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밝고, 아름답고, 따뜻했던...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27]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에서 아스토르가까지

등록 2007.12.25 12:25수정 2007.12.2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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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저택 작지만 아름다운, 나를 바르셀로나로 날려보낸 집. ⓒ JH



2007년 7월 14일 토요일, 날씨 맑음, 순례 22일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에서 아스토르가까지, 16km.
오전 7시 10분 출발, 오전 11시 30분 도착.



절로 여유로운 마음이 드는 아침이다. ‘다음 마을까지 (겨우) 16킬로미터’라는 문구가 또렷하게 박혀있다. 이 정도면 굴러가도 되겠네, 자못 여유가 넘친다. 오만 혹은 교만인가. 식당에서 천천히 아침을 먹으며 미도리씨와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 것인지를 이야기했다. 어제는 무리했으니 오늘은 조금만 걷고 같이 점심을 해 먹기로 하고 목적지를 결정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짐을 다 챙기지 못해 조금 시간을 끄는 사이 그녀와 길이 틀어져 혼자 남고 말았다. 아마도 내가 먼저 출발한 줄 알았나보다. 어차피 길 위에서는 각자의 페이스대로 걷기 마련이다. 숙소에서 만날 것을 믿으며 신발끈을 다잡아 매고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빠져나와 흙길로 접어들 무렵,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긴장했던 것도 같다. 뒤를 돌아보니 일본인 순례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엊그제 레온에서 만난 지영씨에게 ‘친절한 일본 아저씨’ 얘기를 들었던 터라 혹시 그 분인가 해서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다른 분이다. 알고 보니 어제 같은 숙소에서 묵어 나를 보았다고 하신다. 왜 나는 기억을 못 하는지?

“그럼 미도리씨 아시겠네요? 어제 같은 숙소에 있었는데”, 물었더니 만나지 못했다 하시기에, 문득 숙소에서 눈에 불을 켜며 한국인을 찾았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난 항상 사람들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나의 일상에서처럼….

교토에서 온 쿠스씨는 프랑스 '르퓌(Le Puy)' 구간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했다고 한다. 프랑스 내의 순례 길은 얘기만 들었다고 했더니 스페인이 평지라면 프랑스는 오르내림이 잦아 더 힘에 부쳤다고 하신다. 숙소나 중간에 쉴 만한 마을을 찾는 것도 꽤 어려워 어떨 때엔 산 한가운데의 땅바닥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다는 이야기에 “저도 걷다가 길바닥에서 샌드위치 만들어먹고 그랬는데!” 하면서 웃었다. 만난 지 겨우 몇 분 만에 신기하게 이야기가 술술 풀리는 것이 아주 신기했다.


이야기 가운데 작은 안내판을 만났다. 도로를 따라 걷는 직선거리와 흙길을 따라 에둘러 걷는 선회구간에 대한 표지였다. “어느 쪽으로 갈 생각이예요?”, “단 몇 킬로미터라도 오늘은 직선이 좋겠네요! 어제 너무 무리를 해서요.” 우리는 계속 직진했다. 그리고 가끔 도로의 샛길을 따라 아슬아슬 걷기도 했지만 많은 길은 차로로부터 조금 떨어진 순례자들을 위한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길 위에서 우리는 카미노, 한국, 일본, 미래, 가족, 일, 믿음, 삶…, 이제는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정확하게는 내가 대부분의 시간 그 동안 말을 못해 한이 맺힌 듯(?)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고, 아저씨는 이야기들을 열심히 들어주셨다. 그동안 길 위에서 혼자 늘어놓던 생각들을 아저씨와 만나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게 만난 분이었다. 나는 이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삶이 순례와 닮았다면, 매일은 특별할 것 없는 반복의 이어짐이지만, 그 안에서 반짝이는 작은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만나는 기쁨이 아닐까요?”

