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의 여왕'이 사랑했던 벨기에 탐정

[불멸의 탐정들 15] 에르큘 포와로

등록 2007.12.28 17:44수정 2007.12.2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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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즈 저택 괴사건> 에르큘 포와로가 데뷔하는 작품 ⓒ 동서문화사

애거서 크리스티는 평생동안 60편이 넘는 장편추리소설을 발표했다. 그 소설들을 발표 연도로 분류해 보면, 193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년대에 애거서 크리스티는 무려 15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흔히 '여행시리즈'라고 부르는 작품들, <오리엔트 특급살인> <메소포타미아의 죽음> <나일강의 죽음> <구름속의 죽음> 등도 모두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1930년에 중동지방을 여행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한 고고학자를 만나게 되고, 그해 9월에 그와 결혼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에게는 두번째 결혼이었다.

이 결혼이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안정된 생활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30년대에 애거서 크리스티는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게 되고, 그 작품들은 대부분 걸작으로 꼽힌다.

그리고 3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 중에는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다. 1930년대는 애거서 크리스티에게도, 그녀가 창조한 탐정 에르큘 포와로에게도 전성기였던 셈이다.

에르큘 포와로가 데뷔하는 작품은 1920년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이다. 이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첫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에르큘 포와로는 1975년에 발표한 작품 <커튼>에서 사망할 때까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작품들에 등장한다.

영국으로 망명온 벨기에 출신 탐정 포와로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 에르큘 포와로의 신상을 간략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전쟁을 피해서 영국으로 망명온 벨기에인이다. 벨기에에서 오랜 세월동안 경찰 일을 했었고, 이제 그 재능을 살려 영국에서 사립탐정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는 않다. 전쟁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국인들은 외국인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에르큘 포와로를 보고 '빌어먹을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노인도 있다. 에르큘 포와로는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수사하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사람들이 전폭적으로 협조하더라도 사건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판국에, 에르큘 포와로는 또다른 태생적인 어려움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포와로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영국인 '아더 헤이스팅스' 대위가 바로 그 사람이다. 헤이스팅스는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송환된 인물이다. 언제나 탐정이 되고 싶어했지만, 그러기에는 재능이 부족한 인물이기도 하다.

헤이스팅스는 벨기에에서 우연히 포와로를 만나게 되고 사건을 해결하는 포와로의 능력에 한눈에 반하게 된다. 그때부터 헤이스팅스는 포와로의 추종자이자 충실한 친구로 변신한다. 포와로가 영국으로 건너와서 적응할 수 있었던 것에는 아마 헤이스팅스의 도움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 헤이스팅스는 다시 포와로와 만나게 된다. 포와로는 약 163cm 정도의 키에 통통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 헤이스팅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집이 작고 기묘하게 생긴 사람'이다. 달걀 모양의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다리를 절고 있지만 옷차림은 언제나 깨끗하다.

이것은 정리정돈을 잘하는 포와로의 습관과도 연관 있을 것이다. 포와로는 항상 자신의 주변을 깔끔하게 정돈해둔다. 포와로가 다른 사람을 가리켜서 '질서정연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다. 포와로는 포도주를 좋아하지만 맥주는 마시지 않는다.

작고 통통한 체격에 뛰어난 두뇌를 가진 포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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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에르큘 포와로의 활약, 그리고 서술트릭의 묘미 ⓒ 동서문화사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포와로의 외모는 우스꽝스러운 편에 속한다. 처음에 그를 보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다.

영국인들에게는 포와로(Poirot)라는 이름 자체도 발음하기 힘들다. 그 이름의 철자를 보고 '포르트'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법. 우스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포와로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다. 벨기에에서 활동할 당시에 포와로는 그 좋은 머리를 이용해서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해결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살인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는 '나는 당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건 의뢰를 거절하기도 한다.

포와로는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포와로가 낯선 존재이지만, 이때 이미 런던경시청에서도 포와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전에 벨기에에서 함께 사건을 수사했던 런던경시청의 재프 경감이 포와로를 인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 이방인이었던 포와로가 사건수사의 가운데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재프 경감이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이후로 에르큘 포와로는 영국에서 수많은 사건들과 마주하게 된다. 포와로는 영국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호박을 재배하는가 하면, 휴식을 위해서 이집트와 중동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면 우연하게도 에르큘 포와로가 가는 장소마다 기이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도 제각각이다.

나일강을 유람하는 배 안에서 사건이 발생하거나, 파리를 떠나서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살인사건이 터지기도 한다. 이스탄불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특급열차에서 변사체가 발견되기도 하고, 바그다드의 한적한 저택에서 의문의 죽음이 생겨나기도 한다.

