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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0년째 연애편지 쓰는 21세기 신인감독"

[천호영의 문화초대석] '충무로의 스타일리스트' 영화 < M >의 이명세 감독

07.10.30 18:05최종업데이트07.11.0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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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 ⓒ 오마이뉴스 안홍기



'어떤 꿈을 꿨다. 어마어마한 계획을 갖고 혁명가일 줄 알고 영화를 찍었는데 <개그맨(1998)>이 돼 버렸다. 그래도 이것이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것,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였고, 호응을 받았다. 그 <첫사랑(1993)>의 열정을 밀고 나갔는데, 이번엔 또 깨져버렸다. 그래서 <남자는 괴로워(1995)>가 시작됐지만, 그럼에도 관객과의 <지독한 사랑(1996)>을 계속했다. 그래 다 버려도 좋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면서 밀어붙였는데 또 됐다. 그렇듯 관객과 내 영화와의 싸움이 <형사(2005)>였고, 그래서  '듀얼리스트(Duelistㆍ대결자)'란 제목을 덧붙였다.'

지난 25일 영화 <M> 개봉일, 이명세 감독(50)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들어 그동안 영화감독으로서 걸어온 역정을 풀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작 <M>에 이르러 "<M>의 결과에 따라서 그 다음 영화의 행로가 달라지는 그런 기로, 미들(Middle)의 상태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기로'에 서 있는 이명세 감독을 서울 청담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개봉을 앞둔 심정을 물었더니 "글쎄, 내가 꿈을 많이 꾸는데 꿈도 안 꾼 것 같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것 같다"고 했다.

전작 <형사 Duelist>의 흥행이 부진했는데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형사>가 기대에 미치진 못했지만 그렇게 안 된 건 아니"라며 "이번 작품(<M>)은 조금 잘 되지 않을까 싶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난 25일 전국 250개 스크린에서 관객과 만난 <M>의 결과는 아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한때 예매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정작 개봉 첫주 흥행성적은 주말관객 약 23만명에 그쳐 박스오피스 3위에 머물렀다. 한 통신사는 앞질러 '이명세·강동원 <M>, 왜 망했나'란 기사제목을 뽑기도 했다.

아름답다, 그러나 재미없다?

<M>은 이명세 감독과 배우 강동원의 두 번째 만남으로 개봉 전부터 일찌감치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에 따라 흥행에 대한 기대도 부풀려졌다. 하지만 결과는…, 왜?

개봉에 앞서 이명세 감독은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관객들이 민우(극중 주인공)가 꾸는 악몽과 혼돈을 똑같이 느끼면서 첫사랑의 기억을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리고 실제 영화가 시작됐을 때, 관객들은 '첫사랑의 기억'을 찾기 전 정말 '혼돈'에 빠져버렸다.

관객의 반응은 극단으로 나뉘었다. '21세기 영상언어의 탄생'이라는 호평과 '불친절한 이미지의 과잉'이란 혹평이 엇갈렸다. 그 가운데 부정적인 반응들은 '재미없다' '어렵다'로 요약됐다. <형사> 때 논란이 되풀이되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영화문법, 새로운 영상언어에 대한 이 감독의 집념을 '아집'으로 몰아세우는 의견들도 눈에 띈다.

이명세 감독은 이같은 반응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까. 충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이다. 어쩌면 논란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인터뷰에서 "좋은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성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숱한 논란과 흥행 부진을 무릅쓰면서도 믿고,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인가. 'M'이란 키워드를 통해 그 궁금증을 풀어본다. 먼저, 그런데 영화 제목이 왜 'M'일까.

[미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중간에 이명세가 서있다

영화 <M>의 'M'은 남녀 주인공 민우(강동원)과 미미(이연희)의 이름 이니셜. 영화 속에서 '모차르트와 모딜리아니와 달(Moon)'을 좋아하는 미미는 민우에게 '미스터 M'이란 자신만의 이름을 붙인다. 민우에게 '첫사랑' 미미는 뮤즈(Muse)다. 그리고 그 중간(Middle)에 연희(공효진)가 있다.

영화 <M>은 이들 세 주인공의 얽히고설킨 사랑과 기억(Memory)과 꿈(dreamM, 夢)을 미스터리 멜로(Mysterious Melo)로 풀어간다.