아버지뻘 되는 어른에게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되지도 않는 일본어로 얼마나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길 위에서 주워 담았던 작은 깨달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을 들으려는 마음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보다 순례자의 공감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이, 국적, 언어, 성별이나 주머니 사정, 종교 등의 서로를 가르고 구분 짓는 범주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순례자’라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모아지는 길,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기적이다.

쉼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길을 걷다, 문득 쿠스씨는 잠시 쉬었다 가겠다고 말씀하신다. 사하라씨와도 닮은 모습이라 익숙한 느낌에 웃으며 먼저 천천히 가겠다고 말하고 길 위에 올랐다. 길 위에서 가끔 느끼는 도약하는 감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마치 바람을 따라 걷는 것처럼, 구름에 실려 떠 가는 것처럼…, 그러나 갑자기 너무 급히 걸었던 탓인지 쉬이 피로감이 몰려와 언덕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20분 정도를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또 감상을 적으며 눈앞에 펼쳐진 아스토르가를 바라보았다. 붉은 지붕이 점점이 이어지는 마을의 분위기가 온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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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가를 바라보며 도시 초입의 쉼터에서 ⓒ JH



“여기 있었군요! 먼저 간 줄 알고 걱정했어요.”

그리고 다시 못 만나게 되면 어쩔까 아쉬우셔서 걸음을 재촉하셨다는 아저씨를 만났다. 그 말씀이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나 역시도 좋은 순례의 벗을 두고 급할 것도 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아스토르가의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 앞으로의 순례계획을 나누기도 했다. 스페인의 대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이자 박물관이 이곳에 있다고 하시기에 괜히 관심이 동했다. “저도 꼭 가 봐야겠어요” 하며 집 이름을 적어두었다.

7월 25일, 산티아고 성인 축일 내로 순례를 마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쿠스씨는 가지고 있는 프랑스어 가이드북에 계획 등을 꼼꼼하게 포스트잇으로 정리해 두고 있었다. 오늘은 오전 중에 아스토르가를 지나쳐야 할 것 같다고 하신다. 각자 계획을 정리한 후 다시 짐을 둘러메고 걷기 시작했다.

한 발짝씩 아스토르가는 가까워졌다. 멀리 삐죽 솟은 대성당의 첨탑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도시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길과 철길을 지나치자 어느새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나는 먼저 숙소에 짐을 풀기로 해서 왼쪽 길로, 쿠스 씨는 우체국을 찾아 오른쪽 길로 향해야 한다. 그리고 쿠스씨에게서 메일 주소를 받고, 인사를 전했다.

“당신이 앞으로 어른이 되어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대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내가 세 시간 동안 함께 걸었던 순례의 벗은 정말 맑고, 밝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마저도 그 기운을 나눠받은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쉬운 헤어짐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기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문득 내 메일을 전해드리지 못하고 돌아선 것이 아쉬웠다.

‘아스토르가(Astorga)'에는 총 두 개의 순례자 숙소가 있었다. 하나는 200여 침상이 넘는 거대한 숙소로 마을의 초입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마을 끝 대성당 근처에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사설 숙소였다. 내 발걸음은 이미 첫 번째 장소에 닿아 있었다. 침대를 받아 짐을 늘어놓고, 오늘은 별로 땀을 흘리지도 않은 것 같아 샤워를 미뤄두고 짐을 조금 챙겨 숙소를 나왔다.

숙소 앞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가지고 있던 빵과 과일을 조금 먹었다. 멀리 하늘 위로 제비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사하라씨가 떠올랐다. 제비와 음식 덕에 돌아다닐 기운이 났는지 시에스타 전에 가우디의 집이라고 하는 곳에 가 보고 싶었다. 그 곳은 대성당 옆에 붙어있어 마을을 가로질러 가야했다. 부서지는 햇빛과 분수대 옆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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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가 중심가 맑은 날씨, 분수와 아이들 ⓒ JH



순간 마을 광장 한쪽에서 익숙한 곡이 들렸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탱고 아티스트 피아졸라의 Oblivion, 망각이었다. 네 대의 관현악기가 만들어내는 절절한 음색은 눈부신 햇살 속에 한숨처럼 흩어져 곧 주위를 에워쌌다. 애절한 고음이 무딘 내 마음의 빗장을 열듯 파고들었다.