회색 뇌세포를 이용해서 사건을 추리하는 포와로

이때마다 포와로는 특유의 추리력을 동원해서 하나씩 사건을 해결한다. 포와로의 주위에는 헤이스팅스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그와는 관계없이 포와로의 수사방법은 늘 일정하다. 포와로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모든 정보를 끌어모은다. '사건수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포와로는 또 '범죄를 수사할 때, 외부에서 증거를 찾아내려고 하면 안돼'라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적 증거가 아니다. 물적 증거가 발견되면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만, 거기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포와로는 그보다 조용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포와로는 늘 '회색 뇌세포'를 강조한다. 모든 정보를 끌어모은 이후에 의자에 앉아 회색 뇌세포를 이용해 사건의 전모를 추리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제아무리 잘난 에르큘 포와로라고 하지만, 그도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포와로는 조용히 방에 앉아 트럼프 카드를 꺼내서 그것으로 집짓기 놀이를 한다. 카드를 한 장씩 세워 올리면서 카드 건물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카드로 건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그리고 두뇌의 섬세함은 손가락의 섬세함과 병행한다. 포와로는 항상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마치 유아기로 퇴행한 듯한 자신의 '집짓기 놀이'에 대한 변명을 한다.

그는 사건을 해결할 때 정황과 자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들이대서 용의자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포와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좀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사건해결에 필요한 추리가 완성되면, 그는 연관된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주위로 불러 모은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추리과정을 일일이 연설하듯이 들려준다. 대부분의 탐정이 그렇듯이 포와로 또한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두뇌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때문에 그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거의 언제나 마지막 장면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연극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정황증거를 꺼내면서 범인을 지목한다. 물론 완벽한 물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때쯤 되면 범인의 반응은 두 가지 중에 하나다. 흥분해서 포와로에게 달려들든지, 아니면 자포자기 상태가 돼서 순순히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는 것이다.

스타일즈에서 마지막 사건을 쫓는 늙고 병든 포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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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 ⓒ 황금가지

이런 방식으로 포와로는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한다. 수십년 동안 벨기에와 영국, 프랑스 그리고 시리아와 바그다드, 나일강을 넘나들면서 온갖 사건들과 마주친다. 그가 언제나 살인자들을 응징한 것만은 아니다.

포와로도 때로는 살인자들의 입장을 동정해서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기도 한다. 사건을 미해결인 상태로 놓아두는가 하면, 자신에게 협조(?)해준 살인자에게 또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포와로의 마지막 작품은 <커튼>이다. <커튼>에서 포와로는 자신이 데뷔했던 무대인 스타일즈 저택으로 돌아온다. 이때는 스타일즈 저택도 그리고 포와로도 변해 있었다. 스타일즈 저택은 현대식 여관으로 탈바꿈했고, 에르큘 포와로는 늙고 병들어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병 때문에 머리털은 모두 빠졌고, 한때 통통했던 체격은 비쩍 마르고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다. 팔 다리를 마음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의 두뇌만큼은 예전처럼 살아 있다. 겸손하지 않은 그의 스타일도 여전하다. 포와로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스타일즈 여관에서 보내며 마지막 사건을 위해 헤이스팅스를 자신의 곁으로 부른다. 이미 늙어버린 두 친구는 이곳에서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죄자를 상대로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커튼>이 발표된 것은 1975년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커튼>을 쓴 것은 1940년대 중반이라고 알려져 있다. <커튼>은 아마도 에르큘 포와로에 대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언장 같은 것 아니었을까. 부유한 사람들이 한창 시절에 자신의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두는 것처럼, 그리고 그 유언장은 사망 이후에 발표되는 것처럼, <커튼>도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신의 작품 활동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했던 탐정 에르큘 포와로의 죽음을 미리 마무리해 두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사망하기 전해인 1975년 <커튼>이 발표된다. <커튼>이 발표되고 나서 미국의 일간지 <뉴욕 타임스>에는 '벨기에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 사망'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에르큘 포와로가 사망하면서, 탐정이 전성기를 누리던 추리소설의 한 시대도 끝나게 된다.

'헤이스팅스, 우리는 다시 함께 사냥하지 못할 걸세.
이보게, 우리가 처음 사냥을 했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사냥도...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어.
그렇다네,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지.'


- 에르큘 포와로 -

스타일즈 저택 괴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인영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2003


#추리소설 #에르큘 포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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