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교실에서 더듬어본 '교과서의 일생'

찢겨진 교과서, 공부에 찌든 아이의 모습은 아닐는지

등록 2007.12.28 15:35수정 2008.01.0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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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교과서가...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새 교과서가 아이들에게 배포됩니다. ⓒ 서부원


아이들과 함께 한 1년이 또 그렇게 저물고 있습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두 달 동안 교실은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그리워하며 휑하니 비어 있게 될 겁니다. 기나긴 방학 동안 ‘주인 떠난’ 학교에는 선생님들만 들락거리게 되겠지요.


교실 벽에 반쯤 찢긴 채 걸려 있는 2007년 달력도 낼모레면 폐지함으로 들어갈 테고, 책상과 의자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실 바닥 여기저기에는 이제 수명을 다한 교과서들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한때는 구겨질까 더러워질까 조심 또 조심하며 마음 설레게 했던 친구였는데.

교과서만큼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잘 보여주는 물건도 없습니다. 기실 학교생활의 시작은 입학식이 치러지는 때가 아니라 교과서를 받게 되는 순간입니다. 참고서나 문제집이 교과서 구실을 하는 요즘에는 보기 힘든 정경이지만, 아이들은 새 교과서에 포장지나 비닐 등으로 정성스럽게 ‘옷’을 입히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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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거쳐... 책 옷도 입히지 않은 채 가방으로, 사물함으로, 또 책상으로 떠돌아다니다가 가장자리가 헤지고 찢겨져갑니다. ⓒ 서부원


새로운 학년의 첫 번째 수업 시간. 교과서 첫 장을 펼치면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이 저절로 생겨났고, 선생님의 설명이 왜 그리 또렷하게 들리고 이해가 잘 되던지. ‘이렇게 공부하다간 1등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며 괜시리 설렜던 기억도 납니다.

칠판 위 색분필로 밑줄 그어진 글자에 눈이 맞춰지고,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고 교과서에 그대로 옮겨 적으려 애썼습니다. 칠판 위의 ‘작품’은 그 어떤 글씨보다도 뛰어났고, 목소리는 그 어떤 가수의 노랫소리보다도 멋졌습니다.

수업에 취하다 보니 시간은 쏜살과도 같았습니다. 50분이 50초처럼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은 기술의 단계를 넘어 ‘예술’이었습니다. 과제를 내주지 않아도, 굳이 공부하라며 다그치지 않아도, 집에 가면 알아서 복습과 예습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공부가 가장 재미있는’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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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롱까지 당해가면서... 2학기가 끝나갈 즈음이면 교과서가 이렇듯 푹신푹신한 배게가 되어 아이들의 휴식을 위한 도구로 진화(?)합니다. ⓒ 서부원


교과서를 한 권 집어 들었습니다. 가장자리가 많이 헤진 채 곳곳에 낙서 자국이 보입니다. 억지로 그리 한 건 아닐 테지만, 어떤 것은 갈기갈기 찢겨진 것도 있고, 낱장을 일일이 구겨놓아 이불마냥 부풀어 오르게 한 것도 있습니다.

책을 펴고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펜 자국 대신 갖가지 오물이 묻어 있는 것, 알아볼 수 없는 낙서만 돼 있는 것, 아예 만화나 그림책으로 변한 것 등 공부한 흔적을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다른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과서의 ‘처참한 최후’에는 공부에 지칠 대로 지친 아이들의 솔직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생명이 없는 것이라지만,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동안 늘 곁에 두었던 ‘친구’로서 고맙고 애틋한 마음이 들 법도 하건만, 그저 쓰고 내다 버리는 허드렛 물건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로 너나 할 것 없이 공부를 꼽는 요즘 아이들에게, 공부란 ‘학습 노동’일 뿐입니다. 하긴 학교에서, 학원으로, 또 독서실로 이어지는 팍팍한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공부가 즐거운 일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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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는 이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헤지고, 찢기고, 조롱당하며 버텼던 교과서의 짧은 생은 이렇게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마감됩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만큼 가엾은 존재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 서부원


학습 노동에 지친 불쌍한 영혼들은 쉬는 시간, 점심시간 등 자투리 시간만 나면 책상에 엎드려 자기 일쑤고, 이제는 더 이상 수업의 ‘질’을 따져 묻지도 않습니다. 외려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자습하자’라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낱장을 일일이 구겨서 부풀게 한 교과서는 아이들이 ‘베개’의 용도로 착안한 것이랍니다.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아예 줄곧 잠잘 생각으로 학교에 등교하는 셈입니다. 힘들게 한 해를 보낸 지금, 아이들은 교과서에 화풀이(?)를 하며 ‘짧은 일탈’을 즐기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내다버린 ‘헌’ 교과서가 폐지함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가운데, 내년에 배울 ‘새’ 교과서가 아이들에게 나눠졌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두꺼운 펜으로 자기의 이름을 또박또박 책 표지에 적는 등 애지중지하는 모습입니다.

새 학년을 맞는 기대와 설렘만큼 당분간 교과서도 대우를 받을 테지만, 다시 내년 이맘때쯤이면 또 그렇게 찢기고 버려지는 ‘폐지뭉치’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도 어색하지도 껄끄럽지도 않은 ‘교과서의 평범한 일생’입니다.

지금도 수명을 다한 채 아이들로부터 버림 받은 교과서들이 들것에 실려 쓰레기 분리수거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겨울방학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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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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