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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왜 슬프지 않지?

좌파적 영화읽기(1) : 돌아온 신파, 한국 관객은 난처함 느낄 듯

07.11.13 09:56최종업데이트07.11.1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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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기리 죠, "독특해"


▲ <도쿄타워> <도쿄타워>의 포스터 ⓒ 스폰지

마츠오카 조지(이 영화의 감독)가 누군지는 몰라도 오다기리 죠는 웬만큼 다 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제목부터가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이하 도쿄타워)다.


그러나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그의 유명세가 아니다. 그가 배우로서 내뿜는 고유함.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옷맵시. 허스키하면서도 경쾌한 목소리 그 자체다. <4월 이야기>의 청순녀 마츠 다카코가 영화 속에서 두 번이나 말했듯이 그는 '독특'하다.


영화를 이루는 무게중심의 절반은 이렇듯 오다기리 죠란 배우를 향해 있다. 나머지는 각자 끈질긴 유형의 사람들이 직조해가는 묘한 일상에 있다.

 

시종일관 그래도 한번쯤은 싸우겠지 여기는 장면들이 지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갈등하지 않는다. 대신 그 상태로 조화롭게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끈질긴 유형의 사람들이다.


방탕한 대학 생활에 "엄마 나 실은 4년간 공부한 게 거의 없어"라고 말하는 아들. 누구나 그 상황에선 욕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이 영화 속의 엄마는 "그래? 그럼 조금만 더 참지"라고 이야기한다. 수십 년간 자유롭게만 살아온 아버지가 뒤늦게 찾아온다는 소식에 엄마는 누추해 보이면 어쩌나, 귀여운 고민만 한다. 아들은 아들, 아버지는 아버지, 엄마는 그 나름대로 평행선을 그리며 사는 것 같지만 그 평행선은 평화롭게 나란한 모양이다.


평행선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까지 평온한 일상의 느낌을 드리운다. 엄마의 죽음은 딱히 아들의 영혼이 황폐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죽은 엄마는 한창때 모습으로 나타나, 일을 미루려는 아들을 조용히 타이른다. 그리고 바로 아래층에서 아들의 친구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나게 논다.


너무도 평온한 일상성, 이에 수놓인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처리는 딱 잘라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쿄'와 '타워'의 행방불명

 

▲ <도쿄타워> <도쿄타워>는 슬픔을 위한 슬픔을 강조한다 ⓒ 스폰지

그러나 정작 궁금한 것은 왜 이 영화가 '도쿄타워'인가 하는 점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이에 대한 변명조의 내레이션이 나오는 듯하다. 내레이션대로라면 그들은 도쿄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었으며, 도쿄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러한 상실감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영화 속 도쿄의 모습도 그렇게 황폐하지 않다. 오히려 도쿄는, 15년 동안이나 떨어져 살아왔던 어머니에게 주인공이 비로소 효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비록 모두가 힘겨운 어머니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도시지만 작은 웃음이 있는 고마운 장소다. 여기서 이 작품의 나름대로 중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도쿄'와 내면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어머니와 아들의 애틋한 정감 사이에 어색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굳이 도쿄여야 한다는 필연성이 과연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또한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내레이션과 실제 내용과의 불일치다).


영화 중간에 가끔 보이는 도쿄타워의 모습은 삽화처럼 생경하다. 영화 말미에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며 어머니의 위패를 모시고, 탑에 오르는 주인공의 모습도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2007 신파극 리턴즈


한국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오다기리 죠라고 해도 이 영화의 흥행에는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한 것 같다.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영화가 빚어내는 슬픔에 한국관객들이 크게 젖어들지 못한 까닭이다.


영화는 갈수록 러닝타임에 대한 부담감을 준다. 영화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담백함과 친절한 내레이션이 점점 지루함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극의 전개가 점점 슬픔을 위한 슬픔으로 흘러갈수록 '한국관객'은 난처함을 느끼게 된다.


슬픔에의 강요. 이 영화는 일본인들 특유의 애조를 강조했던 그 옛날의 신파극으로부터 많이 나아갔다고 보기 어렵다. 신파극이 태생적으로 눈물을 원했듯 이 영화도 같은 방식으로 관객들이 울어주길 원한다.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을 맨 처음 보았던 관객들은 울어야 할 부분에서도 그만 웃고 말았다고 한다. 시대가 많이 변하고, 한국과 일본의 정서가 많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슬픔을 위한 슬픔은 눈물에 대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200만 열도를 울린 한 남자의 눈물'을 만나도 정작 나 하나는 울지 못하는 까닭이다.

2007.11.13 09:56 ⓒ 2007 OhmyNews
좌파적 영화읽기 도쿄타워 오다기리 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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