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계단을 쓰고 있는 두 집. 계단 뿐만 아니라, 대문 지붕까지 함께 쓰고 있다.
김대홍
담이나 창문은 간단한 안내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집 담엔 전 세입자 연락처를 적어놓았다. 우편물이 계속 오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적어 놓았다.
어느 가게 앞엔 월셋방 보증금과 월세를 적어놓았다. 그 밑엔 '외상사절'이란 글자도 적혀 있다.
또 다른 집 담벼락엔 '예수를 꼭 믿으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어느 벽엔 '우리 교회로 오라'는 큰 펼침막이 붙어 있다.
또 다른 벽엔 '○○ ♥ ○○' '○○○ ♥ ○○○ 400일'이라는 큰 스프레이 글씨가 쓰여 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사랑 구호다. 지나가는 길손에게야 재미있겠지만, 집주인은 불쾌할 것 같다.
창신3동 골목을 다니면서 명패가 참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 집은 나무로 만들었고, 어느 집은 돌로 만들었다. 손으로 직접 쓴 것도 있고, 새긴 것도 있다. 몇십 년 전엔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모두 똑같다. 한 회사가 만든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 사니, 명패는 크기나 재질이 똑같을 수밖에 없다. 점점 비슷비슷해지는 사회, 비슷비슷해야 안심할 수 있는 사회, 제각각인 골목동네는 환영받기 힘든 세상이다.
우리나라 제봉 역사 시작한 곳, 지금은 사양길

▲요즘 창신동에선 객공팀을 많이 쓴다. 객공팀은 일이 있을 때만 잠깐 일한다.
김대홍
언덕을 내려오니 소규모 제봉업체들이 많이 보인다. 건물 앞마다 쓰고 남은 헝겊 조각들이 잔뜩 쌓여 있다. 만든 옷가지를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들로 길이 분주하다.
재봉하는 집마다 '하청 구함, 객공팀 구함'이라고 붙여 놓았다. '객공'이란 임시로 고용한 직공이다. 일거리가 없으니 정규직을 쓸 수 없는 것이다.
중국산 싼 제품이 밀려들어 오면서 창신동 직공들이 만든 제품은 점점 가격 경쟁력을 잃고 있다.
싼 물건을 사는 게 현명한 소비라고 한다. 그 결과 싼 물건을 팔 여력이 되는 할인점과 대형 가게들만 더 늘고 있다. 더 싸게 물건을 만드는 중국산 제품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싼 물건을 꾸준히 공급하기 힘든 영세업체들은 자리를 잃고 있다. 과연 싸게만 사는 게 현명한 소비일까.
창신2동과 왕산로 북쪽 창신1동 쪽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는 집들이 여러 곳 보인다. 세트장 같은 느낌마저 드는 이발소, 장작을 때는 80년 된 한증막집, 55년 외길 구두수선집, 3대를 이어온 50년 전통 손바느질집, 40년 전통의 맛 냉면집, 간이오락기를 여러 대 갖춘 문방구 등.

▲창신동에 있는 이발소
김대홍

▲문방구에 있는 간이 오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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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오락기가 여러 대라는 것은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일 터. 동네를 다니는 동안 PC방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문방구와 문방구 오락기는 쉽게 눈에 띄었고, 그 앞에 항상 여러 명이 오락을 하거나 대기 중이었다.
시골 읍면에 가도 PC방이 쉽게 뜨이는 요즘, 문방구 오락기가 이처럼 인기를 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묘하다.
어린이 오락 시장에서 PC방은 이미 대세가 된 지 오래다. 문방구 오락기는 벌써 추억이 돼 버렸다. 대세를 거부한 것인지, 대세를 따라갈 수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곳만큼은 '골방 오락'이 아니라 '거리 오락'이 살아있다.
낡은 담에 페인트를 칠해 예쁘게 단장을 한 집도 있다. 주위가 환해 보인다.