‘나는 잊기 위해 온 것일까, 대체 무엇을 잊기 위해서 이 땅에 서 있는 것일까, 잊을 수는 있는 것일까….’, mp3 player를 짐으로 보내고 난 후 참 오래간만에 듣는 음악에 감정이 움직였나보다. 이렇게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연주가 끝나고 나는 벤치에 기대어 한참을 연주자들이 떠난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잠깐 눈가가 시큰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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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livion 아스토르가 중심가 광장에서 울려퍼지던 음악소리 ⓒ JH



맑은 정신에 멋진 벗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해 아름다운 음악까지, ‘출발이 순조로운 걸’하며 마음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좋은 예감이다. 아마 오랜 시간 이곳에서의 하루를 기억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스토르가는 생각보다는 작은 도시로 숙소에서 가우디의 집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멀리서 보이는 뽀얀 돌담 벽에 얹힌 신비로운 파란 빛깔의 고깔모자 첨탑이 예사롭지 않았다. 건축이나 황금 비율에는 깜깜한 내가 보기에도 멋드러진 조형미였다. 어쩌면 나는 가우디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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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저택 정면 가우디 초기 작품, 네오고딕 양식 속에서 가우디의 재치가 군데군데 엿보이는 작품 ⓒ JH



'가우디 저택(Palacio de Gaudi)'의 정확한 명칭은 ‘Palacio Episcopal de Astorga’, 아스토르가 주교관사였던 이 건물은 현재 ‘길 박물관(Museo de los Camino)'이라는 이름으로 순례유물, 기타 역사적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에서 순례를 준비할 때에 마이동풍 격으로 넘긴 것 같다.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몇 유로의 입장료 앞에서 ‘이걸 들어가, 말아?’ 하며 셈을 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언제 다시 올 곳이랴 하는 마음으로 표를 사고 입장했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맨 위층으로 올라간 후 관람을 시작했다. 밝은 배경에 걸린 현대미술은 살짝 아마추어 티가 나는 무덤덤한 느낌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아래층부터는 가톨릭의 성물과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성체현시 시간에 제대에서 화려하게 빛나던 것이 ‘커스토디아(Custodia)'라는 이름이구나, 십자가와 조각, 순례유물들을 지나가며 어렴풋이 천 년 전의 순례자와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와 주교의 집무실에서 정면의 아기자기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오색찬란한 빛 속의 나무 책상과 붉은 융단의 의자를 보았다. 그 따뜻하고 온화한 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나에게 이곳이 순례 가운데 가장 사랑한 박물관 중 하나가 될 것이며, 가우디는 급기야 나를 (일정에도 없던!)바르셀로나로 향하게 할 것이라는 강한 사로잡힘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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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저택에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실내의 모습 ⓒ JH



꿈결인 듯 그 작은 집에서 한 시간 반을 지내다 왔다. 집 바깥의 세상은 이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곱게 정리된 집 주변 정원을 거닐며 탐스럽게 자란 자색 라벤더 향기를 맡기도 하고, 슬리퍼로 파고드는 바닥의 자갈에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같은 방을 배정받은 미도리씨를 만날 수 있었다. “아마 아시아 사람이라서 같이 넣어줬나 봐요.”

