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에서 보낸 '보람찬' 크리스마스

[기자체험기] 태안 사고 현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등록 2007.12.29 12:18수정 2007.12.2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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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크리스마스는 다른 여느 크리스마스보다 기대가 컸습니다. 지난 2006년에는 대학입학 원서를 썼었고, 앞선 2005년에는 독서실에 갔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2007년 크리스마스에는 태안 방문입니다. 호화로운 서울 명동거리가 그립다고 투덜댔지만 사실 그리 섭섭하진 않았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야말로 제대로 사랑을, 축복을 실천하고 온 듯한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12월 25일 방문한 태안은 크리스마스 트리도, 캐롤도 없었습니다. 대신 2만 명의 산타들이 모여 사랑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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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추운날씨와 쌀쌀한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한 자원봉사자가 기름을 닦아내고 있다. ⓒ 신승호

▲ 태안 추운날씨와 쌀쌀한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한 자원봉사자가 기름을 닦아내고 있다. ⓒ 신승호
[AM 7:00] 태안행 고속버스 모두 매진

 

첫 시작이 그리 순탄하진 않았습니다.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달려간 동서울터미널은 시간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표가 모두 매진입니다.

 

광주ㆍ부산과 같은 대도시 버스도 사람을 다 못 태워 빈 버스로 가는 것과 사뭇 대조적입니다. "요즘 태안가는 표가 때아닌 성수기라 예매하지 않곤 제 시간에 구하기 어렵다"고 티켓판매원 언니가 살짝 귀띔해 줍니다.

 

부랴부랴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합니다. 이곳 역시 마찬가집니다. 혹여나 하고 간 남부터미널 역시 표가 없습니다. 서울 내 3개의 고속버스터미널을 돌아도 표가 모두 매진입니다.

 

예매하지 못한 내가 후회스럽다가도 태안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의 걸음이 뿌듯해 웃음이 납니다. 3시간 후에 출발하는 오전 10시 10분 티켓을 겨우 끊었습니다. 드디어 태안으로 향합니다.

 

[PM 12:20] "아, 주민들은 좀 기다렸다 타~"

 

태안으로 도착하니 만리포 해수욕장으로 가기 위한 봉사자들이 긴 줄로 늘어섭니다. 봉사자들의 요금은 모두 무료입니다. 눈으로 쓱 봉사자 명단을 훑어보니, 대부분이 대학생입니다. '경쟁사회'ㆍ'88만원 세대' 같은 암울한 말이 대학 사회를 걱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따뜻함이 더 많이 살아있나 봅니다.

 

버스가 도착합니다. 예상대로 버스는 만원입니다. 앉아 계시던 한 태안 주민은 우리의 짐을 대신 들어주시고선, 연방 고맙다는 말을 하십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는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감사의 플래카드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만원인 버스는 가는 길에 기다리는 주민을 다 태우지 못합니다.

 

버스 내에서 자원 봉사자들이 걸어가고 주민들을 태우자는 의견이 나옵니다.

 

"아, 주민들은 좀 기다렸다 타여~ 얼마나 고마우신 분들인디~"

 

주민들도, 봉사자들도 모두 가슴이 훈훈해집니다.

 

[PM 1:00] 펜 대신 찢어진 찜질방 바지를

 

만리포 해수욕장에 내립니다. 여기가 사고 현장이란 걸 말해주듯 기름 냄새가 진동합니다. 나의 임무는 '봉사'보다 '취재'에 더 가까웠기에 마스크에 면 장갑만 낀 채, 펜과 종이를 들고 해안가로 향했습니다. 

 

사실 태안을 방문하기 전 기자의 생각은 그랬습니다. 그렇게 많은 봉사자가 왔다갔다는데 이제 기름은 많이 보이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자와 마주한 첫 파도는 기름을 잔뜩 싣고 옵니다. 시꺼먼 기름 찌꺼기가 바로 기름 볼이랍니다. 옆의 한 아이가 큰소리로 "무지개 빛 바다"라 말합니다. 기름 띠 두른 태안의 바다는 더 이상 초록 빛 바다가 아닙니다. 기름이 햇빛에 반사돼 무지개 빛을 띠거나, 기름 찌꺼기가 떠내려 와 검은빛을 띨 뿐입니다.

 

도저히 그저 펜만 들고 왜 여기 봉사하러 왔는지를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기사가 펑크 나도 내 눈앞의 시커먼 바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름을 닦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방제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고무장갑을 끼고 선 다시 바다로 향했습니다. 모래사장에 묻어있는 기름 볼을 닦고, 시커먼 바위를 닦았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합니다.

