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쓰고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

[서평]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

등록 2007.12.27 16:12수정 2007.12.2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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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레닌그라드로 명명되기도 했던 러시아 서북단에 있는 도시 상트페데르부르크에는 다섯 개의 역이 있다. 바르샤바 역, 바로셀로나 역, 모스크바 역, 페트로파브로프스크 역 그리고 핀란드 역이다. 이는 특이하고 일목요연하게도 종착지 이름을 따서 역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스위스 취리히의 낡고 음습한 방 한 칸에서 아내 나듀사와 함께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레닌은 조국 러시아가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기차를 타고 독일을 거쳐 스웨덴에 이른 후 사슴 썰매로 바꿔 타고 국경을 넘어 핀란드에 이른다.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탄 레닌은 러시아의 도시 상트페데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을 향한다. 이후로부터 6개월, 레닌은 북극 도시의 백야가 진행되는 동안, 사회주의 혁명의 꿈을 달성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 <핀란드 역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향하여 달렸던 기차들’이란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10여 명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쥴 미슐레는 <프랑스혁명사>의 저자이다. 그는 ‘영국은 제국이고 독일은 민족이며 프랑스는 개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프랑스의 사상가로서 예수를 인간화한 저서 <기독교의 기원>을 남겼다. 아폴리트 텐은 평론가였고 아나톨 프랑스는 작가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가시적으로 나타낸 인물은 그라쿠스 바뵈프였다. 그는 법과 신분의 평등은 물론 교육과 취직의 기회 균등, 토지 사유의 제한, 생산물과 배당 분배의 국가 관리와 재산의 평등을 주장했다. 생시몽과 샤를 프리에는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였고 로버트 오언은 영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이후 사회주의 연구와 운동의 주도권은 독일로 넘어간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페르디난트 라살 등은 독일인이었다. 다음으로 사회주의는 러시아에서 한층 구체적으로 현실화된다. 미하일 바쿠닌은 러시아의 혁명가 겸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리고 레닌과 트로츠키도 우리가 알고 있듯이 러시아 사람이었다.

 

이 중 핵심 인물은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과 트로츠키 4인이다. 이 책에서는 이 네 인물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한편 레닌이 핀란드 역에 도착할 당시 스탈린은 <프라우다> 지의 편집진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오래 전 이 책을 읽으려 하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부분 번역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완역본이 나와 모처럼 책 읽는 재미를 누리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완역자 유강은에게 감사한다. 에드먼드 윌슨이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 저작한 이 책은 700쪽 분량으로 방대한 편이다. 서문을 쓴 루이스 매넌드의 말대로 이 책은 ‘위대한 책은 아닐지언정 훌륭한 책’임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의료와 교육 정도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리고 가끔 토지가 사유화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은 이런 주장들을 최초로 세상에 공표한 선언문이 아닐까 한다.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는 실업과 추위, 비참함과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한쪽에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궁핍이, 또 한쪽에는 견딜 수 없는 노동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이 서글픈 대비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났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인간의 천한 감정인 시기의 산물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이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의 산물이다. - 레옹 블룸(1872~1950)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역 핀란드 역을 향해 질주했던 사람들의 불꽃 같은 삶이 담겨 있는 이 책은 사회주의가 이제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의 탐욕성 혹은 경박성을 일깨우기도 한다. 역사에서 소멸한 것은 스탈린 식의 사회주의 독재일 뿐이다.

 

혁명가들은 대체로 선량하고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과격하다고 알려진 바쿠닌은 말년에 고향 러시아가 그리워 눈물지었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듣고는 감동한 나머지 ‘세상은 사멸해도 <9번 교향곡>은 영원하리라’고 선언했다. 한편 초인적으로 실천적이었던 비범한 인물 레닌도 장모의 약을 구하기 위해 취리히 시내 곳곳을 뒤졌고 <열정>소나타를 듣고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 위대한 곡을 매일 듣고 싶다’고 토로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선량한 심성과 예술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종교였다. 

 

누가 뭐라 한대도 역시 위대한 사회주의자들에게 공통되는 미덕은 오롯이 남아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일부러 전락시키는 대가로 자기들끼리의 배를 불리는 착취자들에 대한 분노이며, 출생과 소득차에 근거를 둔 계급적 특권을 없애야 한다는 열정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의 신자유주의는 한 치도 인간다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심지어 합리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생겨날 지경이다. 물신이 지배하고 있는 이런 타락한 현실에서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려다 순수하고 처절하게 좌절한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역설적으로 더 의미 있다. 마치 인문적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인문학이 더 필요해지는 것처럼 사회주의적 가치가 백안시되는 시대일수록 사회주의적 정신이 더 요긴해진다고 할 수 있겠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 <정화된 밤>에 올린 글입니다.

2007.12.27 16:12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제 블로그 <정화된 밤>에 올린 글입니다.

핀란드 역으로 -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

에드먼드 윌슨 지음, 유강은 옮김,
이매진, 2007


#핀란드역으로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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