민우와 미미가 만나는 루팡바 골목에는 안개가 깔려(Misty) 몽환의 풍경을 연출하고, 골목 입구와 민우의 아파트를 장식한 거울(Mirror)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입체적이고 반복적인 일식집의 기이한 모습은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Magritte)의 그림을 닮았다. 첫사랑의 추억이 시작되는 곳도 '모나리자(MonaLisa) 헤어숍'이다.

무엇보다 'M'은 이명세 자신이기도 하다. 민우가 첫사랑을 쫓는 모습은 그가 영화(Movie)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과 포개진다. 그는 꿈속에서 히치콕 감독으로부터 <M>이란 제목의 책자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프로덕션M'에서 제작을 맡아 자신만의 질감(Matiere)으로 영화 <M>을 빚어냈다.

이명세 감독은 인터뷰에서 여러 'M' 가운데 특히 미들(Middle)을 되풀이 강조했다. 'M'이 알파벳 26자 가운데 중간(13번째)에 있듯이 자신의 영화도 중간, 예컨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중간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제 영화는 가장 중간 입장에 있다고 보면 돼요. 그렇기 때문에 평론가들한테도 공격받을 수 있지만 제가 믿는 건 극단에 있는 건 안 좋다는 것이지. 극단에 있는 것은 거의 이블(evil), 악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것이든 극에 가있는 건 논리적으로든 가치적으로든 문제가 많다, 그래서 M, 미들을 지키고, 지금까지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 온 거예요. 그것이 어떤 때는 (관객과) 아주 잘 만나기도 하고… 그렇게 끊임없는 시소게임을 해오고 있어요."

[마스터베이션] 평론가는 즐거워도 관객은 괴로워?

이명세 감독 ⓒ 오마이뉴스 안홍기


한 영화평론가는 <M>에 대해 한 신문에 "우스갯소리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마스터베이션'의 'M'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이명세 감독 자신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개인적 실험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밝혔다.

이 감독 역시 그 글을 읽어봤다고 했다. 그는 웃으며 "그 분이 좀 오버해 글에 마스터베이션한 것"이라고 받았다.

"제가 마스터베이션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결국 관객과 만남에 있는 것이지. 제가 평론가를 대상으로, 저널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영화는 광장예술이고, 그 결과는 저도 알 수 없어요. 또, 마스터베이션이면 어때. 혼자 떠들고 퍼포먼스한 거 같지만 (관객과) 만나지는 지점이 있단 말이에요. 제가 상대로 하는 건 관객이고 영화는 관객에게 쓰는 연애편지예요."

그는 또 "데뷔했을 때부터 워낙 씹혀 (혹평에는) 단련돼 있다"고 했다.

데뷔 당시 "'유치하다, 의식없다, 주제없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공격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제가 갖고 있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흔들림은 없었어요."

하지만 요즘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이제 좋은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성전을 벌여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는 좋은 걸 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알아주겠지, 이게 기본적으로 많은 예술가들의 정신이잖아요. 고흐도, 모딜리아니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면서 죽었을 것이고.

그런데 상업적인 사람들이 가치도 없는데 더 공격적이에요. 소위 조폭영화를 예를 들면 거기에도 충분한 재미도 있고 좋은 영화들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일반적인 조폭영화라 면 왜 이런 영화들만 돈을 벌고 시대 가치처럼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느냐는 거죠."

앞서 언급했던 평론가는 <M>에 대해 "평론가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영화지만 관객에게는 불친절한 영화다"라고 덧붙였다. <M>의 영화 속 출판사 직원도 사장의 말을 전하며 주인공 작가에게 '조금 덜 시적이고, 조금 더 구체적일 것(less poetic, more specific)'을 주문한다. <M>이 조금 더 구체적일 수는, 조금 더 친절할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스페시픽(specific)한 얘기를 심플하게는 갖고 있죠. 그걸 전개하는 방법에서 많은 실험이 필요하고…. 예술가들이 하는 일은 메시지를 날리는 건 아니에요. 이 세상을 가르치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영화란 것은, 예술이라는 것은 문밖에서 두드리는 어떤 남자와 같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끊임없이 두드릴 뿐이에요."

