 ⓒ 정판수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밖을 나와 이리저리 다른 곳을 찾아가는 지렁이가 이해됐다. 제 자리만 지키는 지렁이라면 제가 보는 세상이 전부일 것이다. 즉 늘 땅 속에 들어 있으면 제가 보는 세상은 어둠뿐일 게다. 허나 땅 속을 나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지렁이는 다르다.

물론 많은 위험에 부딪힌다. 가다가 저보다 큰 동물에 잡아먹히기도 하고, 지나가는 차바퀴나 사람의 발에 밟혀 죽을 수도 있고, 또 뙤약볕에 말라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위험과는 별도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비록 지렁이가 옮긴 거리는 우리 인간이 몇 발작 뛴 것밖에 불과하지만 녀석이 발을 옮김으로써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과 주변의 아름다운 풀꽃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뿐인가, 이 흙 저 흙의 냄새와 맛을 마음껏 즐길 수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대체로 주어진 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일을 갖는데 주저하고, 새로운 곳에 가보는 걸 두려워하며, 새로 사람 사귀는 걸 힘들어하는 이가 많다. 즉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기보다는 그저 전에 살아왔던 그대로 살고자 한다. 탐험가의 삶을 살려는 이는 적다.

a 뙤약볕 아래서도 묵묵히 도로를 건너는 지렁이 한 마리

뙤약볕 아래서도 묵묵히 도로를 건너는 지렁이 한 마리 ⓒ 정판수

좀 더 힘들고, 좀 더 낯설고, 좀 더 거친 곳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인류에 빛을 남긴 이들 몇만이 다른 이들이 자기가 밟고 있는 세상에 만족할 때 목숨을 걸고 낯선 세계로 나아갔다. 그들의 희생 덕에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었지 않은가.

만약 그때 다들 현실에 안주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의 삶의 폭은 얼마나 좁아졌을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딛고 새로운 세상을 보고자 하는 갈망 속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삶의 폭과 깊이는 넓고 깊어진 게 아닌가.

그냥 보면 땡볕에 말라죽은 지렁이뿐일 텐데 내 눈에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러 가는 탐험가로 비친 것은 아무래도 더운 날씨 때문인가. 마침 그때 살아 있는 한 마리가 꼬물꼬물 움직이며 시멘트 도로를 건너고 있다. 어쩌면 가는 도중 말라죽을지 모르지만 꼭 건너가서 새로운 흙맛을 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녀석이 가는 길을 한참이나 내려다 보았다.
#지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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