                              

[PM 1:40] 태안에서 보내는 보람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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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채 분주하게 일한다. ⓒ 신승호

▲ 태안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채 분주하게 일한다. ⓒ 신승호

함께 봉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옆 사람과 말도 술술 풀립니다.

 

한 학생 커플을 만났습니다. 정다슬(자연대ㆍ자연과학부 07)양과 김종서(연세대ㆍ경영학부 07)군입니다. 크리스마스인데 왜 재밌는 곳에 놀러가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사람 북적이는 명동보다 여기가 훨씬 보람되고 뿌듯하다"는 마음 착한 커플입니다.

 

특히 여수가 고향이라는 이 커플은 95년 씨프린스 사고가 생각 나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때는 초등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라 봉사를 할 수 없었지만 그 사고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기에 태안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네요.

 

그 걸 증명하듯 그들은 아침 8시 30분부터 벌써 5시간 째 봉사를 하는 중입니다. 특히 정양은 아버지가 정유회사에 다니기에 평소 기름 냄새 맡으며 일을 하실 아버지 생각도 많이 난다고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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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자원봉사를 위해 나온 부모님을 따라 많은 아이들이 태안을 찾았다. ⓒ 신승호

▲ 태안 자원봉사를 위해 나온 부모님을 따라 많은 아이들이 태안을 찾았다. ⓒ 신승호

곳곳에 아이들도 눈에 띕니다. 부모님과 함께 맛있는 것 먹고, 놀러가는 대신 태안을 택한  아이들. 하선욱(서울시ㆍ양천구 12)양도 그런 아이들 중 한 명입니다.

 

하양은 뉴스를 보고 자신이 직접 부모님을 졸라서 이곳에 왔답니다. 힘든 표정보다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고사리 같은 손이지만 그 손이 태안을 맑게 하고 있습니다.

 

하양이 부모님과 함께 큰 바위를 닦을 거라며 방조제 쪽으로 가보겠다고 일어섭니다.

 

가는 길에도 기름을 흡수하라고 깔아놓은 볏짚을 꼭꼭 밟으며 지나갑니다. 볏짚은 밟아줄수록 더욱 기름을 잘 흡수하게 됩니다. 가는 뒷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천사입니다. 

 

[PM 2:00] 담배꽁초가 아니라 '조개'

 

해안가에서 기름을 닦다보니 뾰족하게 솟아난 종이 같은 것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예전에 외할머니를 따라 자주 갯벌에 나가 보았기 때문에 조개일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함께 동행한 기자에게 "이거 조개가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조개는 무슨 담배꽁초"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개처럼 살아있는 느낌도 없고 흡사 얇은 종이 같은 것이 만질라치면 똑똑 끊어집니다.

 

그러나 담배꽁초라 치기엔 곳곳에 너무 많은 꽁초가 버려져 있습니다. 조심스레 끝부분을 따라 흙을 팠습니다. 기다란 조개가 겉은 물에 씻겨 하얀 모습이지만 안은 기름으로 인해 시커멓게 죽어 있습니다. 담배꽁초가 아닌 조개가 기름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후 3시쯤 되자 차츰 차 오르던 물이 발 앞까지 옵니다.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아쉬운 마음에 쉽게 바닷가를 떠나지 못합니다. 바닷가 위에서 물이 금방 차니 위험하다고 얼른 나오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쉬워 손에 한 웅큼 돌을 쥐고 나옵니다. 들고 나온 돌을 또 육지에서 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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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모아 바위에 기름을 닦아내지만 쉽지만은 않다. ⓒ 신승호

▲ 태안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모아 바위에 기름을 닦아내지만 쉽지만은 않다. ⓒ 신승호

 

[PM 4:30]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예전에는 넓고 넓은 바다가 참 좋았는데 처음으로 넓은 바다가 미워집니다. 검은 보물이라는 기름이 고맙기만 했는데 기름을 닦으며 '나쁜 기름'을 수백 번 되뇌입니다.

 

무책임한 말이지만 기자는 죽어가는 조개를, 굴을, 어떻게 보상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IOPC라는 펀드로 보상을 해준다는데, 내가 그 펀드주인이라면 그저 당장에 몇 배 보상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어떤 원리로 천이 기름을 흡수하는지, 볏짚이 기름을 흡수하는 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해안가의 기름을 닦는 일, 바위를 닦는 일은 흡착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합니다. 세세한 부분은 모두 수작업이 필요합니다. 
 

한 번 갔다 오면 끝인 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갔다고 하기에, 기자는 가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나 태안 갔다 왔다'는 타이틀을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태안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기자는 또 한 번 태안을 찾을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신문에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때, 당신도 기자와 함께 동행 길에 오를 수 있길, 그리고 그 아픔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양대학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2.29 12:18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양대학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안 #기자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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