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1)

[사라진 책 23] <종교박람회> <시와 혁명> <역사는 한사코 나아간다>

등록 2007.09.19 14:40수정 2007.09.1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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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흐르면서 애틋한 눈길과 손길에서 멀어지면서 헌책방 책시렁에서도 조용히 먼지만 먹고 있는 책들 이야기를 꺼내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두고두고 찾아서 읽을 만한 책을 생각하면서.

 

 

겉그림 앤소니 드 멜로 님이 남긴 우화 이야기는 헌책방에서 겨우겨우 찾아볼 수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은 한결같이 참 좋다고 말씀합니다만. ⓒ 분도출판사

▲ 겉그림 앤소니 드 멜로 님이 남긴 우화 이야기는 헌책방에서 겨우겨우 찾아볼 수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은 한결같이 참 좋다고 말씀합니다만. ⓒ 분도출판사

1.종교박람회 (앤소니 드 멜로)

 

- 책이름 : 종교박람회
- 글쓴이 : 앤소니 드 멜로
- 옮긴이 : 정한교
- 펴낸곳 : 분도출판사(1983.12.30.)


 바삐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에 늦었기 때문에 헐레벌떡 뛰면서. 그러다가 건널목 신호가 바뀌어 숨을 고르며 기다립니다.

 

조금 뒤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와 아무개 교회에서 무슨 잔치를 하는데 설문조사를 해 달라며 이것저것 묻습니다.

 

번거로워서 ‘모른다’를 되풀이했더니 설문조사가 아닌 설교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신호등 불빛이 바뀝니다. 이러다가 갈 길도 못 가겠구나 싶어 얼른 ‘알았으니까 얼른 설문조사 해 드릴게요’ 하고는 열 가지에 이르는 문항에 동글뱅이를 칩니다.

 

볼펜이 잘 안 나와 헛시간을 얼마쯤 보냅니다. 바야흐로 설문을 다 끝내고 건너려는 때 신호가 바뀝니다. 아차, 제길. 하지만 어쩌는 수 없이 기다려야 할 판.

 

설문조사 하던 아주머니는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하고 묻습니다. 세상에, 길에서 어디 안 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디 가시는 길인데요?” 하고 다시 묻습니다. “바쁘신가요?” 입을 닫고 대꾸를 않습니다. 부디 아무 말 하지 말고 떠나 주기를. 얼마쯤 있다가 “미안합니다” 하기에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만 살짝 숙여서 인사를 합니다.


.. 예수께서 맞장구를 치셨다. “바로 그 때문에 난 종교들을 밀어 주진 않아. 내가 밀어 주는 건 민중이지. 민중이 종교보다 더 소중하니까. 인간이 안식일보다는 더 소중하니까.” “말씀을 조심하셔야겠는데요.”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좀 염려스런 듯이 말했다. “일찌기 그런 말씀을 하셨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잖아요.” ..  〈228∼229쪽〉


 동네마다 우뚝 선 교회탑. 시골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예배당 높은 건물. 이 교회들에서는, 또 산속마다 또아리 틀고 있는 절집에서는 무엇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중얼중얼 염불을 읊을까요. “이교도란 종교를 놓고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요(230쪽)”라는데, 이교도 아닌 신도는 어디에 있는 누구일는지요.

 

 하느님을 사랑할 시간에 내 이웃을 사랑해 주고, 부처님을 아낄 시간에 내 땅을 아껴 주면 좋을 텐데요. 하느님을 기리는 예배당 지을 돈으로 내 이웃을 돕고, 부처님을 기리는 공양을 드릴 품으로 내 땅을 돌보면 좋을 텐데요.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내 땅을 아끼는 일이 부처님을 아끼는 일이지 싶은데. 내 이웃이 살 집을 마련해 주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이 깃들 곳을 마련하는 일이며, 내 땅에서 뭇 목숨붙이가 고루 평화로이 살 수 있도록 애쓰는 일이 부처님을 아늑하게 모시는 일이지 싶은데.

 

겉그림 김남주 님이 어떤 마음으로 시를 받아들였고 썼고 즐기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 나루

▲ 겉그림 김남주 님이 어떤 마음으로 시를 받아들였고 썼고 즐기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 나루

2.시와 혁명 (김남주)

 

- 책이름 : 시와 혁명
- 글쓴이 : 김남주
- 펴낸곳 : 나루(1991.12.25.)


 얼마 앞서, 서울 신촌에 있는 ㅅ헌책방에서 1999년 3월에 나온 <월간 말> 한 권을 찾았습니다. 이 잡지에는 제 이야기가 두 쪽에 걸쳐 실려 있습니다. 대학교를 그만두고 신문돌리기를 하며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어느덧 여덟 해가 훌쩍 지났고 아홉 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이때 기사를 죽 읽으며 제 생각이나 믿음이나 마음가짐은 그때나 이제나 한결같음을 다시금 느낍니다.

 

제 생각이라 한다면, ‘글은 일하는 사람이 써야’ 하고, ‘일하지 않고 쓰는 글은 알맹이가 없거나 거짓이 깃든다’입니다. 제 믿음이라고 한다면 ‘제 앞가림은 제 두 손으로 해야 한다’입니다. 제 마음가짐이라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이 일 하나를 붙잡고 힘껏 즐겁게 해야 좋다’입니다.


