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심플한' 생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 마지막 날 연주회에 참석하고서

등록 2007.12.30 10:04수정 2007.12.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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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를 끝낸 백 건우 씨 마지막 날, 연주한 첫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이었다. 베토벤은 "이 악장의 인상은 별이 빛나는 달밤의 무한한 높이를 바라볼 때에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백 씨 부부도 달을 좋아한다. ⓒ 박태신


감격에 젖어서

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일 년 전부터 기획돼 있던, 7일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는 많은 관객들의 호응과 박수 속에 끝났다.


갈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면서 나도 일 년 전부터 기대하던 공연이었다. 12월 바쁜 와중이었지만, 무리해서 시간을 마련했고, 연주회 시작 일주일 전 운좋게 마지막 날 연주회 하나 남은 R석 티켓을 예약할 수 있었다. 내겐 주제 넘는 좌석이었다.

단기간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는, 전무후무한 연주회를 완수했기에 백씨에게 2007년은 정말 의미 있는 한 해가 되었을 것이다. 수 차례의 커튼콜에 응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뜻밖에도 손을 들어 같이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피아노 주변은 꽃다발로 가득했다.

심플하게 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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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거듭 커튼콜에 응하면서. 두번째 곡은 31번이었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의 이 곡 연주를 자주 들었던지라 개인적으로 익숙한 곡이다. 84세에 연주한 실황 녹음이었다. ⓒ 박태신


예전에 백건우씨를 생각하면 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연주할 때 재킷 안에 입는 흰색 터틀넥 스웨터가 그것이다. 그저 편해서 입는 그 스웨터를 아주 오래 오래 입었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조선일보 2000년 10월 12일자). 이 기사에서도, 백씨가 터틀넥 스웨터만 20년 넘게 고집해서 입었다고 나오는데, 역시 "편해서"였기 때문이다.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객석> 2007년 12월호) 때는 그랬다. 인터뷰 날 사진을 찍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었지 평소에는 단벌신사라고.

연주회와 앨범 수익으로 살 백건우 윤정희씨 부부는 유명세와는 달리 소박하게 살고 있다. 부부의 삶 스타일이 워낙 심플해서 돈이 있어도 쓸 일이 별로 없다. 백씨는 위 인터뷰에서 “현대사회에서도 심플하고 간소한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랬다.


지난해 말 한 신문사에서 송년특집으로 이들 부부를 다룬 적이 있는데(문화일보 2006년 12월 29일자) 이 기사에서도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에겐 자동차가 없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연주회 때 신는 신발도 남대문에서 산 2만5천원짜리다. 그렇게 편할 수 없단다. 컴퓨터도 거의 손대지 않는다. 복잡한 곳에 들어가기가 싫어서다.

백씨는 프랑스 파리 외곽의 한 아파트에서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이맘때쯤 음악 보따리를 짊어지고 고국을 방문한다. 피아노는 연주회장에 있고 암보를 하고 오니 맨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그러나 그 옆에는 늘 윤씨가 있다. 작년에도 그렇게 하고 와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고, 결혼 30주년 겸 60세 생일 축하모임도 치르고 갔다. 그것도 지인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음악 이외의 매너나 행보, 인간관계 등을 통해 팬들을 압도하는 음악가들도 많지만. 이 부부에게는 음악 이외의 모든 것이 심플하고 자유롭다. 외곬으로 아날로그적 삶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첨단의 기술과 화려한 장식은 적절한 경우에만 사용하면 된다. 앨범 작업할 때의 녹음기술, 시설 잘 된 연주회장 정도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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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에워싼 객석. 쉼없이 연주한 세번째 곡은 32번이었다. 마지막 날은 이렇게 베토벤의 작곡 순서에 맞춰 프로그램을 짰다. 1882년에 완성된 최후의 소나타다. 베토벤은 이런 메모를 남겼다. "주여! 나의 눈은 당신의 건강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디 당신의 종을 마음 편히 가게 해주십시오." ⓒ 박태신


<언제나 소박하게>의 저자 존 레인은 책 속에서 인간적 소박함을 되찾기 위해 여러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안락함, 편리함, 물질적 재산 속에서 부유함을 찾기보다는 창조력과 상상력과 자연 속에서 존재를 실현”하기가 있다.

이 말은 백 씨에게 어울리는 말인 듯싶다. 심플하게 살면서 음악이라고 하는 창조력과 상상력의 세계를 마음껏 누리니 그렇다. 비단 이런 삶은 예술가뿐 아니라 세인의 시선에서 좀 더 자유로운 평범한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매번 성능 좋은 새 핸드폰을 구입하고, 근사한 식당을 자주 찾아가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고 현대적인 것이지만 심플한 삶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낯설고 불편하다. 욕구를 몸에 맞추거나 외관적 기준에 맞추는 것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우리는 자주 복잡한 쪽을 선택하곤 한다.

삶과 생활의 모습이 심플한 백씨의 음악에 빠지면 우리들도 조금 더 심플해질 수 있을까. 하나의 패션 구도로서의 ‘심플’이 아닌, 마음과 몸이 친근하게 붙어사는 방식의 ‘심플’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마음이 동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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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과 은색의 필기구로 연신 사인을 하고. 가끔 사인을 청한 팬과 대화도 나누면서 1시간 가까이의 사인회를 가졌다. 이 날은 흰색 라운드 티 차림이었다. ⓒ 박태신


12월 14일, 7일간의 연주가 끝나고 백씨가 긴 사인회 시간을 가지는 동안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호젓한 ‘서울 예술의 전당’ 마당 위로 하얀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사각 램프등 여러 개가 얼기설기 모여 있는 가로등이 눈발 사이로 퍼져나갔다. 마음이 동해서 사인을 받으며, “저기 밖에 눈이 내립니다. 애쓰셨어요”라고 말을 건넸다.

눈발 속을 걸으니 행복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 그랬다. 저절로 흥겨운 흥얼거림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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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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