그러면서 그는 이 대목에서 브로드웨이 연극과 <뉴욕타임스>의 예를 들어 평론의 역할을 강조했다.

"테네시 윌리엄스 등의 연극도 첫 관객 시사 때는 이게 뭐냐 했어요. 그때는 다들 아침에 배달되는 <뉴욕타임스> 평을 기다렸는데, 관객들이 다 '꽝'이라고 해도 평이 좋으면, 관객이 아 그런가, 이렇게 유도를 했단 말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쏜톤 와일더도 테네시 윌리엄스도 에드워드 올비도 없어요. 우리가 명작이라는 '우리읍내'든, '동물원이야기'이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태어날 수 없었어요. 만약 그때 그 평론의 힘, 영향력이 없었다면 아마 여전히 셰익스피어만이 최고의 가치로서 공연되고 있을지 몰라요."

[미장센] 첫사랑의 환영, 영화란 무엇인가

이명세 감독은 충무로의 대표적인 스타일리스트, 비주얼리스트로 꼽힌다. <M>은 왜 그에게 그같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한 영화전문기자는 <M>에 대해 "이명세 스타일의 집대성"으로 평가했고, 또 한 영화담당 기자는 'M'을 "이명세만의 미장센(Mise-en-scene: 장면 연출)"으로 풀이했다.

- 미장센과 관련해 이번 작품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있다면요?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는 방식은, 영화가 얘기를 해요. 이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이 사람은 혼란에 빠져있고…. 얘기를 통해서 (영화가) 관객과는 떨어져 있어요. 주인공은 혼자 혼돈에 빠져 있고, 관객은 이해는 하되 혼돈에 빠져 있으면 안돼요. 얘기를 쫓아가는 방식이죠. 그런데 저는 (관객이) 똑같이 혼돈을 느꼈으면 좋겠다, 이것이 실험이라면 실험이에요. 음식 맛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과 똑같아요. 영화로는 음식 맛을 나타내기 어려운데 주인공이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것처럼 관객도 배가 고팠으면 좋겠다, 이 느낌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어떤 혼돈된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거지."

- <형사> 때는 움직임에, <M>에선 빛과 어둠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빛나는 어둠'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는데요?
"전도서 말씀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어요. 제 작업은 페이드인, 페이드아웃은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뭔가, 그것을 묻고 거기에 답하는 거죠.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 눈뜸과 감음, 주인공이 눈 뜰 때는 빛이고 감을 때는 어둠, 그렇게 얘기를 전개해가는 거죠. 그때 빛나는 어둠이라는 건 바로 빛을 잉태하고 있는 어둠, 새벽녘에 가장 가까운 어둠이지. 누구나가 살면서 언젠가 만날 수 있는 어둠. 어떤 사람들은 일로 술로 마약으로 도박으로 피해가지만 그 어둠이야말로 누군가가 주는 축복 같은 거예요. 그 빛을 잉태한 어둠을 직시했을 때 그 안에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가치가 있고. 그 가치는 각자가 찾아가는 몫일 텐데, 저는 그것이 첫사랑이라고 제시한 거죠."

- 제목 자체가 <첫사랑>인 영화도 있고, <M>도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다루듯이 감독님 영화에선 첫사랑이란 주제가 계속 변주되고 있는데요?
"다들 첫사랑과 관련해 제게 뭔가 내상이든 외상이든 있는 것 같다는데 진짜 없어요. (다만) 제가 느꼈던 첫사랑의 경험은 너무 희한하고, 그래요. 고2 때 바로 아래 후배를 좋아했어요.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1년 내내 매일 썼고,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죠. 그런데 오늘처럼 햇살이 좋은 어느 날, '참 아름답다' 느끼는 순간, 내 속에 갖고 있던 감정이 싸악~ 휩쓸려 가더라구. 기억은 남았는데 감정은 손톱의 때만큼도 안 남았어.

나중에 아, 첫사랑이라는 게 환영이구나,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어떤 환영을 사랑했던 것이 아닌가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 때가 또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기에 영화란 무엇인가와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동시에 질문하게 됐던 것 같아요.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가, 사랑이라고 하지만 환영이 아닌가, 그럼 영화는 또 무엇인가, 이런 끊임없는 질문들이 그때그때 저의 성장과 함께 반영이 돼 온 거겠죠."

