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더욱 가벼워지겠습니다

등록 2007.12.29 15:17수정 2007.12.2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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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만 따로 이사를 나온 뒤, 남편은 저녁 7시만 되면 퇴근을 합니다. 저의 건강 상태도 심각한 데 딸의 죽음으로 마음까지 힘든 저를 위한 배려지요.


신문사 생활 17년에 따듯한 인품으로 그 동안 얽히고 설킨 인연들과의 송년 모임이 줄을 섰을 테지만 남편은 일체의 모임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집으로 옵니다.


그래도 어제(28일)는 술이 거나해서 밤 10시경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공직으로 직장을 옮긴 지 2년째. 공식적인 송년 모임인지라 어쩔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침 저녁 식사 후 한숨 자고 막 깨어났을 때 남편이 돌아왔기 때문에 저녁상을 차릴 기운이 있었습니다.


"청국장하고 밥 줘. 당신이 만든 계란찜이랑."


술자리에서 살짝 빠져 나왔다는 남편을 위해 저녁상을 차릴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밥숟갈을 놓자마자 남편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곤하게 자는 남편을 깨우고 싶지 않아 어젯밤 우리 부부는 잠자리를 바꾸어 잤습니다.


딱딱한 바닥을 좋아하는 남편과 폭신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뼈끼리 와드득거리므로)내가 잠자리를 바꾼 덕분에 자다가 몇 번 잠이 깨었고, 새벽에 보니 남편도 맨 바닥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선 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몸은 엉뚱하게 부엌에서 수선을 떱니다. 양배추를 찌고 나물을 데치고 물러버린 고추를 씻고 당근 주스를 따르고 접시에 과일을 담는 등 내가 먹을 것만 식탁 가득 챙겨 놓았습니다. 남편 것까지 챙기다가 에너지가 떨어지면 하루가 꼬이기 때문에 남편이 먹을 것은 남편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고 내 입에 맞추어 직접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지 모르겠습니다. 호흡 곤란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지난 몇 달 동안 지쳤던 몸을 부지런히 살리어 봄이 오면 다시 건강한 몸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어느 때보다 제 몸 사랑에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유방암 재발 3년째가 되는 새해에는 꼭 건강을 회복할 겁니다.


그럴 자신이 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 속에서 나는 더 단단해졌고 자신과 세상을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은 번뜩이는 재치가 아니라 따듯한 가슴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여름 내내 몸의 고통과 함께하며 또 가을 끝자락, 날벼락 같은 딸의 죽음을 당하며 제게 찾아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내 앞에 닥쳐 온 불행은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내려놓게 했습니다. 큰 짐을 내려놓으니 자잘한 짐을 내리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싶은 욕심, 몸에 찾아 온 병을 쫓아버리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책감 등이 사라지니 몸과 마음이 가볍습니다.


가벼운 마음에서 콧노래가 나오고 가벼운 몸은 흔들흔들 춤을 춥니다. 막혔던 눈물샘에 눈물이 흘러 넘치고 남의 고통에 내 가슴이 아파 옵니다. 굳어 있던 근육들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혈관에 따듯한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부엌이 수선스럽자 남편도 잠을 깼습니다.


"나는 그냥 이렇게 딩글딩글 할래. 이불 속에서 딩글대니까 너∼무 좋다."


샤워를 하려던 생각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나는 손바닥만한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가볍게 몸을 푸는 데 한 생각이 올라옵니다.


'오늘 아들 녀석이 오면 (수시에 합격한 아들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술 마시기와 영화보기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새벽형 인간이 되어보라고 해야지.'


나는 새벽형 인간의 장점들을 생각하며 혼자 흐믓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뭐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직도 아들을 어린애로 생각하니? 아들의 삶까지 걱정할래? 자식 잘되길 바란다는 부모의 눈물겨운 사랑, 사실은 부모의 욕심 아니겠어? 내려놓자. 자식을 땅에 내려놓자. 스스로 걸어가는 모습을 대견스레 지켜보기만 하자.'


"여보야, 열 시다. 아침 먹자."

2007.12.29 15:17 ⓒ 2007 OhmyNews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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