▲시멘트 담장이 삭막할 것 같지만,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이처럼 예쁘게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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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이 살던 집. 지금은 국밥집과 호프집으로 쓰이고 있다.
김대홍
화가 박수근이 10년 넘게 산 집이 창신동에 있다. 지금은 국밥집과 호프집으로 쓰이고 있다.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이 곳이 박수근이 살았던 집이라는 것을 누구도 알 수 없다.
박수근이 그린 작품을 몇 십억원에 사고, 그를 '대한민국 최고 화가'로 칭찬하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이처럼 방치돼 있다. 역사에 획을 그은 선배들에 대한 대우가 이렇다.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 중 한 명인 여운형의 집은 지금 칼국수집이고, 화가 이중섭이 살던 집은 서당으로 쓰이고 있다.
박수근이 10여 년 동안 산 집, 지금은 국밥 파는 곳창신동은 이색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네팔·인도거리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 중 네팔·인도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과 관련 가게들이 여러 곳 모여 있기 때문이다.
한글로 '겅가 저무나(ganga Jamuna)'라고 이름을 붙인 네팔·인도 레스토랑은 우리나라 사투리 느낌이 난다. '겅가'는 갠지스강을 뜻한다. 저무나는 갠지스강 최대 지류다. 갠지스강은 인도 사람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강이다. 뜻을 모르면 아무리 성스러운 곳도 우스꽝스러워지기 쉽다.
창신동은 중국거리로 불러도 됨 직하다. 창신동 시장과 동대문 옆 곳곳에선 중국 음식점들이 흔하다. 양고기 구이집이 많다. 동북지방·사천지방 요리라고 특정 지방을 내세운 곳도 있다. 중국요리 재료를 파는 중국식품점도 군데군데 보인다. 심지어 중국 교포방을 전문으로 하는 부동산도 있다.
창신동 시장은 크기는 작지만 옛 재래시장 맛을 느끼고 싶다면 가 볼만하다. 지붕을 덮고 길을 넓힌 대부분 재래시장과 달리 이곳은 아직 옛 모습을 거의 지니고 있다.

▲창신동 문구완구거리. 100곳이 넘는 가게가 모여 있다.
김대홍
여기서 동대문운동장 방향으로 길을 건너면 완구·문구거리가 나온다.
100여개가 넘는 가게가 밀집한, 서울에서 가장 큰 완구문화거리다. 길 입구가 벌써 '놀이감길'이다. 놀이감길로 들어가면 다시 문구길이란 이름이 붙은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가게들을 볼 수 있다.
성탄절을 앞둔 주말 그 곳은 부모와 아이들로 흥청거렸다. 자전거를 끌고 지나치기가 버거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이 곳 거리의 장점은 아무래도 종류가 많다는 점과 값이 싸다는 점, 일반 문구점에선 보기 힘든 기발한 물건들이 있다는 점이다.
산타 옷을 비롯, 산타 모자, 크리스마스 트리 등 성탄절 물건을 비롯 동물 모자, 동물 쿠션, 동물 필통, 수면 양말, 어린이 스키복 등을 팔고 있다. 어린이들이 쓸 만한 것은 거의 다 다루고 있다.
이번 성탄절을 앞두고 나온 물건 중 하나가 산타 6종 선물세트. 예쁜 장화·연필·자·지우개·연필 깎기 등을 넣고 1000원에 팔고 있었다. 그런데 다섯 개 물건을 넣어놓고 '6종 선물세트'라고 이름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 개국과 함께 만들어진 동네, 곳곳이 역사 현장

▲낙산 정상에서 바라본 창신동. 오른쪽이 창신3동. 멀리 동대문 패션상가인 밀리오레가 보인다.
김대홍
창신동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성부 행정관할 구역을 정할 때부터 있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랜 동네다. 당시 한성부 방 가운데 인창방과 숭신방에서 한 글자씩 따서 1914년 동명 개정 때 창신동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런 만큼 동네 곳곳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창신1동 82번지 일대는 연못이 있고 정자가 있었다 해서 정자동이다. 연못은 동지(東池)였다. 서대문 밖 서지, 남대문 밖 남지와 함께 연꽃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창신1동 276 일대는 개천 위에 쪽나무를 놓은 다리가 있었다. 창신2동 입구는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많아 홍숫골이라 불렸다. 인근 동네는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인숫골이란 이름이 붙었다.
창신 1동과 2동 사이에 있는 왕산로는 기동차가 다녔던 길이다. 전차가 동대문에서 끝나면 여기서부터 청량리까지는 기동차가 다녔다. 전차가 전기로 움직인 데 비해, 기동차는 디젤엔진으로 움직였다. 동묘역 뒤쪽으로 '기동차길'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어 이곳이 과거 기동차길임을 증명한다.
1969년 세운 삼일시민아파트 중 일부도 창신동에 있었다. 이제는 흔적조차 없다. 가난의 흔적이야 지워야겠지만, 지워지는 게 가난만은 아닌 듯하다.
서울특별시는 올해 4월 30일 '서울특별시고시 제2007-118호'를 통해 창신동 583-3번지와 숭인동 55-2일대(창신 제 1, 2, 3동과 숭인 제1동 일대)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했다.
덧붙이는 글 | 창신동을 구경하면 자연스레 동묘 노점거리로 이어진다. 동묘 노점거리는 과거 황학동 벼룩시장이 번성할 때 그 영역 안에 있었던 곳이다. 지금 청계천변에 있던 황학동 벼룩시장은 사라지고, 동묘 노점시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공간 흐름으로는 동묘와 노점거리를 소개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동묘 노점거리는 숭인동 편에서 따로 다룰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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