.. 문학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들입니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잠시도 없어서는 아니될 밥이라든가 김치라든가 된장국 같은 것이고, 옷이며 집 같은 것도 당연히 거기에 포함되어야겠지요.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생활의 이런 요소들을 제공해 주는 자연과 노동도 문학의 주요한 관심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학의 한 갈래로서 시에 대한 저의 생각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 시의 기반은 삶의 터전이고 노동의 대상인 인간의 대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  〈49쪽〉


 일이란 제 삶입니다. 제 삶이 되는 일은 돈벌이 수단만은 아닙니다. 제 놀이입니다. 돈은 제 삶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되는 방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돈이 있어 자전거를 장만할 수 있고 책을 살 수 있으며 술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도 사 놓은 책을 읽을 수 있거나 도서관에서든 이웃한테든 빌려 읽을 수 있고, 돈이 없어도 골목길을 걸을 수 있고, 돈이 없어도 애틋한 사람 하나 만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땅과 해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그늘과 꽃과 열매와 나무와 바다를 믿을 수 있고, 바퀴벌레와 거미와 개미도 믿을 수 있습니다.

 

돈 없는 이한테도 꾀꼬리 소리와 멧비둘기 소리는 들려옵니다. 돈 있는 이한테도 개구리 소리와 파리 윙윙거리는 소리는 들려옵니다. 돈이 없으니 글 하나를 써서는 먹고살 길이 까마득하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제 마음속 깊은 데에서 우러나오는 살가운 글을 쓸 수 있지 않습니다.


..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행동했던 사람들인 청년 학생들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는 죄수인 것이다. 38선 이남 국토에 120개의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4만6천여 명의 미군이 주둔함으로써만 재산과 생명과 권력이 보장되는 어떤 사람에게는 민족의 자주성 운운하는 자의 말과 행위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  〈168쪽〉


 아침나절, 뒷간에서 똥을 누며 <시와 혁명>을 읽다가 “나는 헌책방과 혁명을 꿈꾸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김남주 님은 자기 무기이자 삶인 시를 들고 혁명을 하는 사람, 나는 내 무기이자 삶인 헌책방을 들고 혁명을 하는 사람.

 

 김남주 님은 시를 쓰고, 최종규라는 사람은 헌책방을 다니는 대목이 다를 뿐입니다. 둘은 똑같이 한국땅에서 남과 북이 갈라진 모습을 느끼고, “앉아 있는 사람이나 서 있는 사람이나 돌아보면 일제히 스포츠신문을 읽고 있는 지하철(167쪽)” 모습을 날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박지성 선수가 넣는 골에 손뼉을 치고, 1억을 모으고 10억을 굴리는 이야기에 눈길을 쏟지만, 아파하는 이웃 삶에는 등을 돌리는 한편, 못난쟁이로 찌그러지는 자기 삶과 몸뚱이와 마음마음에는 무디어져 가는 우리들 ‘보통 아닌 보통사람’들 아파트무덤에 갇힌 사회를 느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찾고 돌아보면서 한삶을 아쉬움 없이 깨끗하게 살기보다는 자기는커녕 옆에 있는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으며 돈-이름-힘에 얽매여 하루하루 죽어가는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채, 자주와 개성이란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사회 흐름에 맨몸으로 놓여 있습니다.

 

겉그림 역사가 한사코 나아간다고 합니다만, 역사만 나아가고 우리들 마음은 나아가지 못한다면...... ⓒ 갈무리

▲ 겉그림 역사가 한사코 나아간다고 합니다만, 역사만 나아가고 우리들 마음은 나아가지 못한다면...... ⓒ 갈무리

3.역사는 한사코 나아간다

 

- 책이름 : 역사는 한사코 나아간다
- 엮은이 : 전국노동자문학회 대표자회의
- 펴낸곳 : 갈무리(1998.11.7.)


 한 해 남짓 새로운 책임자를 만나지 못하고 덩그러니 꽂혀 있는 책을 바라봅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끄집어서 펼칩니다. 몇 쪽 펼치다가 책을 덮고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달이 지난 뒤, 이 헌책방 한 편에 그대로 꽂힌 이 책을 다시 봅니다.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뒤, 이 책이 아직 팔려나가지 않음을 보고는 다시 끄집어내어 펼칩니다.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에 꽂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또 만지작거립니다. 이 책은 앞으로도 새로운 책임자를 만나지 못한 채 이렇게 먼지만 먹다가 사라질까, 아니면?  역사는 한사코 나아간다는데, 그렇다면 문학도 한사코 나아갈 텐데, 그러면 어디로 나아가는 역사이고 문학일는지요.

 

 우리가 다 함께 즐거울 세상으로 나아가는 역사인가요. 우리 모두 흐뭇한 얼굴로 웃음과 눈물을 마음껏 쏟아부을 수 있는 문학인가요. 나아가기는 나아가지만, 우리를 옥죄거나 비틀거나 발목을 붙잡는 역사는 아닌가요. 나아가기는 나아가지만, 우리 삶을 감추거나 속이면서 허튼 꿈만 좇도록 내모는 문학은 아닌가요.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그리면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 마음으로, 무엇을 누구와 즐기려는 매무새로, 이 땅에 두 발을 디디며 살아가고 있나요. 노동자문학회는 열 해, 스무 해, 또 서른 해, 앞으로 마흔 해까지도 이어지겠지요.

 

그러면 노동자문학회는 어떤 문학을 즐기려 하고 어떤 문학을 쏟아내어 나누려 할까요. 또한 이 세상 사람들은 노동자문학회를 어떤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바라볼까요. 아니, 노동자문학회가 있음을 알기나 할 테며, 거들떠보기나 할 테며, 손길 한 번 뻗쳐 보기나 할는지요.

2007.09.19 14:40 ⓒ 2007 OhmyNews

종교 박람회

앤서니 드 멜로 지음,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3


#사라진 책 #책시렁에 숨은 책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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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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