- 충무로의 스타일리스트, 비주얼리스트라는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받아들이세요?
"처음엔 좋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씹히는 쪽으로 흘러가서, 용어를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웃음). 영화란 것은 비주얼로 얘기해야 하는 것이지. 얘기로 전달할 수 있다면 그건 소설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영화는 본질적인 면에서 시에 가까워요. 리듬 면에서는 음악과 가깝고. 굳이 얘기틀을 갖고 온다면 단편소설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마스터] 인정사정 보지 않는 '친절한 명세씨'

이명세 감독의 영화는 장면장면이 하나의 작품이다. 그가 야외촬영보다 세트촬영을 선호하는 까닭도 매 장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서다.

<M> 역시 90% 이상을 세트에서 촬영했다. 프로덕션디자인(영화미술)도 그가 직접 했다. 그렇게 카메라가 돌아가고, 그는 후반 작업을 거쳐 마법(Magic)과 같은 영상을 뽑아냈다. <M>은 그같은 영상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나로선 자신에게 벅찬 명화 도록을 받아든 아이처럼 그것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의 느낌을 그에게 솔직히 얘기했다.

"예전에 어떤 촬영감독님이 '빨리빨리 찍자, 우리가 CF를 찍나, 매 쇼트를 어떻게 공들여 찍을 수 있냐'고 해서, 그 때 제가 한 얘기가 있어요. '댐은 바늘구멍 하나에 의해서 터진다. 우리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댐은 무너질지 모른다.' 그냥 댐을 열심히 쌓을 뿐이에요. 어떤 분께는 너무 팽팽해서 쉴 여유를 줄 수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영화에서 얘기를 따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 한 장면에 걸려드는 사람도 있다, 그걸 소홀히 할 수는 없다고 봐요."

그는 또 "우리 아버님이 요리사 출신이라 그런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영화 작업은 "음식상 차리는 것과 똑같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메뉴에 메인 요리가 따로 있더라도 구석에 놓인 음식들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 한 잔이라도 확실하게 놓여야 하고, 깨끗한 물을 구하기 위해 알프스산이라도 가야 한다. 그래서 어떤 분께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이 관객과의 만남이겠죠. 음식에 골고루 손을 대면 행복하게 만나는 거고, 너무나 많아서 질린다면 '꽝' 나는 거고. 그렇더라도 음식상 차리는 데 소홀함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거죠."

▲ 친절한 명세씨 이명세 감독이 < M >의 미미역 이연희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 (주)프로덕션 M



언론시사 기자간담회 때 한 기자가 배우들에게, 이명세 감독이 현장에서 무섭기로 소문나 있는데 실제로는 어땠냐고 물었다. 공효진과 이연희는 "무섭지 않고 친구처럼 편안했다"고 답했다. 이를 받아 그는 자신을 '친절한 명세씨'라고 소개했다. 강동원도 '친절한 명세씨'임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집요하다"고 덧붙였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출연했던 박중훈은 조너선 드미 감독의 <찰리의 진실>에 캐스팅됐을 때 감독에게 제안해 원래 일본식 배역 이름을 '이일상'으로 바꿨다. '일상'은 작고한 그의 아버지 이름이고, '이'는 이명세 감독의 성에서 따왔다.

그렇듯 이 감독을 존경하는 박중훈이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촬영 때 겪었던 고통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끝도 없이 오래 찍고, 오래 찍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괴로운 현장의 하이라이트였다." 물론 주먹구구식 한국영화 제작시스템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 감독의 '철저함' '집요함'도 거기에 한몫한 게 사실이다.

"우리 시스템이 덜 받쳐줘서 그래요. 이전엔 너무 관습적으로 영화를 찍었어요. 제임스 카메룬의 스태프는 거의 죽는대요. 대신 돈을 많이 주고. 또 우디 앨런은 새벽에 집합해서 밤 8시에 촬영해요. 하루종일 리허설이지. 여기에 견뎌낼 (우리) 연기자는 한 명도 없어요. 우리는 너무 안일하고 허술하게 했던 거예요. 만약 내 영화 못 견딘다? 그럼 진짜 프로페셔널을 만나면 자빠져. 제임스 조이스는 1주일에 한 문장을 만든다는데, 만약 그 문장교실 가면 돌아버리지."

