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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 이태현, '격투기의 황태자'로 거듭나라

[K-1 히어로즈 서울대회] 향상된 기량으로 격투기 무대 첫 승

07.10.29 08:59최종업데이트07.10.2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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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31). 그는 1993년에 민속씨름판에 데뷔해 세 번의 천하장사와 12번의 지역장사, 18번의 백두장사를 차지한 '제왕'이었다.

같은 시대에 백승일·김영현·최홍만·신봉민·김경수·황규연 등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했던 점을 고려하면 33번의 장사 타이틀과 74.9%(472승 158패)라는 승률은 그야말로 경이적인 기록이다.

그런 이태현이 작년 7월 은퇴를 선언하고, 곧바로 종합격투기 단체인 프라이드FC와 계약을 했다.

평생을 씨름과 함께 했고, '민속씨름 선수들의 체급별 유·무산소성 운동능력과 최대 운동 후 회복기 산화적 스트레스 차이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씨름인' 이태현의 '무한도전'이었다.

라이벌 단체 K-1에서 천하장사 출신 최홍만을 통해 엄청난 홍보 효과를 거둔 터라, 이태현과 계약한 프라이드FC에서도 일사천리로 '이태현 스타 만들기'에 나섰다. 2006년 9월, 프라이드FC는 이태현이 격투기로 전향한 지 두 달만에 무차별급 그랑프리 파이널 번외 경기를 통해 '메이저 무대'에 데뷔시킨 것이다.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 초라했던 격투기 데뷔전

이태현의 종합 격투기 데뷔전 상대는 히카르두 모라이스. 브라질 출신의 모라이스는 205cm 121㎏의 거구지만 '불혹'을 바라보는 노장이었고, 프라이드FC 전적도 2전 2패에 불과해 이태현의 '데뷔전 제물'이 되기에 적합한 선수였다.

그러나 제물이 된 쪽은 모라이스가 아닌 이태현이었다. 아무리 모래판을 지배했던 이태현이지만, 두 달밖에 준비하지 못한 '사각의 링'은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경기 초반에는 씨름 기술을 이용한 테이크 다운을 성공시키기도 했지만, 불과 5분여 만에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체력이 저하되고 말았다.

결국 이태현의 세컨드는 1라운드 8분 8초만에 수건을 던지면서 기권했고, 오른쪽 눈이 심하게 부어오른 이태현은 4만7000명의 관중에게 야유를 받으며 초라하게 경기장을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태현과 모라이스의 경기는 미르코 크로캅·반달레이 실바·조시 바넷·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마우리시오 쇼군 등 프라이드FC의 정상급 파이터들이 총출동한 이 대회에서 '옥에 티'로 꼽힐 만큼의 졸전이었다.

데뷔전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한 이태현의 위세는 하루 아침에 추락하고 말았다. 씨름판에서는 적수가 없는 '무적의 제왕'이었지만, 격투기 무대에서는 무명의 노장 선수를 상대로 단 10분도 버티지 못하는 '풋내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격투가'로 돌아온 이태현, 통쾌한 TKO승으로 데뷔 첫 승

격투기 무대에서 첫 승을 거둔 이태현 ⓒ XTM 화면 캡쳐


그 후 이태현은 1년이 넘도록 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에이전트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소식과 러시아의 레드 데블팀에서 '황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합동 훈련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렇게 '이태현'이라는 존재가 조금씩 희미해지던 지난 15일, 이태현은 K-1 히어로즈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며 28일 K-1 히어로즈 서울대회를 통해 재기전을 치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1년 1개월만에 경기를 치르는 이태현의 상대는 야마모토 요시히사(일본). 프로레슬러 출신의 야마모토는 종합 격투기 전적 7승 16패를 기록한 중견 선수로 한국의 최무배와 김민수에게 패배를 당한 바 있다.

재기전에서 맞붙기엔 큰 부담이 없는 상대지만, 오히려 강자가 아니기에 이태현으로서는 더욱 절박한 상황이었다. 만약 야마모토에게도 패한다면 이태현은 종합 격투기 무대에서 더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태현은 1년 1개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된 기량을 과시하며 야마모토를 제압했다. 격투기 전향 후 감격적인 첫 승을 따내면서 K-1 히어로즈 무대에서 성공적인 '이적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링에 오른 이태현은 가벼운 펀치 공격으로 기회를 엿보다가 복부를 겨냥한 미들킥에 이은 펀치 러시로 야마모토를 쓰러뜨렸고, 등을 돌리며 엎드린 야마모토의 안면에 연속으로 파운딩 공격을 퍼부어 1분 3초만에 가볍게 TKO승을 거뒀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경기가 끝나는 바람에 그라운드 기술이나 체력 보강 등 효도르에게 배운 이태현의 훈련 성과를 보지 못해 아쉬울 정도로 압도적인 경기였다.

지난 2005년 프라이드FC를 견제하기 위해 출범한 종합 격투기 무대 'K-1 히어로즈'는 역사가 길지 않아 과거의 프라이드FC나 UFC처럼 두꺼운 선수층을 보유하지 못했다.

특히 100kg 이상의 중량급에서는 마이티 모, 레이 세포 등 '입식 전문 선수'를 출전시킬 정도로 선수가 부족해 아직 챔피언을 가리는 토너먼트를 한 번도 치르지 못했다(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윤동식·추성훈·데니스 강·멜빈 맨호프 등은 모두 85㎏ 이하 라이트 헤비급이다).

따라서 이태현은 앞으로의 성장 속도에 따라 K-1 히어로즈를 대표하는 중량급의 간판 스타로 떠오를 수 있다. 과거 씨름계를 주름잡았던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이  '격투기의 황태자'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2007 K-1 히어로즈 서울대회 경기 결과

제1경기 베르나리 악카 vs. 포아이 스가누마 (스가누마 1라운드 TKO승)
제2경기 권아솔 vs. 다카무라 다이스케 (나카무라 3라운드 크로스암바 승)
제3경기 허민석 vs. 시비타 카츠요리 (허민석 2라운드 KO승)

제4경기 카를로스 뉴튼 vs. 오야마 슌고 (오야마 2라운드 TKO승)
제5경기 김대원 vs. 마르셀로 가르시아 (김대원 2라운드 TKO승)
제6경기 이태현 vs. 야마모토 요시히로 (이태현 1라운드 TKO승)

제7경기 미노와맨 vs. 김민수 (김민수 1라운드 TKO승)
제8경기 김태영 vs. 젤그 갈레시치 (갈레시치 1라운드 TKO승)
제9경기 윤동식 vs. 파비오 실바 (윤동식 1라운드 크로스암바 승)

제10경기 데니스 강 vs. 추성훈 (추성훈 1회 KO승)
이태현 K-1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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