우리는 함께 상점으로 쳐들어가 시에스타에 쫓기듯 요리재료를 후다닥 카트에 집어넣어 값을 치르고 나와 부엌을 점령한 채로 닭가슴살 크림 파스타와 샐러드를 완성했다. 그리고 바지런히 부엌 옆 테라스에 접시들을 나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포크로 돌돌 말아 입안에 가득 넣은 스파게티는 약간 밋밋했지만 “건강에 좋겠죠?”,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먹었다. 등 뒤로 순례자들이 갓 빨아 널어놓은 양말들이 빨랫줄에 걸린 채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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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가 순례자숙소 파티오에서 나부끼는 순례자들의 양말 ⓒ JH



문득 몸이 근질근질해져 샤워며 빨래를 마치고 나니 다섯 시를 훌쩍 넘긴 시간, 대성당으로 향했다. 부르고스, 레온과 비교하면 소박했던 성당 안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고 제대에서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로 시작되는 작은 기도와 함께 화려한 조각들을 눈으로 좇았다. 묵주기도의 영광의 신비 가운데 성모승천과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심에 대한 묘사를 바라보며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쪽에서는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들이 기도를 주고받으며 이어가고 있었고, 배낭을 짊어진 순례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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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가 대성당 종탑 가우디 저택과 맞붙어 있다. ⓒ JH



성당을 나와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일곱 시에 근처 수도원에서 열리는 토요 특전미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미사를 마치고 여덟 시 반부터 시작하는 동네 음악회를 구경하기로 했다. ‘Oblivion'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잃어버린 반팔 티셔츠와 잿빛이 된 흰색 반바지를 대신할 새 옷 한 벌을 고심 끝에 사들고 부랴부랴 수도원으로 향했다.

처음 참석하는 수도원 미사에서 새 옷가지가 담긴 종이가방이 자꾸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문 발치에서 종이컵을 내밀며 자비를 구하던 단정한 옷차림의 걸인을 곁눈질로 흘깃 지나친 것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미사가 끝나고 무심코 돌아본 뒤편은 벽이 아닌 통로가 뚫린 봉쇄구역이었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저편에서는 검은 수도복의 수녀님들이 차례로 퇴장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연로한 수녀님을 부축하는 젊은 수녀님 한 분 외에는 모두 중장년의 수녀님들이었다. 문득 카리온에서 만난 바바라 수녀님이 들려주신 유럽 수도원의 고령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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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중입니다 아스토르가 내 수녀원 성당의 모습 ⓒ JH



토요일 오후의 아스토르가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굳게 걸어 잠군 채, 거니는 골목에서도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이 흔치 않을 정도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조금 묘한 느낌 속에서 음악회가 열리는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 세상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여기 모인 양 인산인해였다.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 속에서 마땅한 자리 하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두리번거린 끝에 맥주 한 잔 값을 치르고 테이블을 나눠 쓸 수 있었다.

악기의 튜닝 소리, 내게는 거칠기만 한 스페인어로 나누는 수다들 속에서 노트를 펼치고 이런저런 생각을 따라갔다. 걸은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내다본다. 그러고 보니 부쩍 요즘은 걸으면서 뭘 해 먹을까, 누구와 무슨 요리를 할까 등 음식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아침은 이렇게 먹고 점심은 이걸 요리하고 저녁은…, 내일의 삼시세끼에 정신을 빼앗긴 채로 테이블 위의 맥주를 들이켰다. 조금, 이상한데…?

어느새 음악회가 시작되고, 아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퍽 괜찮은 솜씨의 연주를 뽐냈다. 따뜻한 동네 학예회 같은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취기가 돌 즈음 해는 뉘엿뉘엿 서편으로 지고, 마을에 불이 하나 둘 켜진다. 10시 통금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 숙소로 걸어가며 기대했던 ‘Oblivion'은 들을 수 없었지만 좋은 시간이었다며 대신 콧노래로 듣고 싶었던 곡의 음조를 흥얼거렸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은 갈지자를 긋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20킬로미터, 염원하던 라바날이 눈앞에 잡힐 듯 아른거렸다.
#산티아고가는길 #스페인 #도보여행 #성지순례 #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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