그는 개봉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다듬고, 또 다듬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 이제 개봉하면 더는 손질을 할 수 없을 텐데, 아쉬운 점은 없나요?
"사운드 문제가 조금 있고… 또 준비를 많이 했음에도 못한 게 몇몇 있어요. 소위 '커피빈 거리신' 같은 경우에도 가장 많이 보는 거리지만 아주 낯설고 기이한, 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또 CG에 관한 부분도 조금 더 정밀하게 손을 봐야 할 부분이 있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여러 형편상… 이 정도 예산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선 전 '기브업'을 해요. OK, 이번 영화는 이 정도까지. 버틸 때까지 버티고 싸우고 하지만 털 때는 아주 깨끗하게 털고. 책이라면 최인훈 선생님처럼 끊임없이 문장도 바꿔보고 하겠지만, 지금 이명세의 성장은 여기까지, 뭐 이 정도로…."

[머니] <디 워>가 흥행이 잘 됐으니 <M>도?

이명세 감독 ⓒ 오마이뉴스 안홍기


이명세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 '아주담담' 행사에서 "강동원과 나는 정신적 DNA가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형사>에 이어 <M>에서도 강동원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한 영화평론가는 <형사>에서 이 감독의 조명과 소품 등보다 더 강력한 비주얼은 '강동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M>의 '미스터 M'이 꼭 강동원씨여야 했나요?
"글쎄, 뭐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좋아도 강동원이 안 하면 할 수 없는 거고. 열어놓고는 있지만 맞으면 같이 가는 거고, 안 맞으면 안 가도 할 수 없고…."

- 어떤 점이 맞았나요?
"이 친구는 자기 한계점을 알아요. 그게 중요한 얘기지. 얼굴이 갖고 있는 장단점을 알고 있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고. 정말 하려는 의지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한국 영화감독으로서 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은 했죠."

그는 <형사> 이후 강동원의 행보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에 '목소리'로 출연한, 도전정신을 높이 샀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걸 싫어해. 또 너무 예술적인 것도 싫어해.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게 돈과 명예인데 이걸 다 싫어해. 딱 중간에 있으려고 해. 이 점이 저랑 똑같아요."

상업적인 걸 싫어한다고? 영화는 숙명적으로 대중예술, '상품'이다. 그 역시 한 인터뷰에서 우스개 삼아 'M'의 또 다른 의미로 '머니(Money)', 돈을 들기도 했다.

"영화에서 수익은 손해 안 보는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국영화 200만~300만짜리가 5개 있는 게 낫지 천만짜리 2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뭔가 편향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중저가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고. 이렇게 다양해져야 그 욕심이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희석시킬 수 있는데, 명품만이 좋다고 하면 명품을 못 갖는 사람들은 욕망이 생기고, 거기서 문제가 생기잖아요. 개인으로선 천만이 들면 좋겠지만, 몇 개가 고루고루 성장해야 그 사회가 건강한 것이지."

- 엉뚱한 질문 같지만 혹시 <디 워>는 보셨나요?
"못 봤습니다. 한 번 꼭 보려고 했는데 계속 바쁜 와중이라 못 봤어요."

- 다른 차원이긴 합니다만 <디 워>도 CG는 훌륭하지만 스토리, 플롯에 대해선 거센 비판을 받았는데요?
"그래도 <디 워>는 흥행이 엄청 잘 됐죠. 안 그래도 어제 아이디어 얘기하다가 누군가 그런 얘기를 꺼내기에 그렇다면 이 영화(<M>)도 잘 되겠네, 농담처럼 그랬어요.(웃음)"

- <M>은 어느 정도 흥행을 기대하나요?
"손해만 안 봤으면 좋겠어요. BEP(손익분기점)를 맞추려면 130만~150만은 들어야 하는데 거기에 한 10만~20만 정도만 더 됐으면…. 저는 이 영화를 돈을 안 받고 시작했어요. 촬영감독이나 몇몇 스태프들도 절반 가격으로 참여했고. BEP 넘으면 그 때 가져가고…. 그래서 저 개인을 떠나서 이 영화는 잘돼야 해요. 그래야 이 형태가 한국영화의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하나의 (대안) 형태가 될 것이고, 또 후배들이 확장되잖아요."

