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있어 내가 있다!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이야기

등록 2007.11.30 14:11수정 2007.11.3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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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침. 어스름한 어둠이 햇살에 쫓겨나기 전이다. 건너편 인왕산이 새벽하늘에 윤곽을 드러낸다. 06시 49분 버스가 달려온다. 이른 시각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첫 번째 기도문을 암송한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 마음다함의 하루를 주소서!

        마음다하여 숨쉬고,

        마음다하여 걷게 하소서!

        자연을 대할 때 마음다하게 하시고,

        사람을 만날 때도 마음다하게 하소서!

        온 마음 다하여 당신께 간구합니다.

        주여, 제게 마음 다함의 하루를 주소서!

 

평소 암송하던 詩를 다 외우다보면 금세 시청 앞을 지나고 있다. 어제부터 외우기 시작한 시가 막혔다. 수첩을 꺼낸다.

 

‘해 뜨는 아침에는 /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 그대에게 가고 싶다 /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략)

 

-안도현님의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에서-

 

머리에 하얀 머리가 돋아나기 시작하면서 외우는 것이 더디다. 외우고 또 외워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긴다. 꼭 외워버려야겠다. 버스가 원효로에 도착하자 어스름한 아침이 밝아온다.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우리 아이들의 모습도 드물게 보인다!

 

예쁜 녀석들! 어쩌다 앞서가는 녀석이 있으면 걸음을 재촉하여 따라붙는다. 뒤에서 놀려주기도 한다. 거의 대개는 미소로 답한다. 4년 전엔 이렇게 등굣길에서 알게 된 녀석이 내 학급이 된 적이 있었다. 너무 반가웠고, 우리는 내내 가까운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가끔씩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가 친구임을 보여 준다. 오늘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겠다.

 

언제나 경계하지 않고 다가오는 녀석들이 내게는 친구요, 선물이며, 은총이다. 항상 마시는 물에 감사하지 않는 것처럼, 내게 주신 선물에 감사함을 자주 잊어버린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있어 내가 있다. 감사해야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고 나인 것이다. 가끔씩 녀석들에게 감사를 기대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자신을 야단친 적이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까지는 5분 거리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친해질 만큼의 여유는 된다. 몇 학년인지, 담임선생님이 누구신지, 집이 어디인지... 그리고 학교를 좋아하는지, 어느 수업이 제일 재미있는지.... 대개는 거의 나 혼자서 말을 하게 되는데, 주로 질문이 이어진다. 처음엔 녀석들이 별로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학교에 도착할 즈음엔 제법 녀석의 말이 길어진다. ‘녀석도 나의 친구가 되겠구나!‘

 

이번 학기 들어 청소시간에 2학년 녀석들 6명을 사귀었다. 특별교실이 3곳인데, 여기가 나의 청소담당이다. 지난 수능 전에 청소하느라 고생을 했다. 책상에 어찌나 낙서를 하는지, 지우고 나서도 계속 낙서를 하는 통에 지울 때마다 낙서한 녀석들을 원망하곤 했다. 청소 당번들과 함께 아세톤으로 책상 위를 며칠 동안 밀어대면서 내 마음의 허물도 닦아냈다. 청소를 서둘러 끝내고 원더걸스의 텔미춤도 보여준다. 나도 배워서 저들과 함께 추고 싶다. 서로의 노고에 대한 격려의 표시로 하이파이브를 외치며 청소시간을 마무리 한다.

 

수업을 통하여 1년 동안 만난 친구들보다 이들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하루 중 길지 않은 시간, 그것도 청소시간에 잠깐씩 만날 뿐인데도 저들이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2007. 11. 30 큰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iamssem.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1.30 14:11ⓒ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ttp://iamssem.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경석 #학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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