[마니아] 영화, 그리고 관객과의 '지독한 사랑'

그는 1978년 가을 충무로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이장호·배창호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거쳐 1988년 <개그맨>으로 처음 메가폰을 잡았다. 올해로 영화 인생 30년, 감독 생활 20년을 맞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21세기 신인감독'이라고 소개한다.

"영화를 만드는 순간은 누구나 다 신인이라고 생각해요.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 이전도 없고 그 이후도 없는 거죠. 영화를 만드는 순간만이 감독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고, 생명을 갖고있는 거죠. '신인감독'이라고 하는 건 흔히 얘기하듯 초심을 잃지 말자는 것이죠. 내가 왜 영화를 하려고 했는가, 돈 때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도 아니고, 영화를 사랑해서,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다, 이런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또 젊은 연기자들과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도 '저도 신인감독입니다', 하하."

- <M>은 한 때 소중했지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30년의 영화인생으로 잃어버린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잃은 건 머리카락이고(웃음), 또 많은 친구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얻은 건 빚이고(웃음), 병인 것 같고…, 그래요. 가끔 제 아이들 꿈을 꾸는데 그 기억이 어린 시절밖에 없어요. 그것이 마음에 아파요. 하지만 어차피 제가 선택했고, 돌이킬 수 없는 거고. 후회하지 말자, 이젠 물러설 수도 없고 나가는 길밖에 없다, 영화 하나만이라도 잘하자, 영화만큼은 정직하자, 이제는 그것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 애들이나 친구들은 섭섭한 점이 있겠지만, 내가 영화만큼은 열심히 할게, 그러니 봐다오, 그런 거죠."

이명세 감독이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이 빚과 병만은 아니다. 그는 데뷔 초기부터 '이명세표' 영화로 마니아층을 이뤘고,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형사> 이후 마니아 관객들의 충성도는 더욱 높아졌다. 인터넷에 팬클럽('형사 중독')을 두고 회원들이 경비를 모아 매년 <형사> 첫 개봉 날짜(9월 8일)에 맞춰 기념상영회를 열고 있을 정도다.

- 영화를 만들 때 관객, 팬들을 의식하시나요?
"그럼요. 그건 팬에 대한 애정이죠. 또 제 영화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애정이 밑받침되니까 제가 딴 길을 갈 수 없지. 그 사람들의 믿음을 저도 믿는 거죠."

그는 또 "관객은 연애하는 상대와 비슷한 것 같다"면서 자신은 "우직하게 한 마음으로 연애편지를 쓸 뿐"이라고 했다.

이명세 감독 ⓒ 오마이뉴스 안홍기



충무로 안에도 '이명세교' 신도들이 다수 있다. 지난 26일 EBS-TV <시네마천국>에선 그 신도 가운데 세 명의 후배감독이 모여 '빛과 어둠의 진화 - 스타일로 영화를 말한다'는 주제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이명세 감독님 사랑합니다"라고 앞 다퉈 고백했다.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은 이 감독을 "가장 영화적으로 사고하고, 영화적 언어로 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시는 어른"이라고 치켜세웠다. <밀애>의 변영주 감독은 나아가 "계속 진화하고 발전하는 영화를 만드셔 우리가 얼마나 무지하고 게으른지를 깨닫게" 하기에 그의 존재가 "후배감독들에게는 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해영 감독도 "이 감독님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를 만들어오셨다"며 그를 "20년 이후 내가 어떤 영화를 만들까 할 때의 롤 모델"로 삼았다.

한편 이명세 감독도 후배감독의 활동과 관련 "한국영화는 정말 복받았다"고 말했다. '주의 깊게 지켜보는 후배감독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냥 줄줄이 꼽아도 20명이 넘는다"며 정말 20명 가까운 후배감독 이름을 나열했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며 한 가닥씩 하는 감독이 이렇게 많은 적이 있었던가, 깜짝 놀랐다"며 "정말 많아요"란 감탄을 되풀이했다.

그는 후배감독들에게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읽어내는 듯했다. 다만, 그 싹을 자르지 않고 잘만 키워낸다면.

"<이지 라이더>가 없었다면 아메리칸 뉴시네마는 탄생할 수 없었고, 장뤼크 고다르가 가차 없이 버려졌다면 누벨바그도 탄생할 수 없었고, 네오리얼리즘도 마찬가지고…."

[꿈] 다음 작품은 '사무라이 + 바람'

이명세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전설적인 일본 사무라이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크랭크인 목표는 내년 가을.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비, <형사>가 눈, <M>이 안개라는 자연현상을 비주얼로 활용했다면 "다음은 대충 바람이지 않을까 싶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 일본말로 일본영화를 찍어보려 한다"고 했다. 한일합작으로.

"소니와 현대의 결합이라고 할까요. 우리가 부품을 가져가고, 소니의 브랜드를 이용해 세계시장에 가보겠다는 거죠. 사실 제 꿈은 마흔에 일본을 먹겠다, 그리고 쉰에 대륙에 진출하겠다는 거였어요. (세계)시장을 나가지 않는 한 한국영화는 조만간 죽어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한 결국 시장 싸움이고 자본 싸움이죠. 그런 점에서 세계시장으로 나가는 발판을 일본으로 삼으려는 것이고,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봐요. (한일관계에서) 정리할 건 정리하되 넓게 봐야죠. 그렇지 못하면 미국영화와 중국영화가 커질 때 우리는 여러 케이블채널 가운데 하나를 갖고 있는 정도로 전락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요건 꼭 좀 써주세요"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이미 그는 지난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를 경험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디비전> <크로싱> 등 준비중인 작품 얘기도 들려왔다. 하지만 결국 결실을 보지 못한 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지금도 미국 에이전트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제 계획대로 걸어가려고 그래요. 매달려서 영화를 찍지는 않겠다, 정중하게 초대됐을 때 영화를 찍겠다고 전략을 좀 바꿨어요. 궁극적으로는 할리우드를 가려고 그래요. (다만) 가기 위해 어떤 것을 먼저 할 것이냐는 거지. 이번엔 뭔가 주도권을 갖고 할 수 있는 힘을 키운 다음에 갈 겁니다."

- 할리우드에서 보고 느낀 점이 있다면?
"한국엔 대충 아는 할리우드문화가 들어와 있어요. 할리우드에선 그저 자본이 창작을 마구 통제하는 것으로 아는데 절대! 한 예로 <천국의 나날들>과 <신레드라인>을 찍은 테렌스 맬릭이란 감독이 있는데, 그 감독을 먹여 살리며 20년 넘게 따라다닌 제작자가 있는 게 할리우드예요.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것도 물론 있지만, 이런 장인적인 정신이 있어요. 할리우드의 한면만 봐서는 안 돼요. 할리우드는 더 밤 많이 새우고, 더 철저하고, 그렇습니다."

- <M>은 꿈에 관한 이야기인데,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거창해요, 마인드콘트롤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세계영화사를 바꾸겠다, 세계영화사가 이명세로 인해 다시 쓰여지게 만들겠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흥행작을 만들겠다. 어마어마한 꿈을 갖고 있죠?"

- 그 꿈이 언제쯤 이뤄질까요?
"글쎄요, 조금씩 움직임은 있는 거 같아요. <형사> 때 '세계영화사의 UFO 같은 영화'라는 재밌는 평가가 있었죠. 이번에 참여했던 토론토영화제에서도 '최고의 영화는 <M>이다', 그런 평가가 있었고. 또 작년에는 스페인 시체츠영화제에 갔는데, 어떤 스페인 친구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사인해달라고 그래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팬이라고. 제 영화 <형사>를 보기 위해 8시간 동안 차를 몰고 온 거예요. 아, 영화가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구나, 영화의 영향력이란 건 참 크구나, 생각했죠. 그 친구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보고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돼 웹매가진을 만들었는데, 그런 젊은 친구들이 자리를 잡는다면 세계영화사가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요. 그리고 흥행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것도 조만간…."

<M>의 흥행 결과를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세계영화사를 바꾸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의 길을 찾아가는 그의 도전, 그의 고집이 쉽게 꺾이지는 않을 듯싶다. 어쨌든, 그건 한국영화의 복이다.

M 이명세 강동원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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