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시인은 혁명가입니까?

[서평] 김남주 시인의 <사랑의 무기>

등록 2007.12.29 19:30수정 2007.12.29 19:30
0
원고료로 응원
a

<사랑의 무기> ⓒ 창작과 비평

<사랑의 무기> ⓒ 창작과 비평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고,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남민전 사건으로 옥중 생활하였으며, 1994년 2월 13일 육신 장막을 놓은 김남주 시인을 시로 만날 때마다 왠지 마음이 아파 온다. 그가 잠든 망월동 묘비에 아로새겨진 글귀는 이렇다.

 

온 몸을 불 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시인의 영혼 여기에 잠들다

 

온 몸을 불 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이가 한 둘이 아니건만 그 만큼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이도 드물 것이다.

 

<1990. 10. 29> 이제까지 내가 쓴 시 참 보잘것없다. 내 나이 마흔 다섯, 이제 시작이다 내년부터는 생활 속으로 들어가자. 거기 가서 끝간데까지 사랑하고 증오하자. 중용은 시가 아니다. 그것은 성자들이나 할 일이다. 시인은 성자가 아니다. 혁명하는 사람 그가 시인이다.

 

시인을 '혁명가'라 명명한 그에게 정말 묻고 싶다. '정말 시인은 혁명가입니까?'

 

혁명은 책상머리에서 고상한 척하는 이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신념과 양심에 바탕하여 인민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바치는, 인민과 시민의 인권을 압제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시인을 혁명가라 이름한 김남주님의 <사랑의 무기>를 접했다. 오랜만에 시집을 손에 잡으니 종이가 바랬다. 비록 빛 바랜 종이지만 시인을 혁명가라 이름한 님의 채취가 코끝을 자극한다.

 

저기 가는 저 큰애기를 보아라
새참으로
막걸리 든 주전자를 들고
보리밥과 김치로 가득한 바구니를 이고
반달 같은 방죽가를 돌아
시방 논둑길을 들어서는
부푼 저 가슴의 처녀를 보아라

 

마른 자리 반반한 풀밭을 골라
빨갛게 원앙을 수놓은 하얀 보자기를 깔고
그 위에 들밥을 차리는 농부의 딸을 보아라
이 마을에 아니 이 나라에 하나뿐인
검은 치마 하얀 저고리를 보아라

 

- 아부지 그만 쉬셨다 하셔요
저만큼에서 허리 굽혀 나락을 베는 아버지 곁으로 가
아버지 대시 나락을 베고
- 아저씨 밥 한술 뜨고 가세요
지나가는 낯선 사람도 불러
이웃처럼 술도 한잔 드시게 하는
조선의 딸 그 마음을 보아라
마을에 하나뿐인 아니 이 나라에 하나뿐인

 

- '조선의 딸'

 

'조선의 딸'은 거룩하다. 조선의 딸은 아름답다. 막걸리와 보리밥에 김치만 가득한 바구니이지만 행동 하나 하나 마음 하나 하나는 아름답고 거룩하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섬김, 길손을 위한 마음은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농부의 딸은 실로 생명을 간직한 땅처럼 생명을 간직한 거룩한 딸이다. 

 

그들에게 노동자 농민에게 나는

위로의 말 한마디 해주지 못했소

나 자신이 누구로부터 위로받고 싶었소

그들이 돌아가고 나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소

이번에 싸움에서 이긴 것은

불의가 아니었다

이번에 싸움에서 진 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선거에서 싸움에서 이긴 것은

돈이고 양키제국주의의 총칼이고 음모였다

정의와 싸움에서 불의가 이겼다고 해서

불의가 불의 아닌 것은 아니다

불의와의 싸움에서 정의가 졌다고 해서

정의가 정의 아닌 것이 아니다

 

- '그날' 중 일부


사람들은 불의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올해 대한민국 유권자 절반은 돈을 벌 수 있다면 부정직과 부도덕은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다는 선택을 했다. 정의보다 불의를 택했다. 김남주님이 살아있었다면 2007년 대한민국 유권자 선택을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시인이 혁명가라 했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정의보다 불의를 택하지는 않았을까? 진보와 개혁도 보수보다는 덜 하지만 불의에 빠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의와의 싸움에서 정의가 졌다고 정의가 아닌 것은 아니다. 정의와 싸움에서 불의가 이겼다고 불의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김남주 시인의 말에 우리는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 불의에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사랑하는 이여 그 누가 묻거들랑

당신 남편은 어디 가고 없냐고 묻거들랑

말해주오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 갔다고

 

사랑하는 이여 그 누가 묻거들랑

당신 남편은 어디 가서 무얼 하냐고 묻거들랑

말해주오 총칼 메고 싸움터 갔다고

 

사랑하는 이여 그 누가 묻거들랑

당신 남편은 왜 아직 돌아오지 않냐고 묻거들랑

말해주오 지금 그는 감옥에 있다고

서슴없이 자랑스럽게 말해주오

몸은 비록 갇혔어도 혁명정신은 살아 있나니

 

- '편지'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 가서 정의와 불의를 위하여 살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음을 시인은 말한다. 인민을 압살한 권력이 자신의 몸을 가두었지만 혁명 정신은 살아있다는 외침은 시인을 혁명가라 이름지은 김남주 정신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사랑의 무기>에는 창작과 비평에 <진혼가>, <잿더미>을 통하여 문단에 등단한 1974년부터 출옥까지 시들을 모았다.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 그는 소시민적 지식인적 것과 철저한 결별을 통하여 노동계급적 시각을 가진 시인임을 알 수 있다. 80년대 전형적인 민족민주시인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김남주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 자신을 다시 반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느슨해진 상태다. 정의와 공의, 민주주의를 외쳤던 때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의와 공의보다는 자본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시인이 혁명가라는 규정은 80년대에는 적용될 수 있지만 21세기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시대가 변했다. 물론 우리 사회 체제가 과연 80년대와 전혀 다른가? 질문을 할 때 아니라고 단정을 할 수 없지만 이제 민족과 자주만을 외칠 수는 없다. 우리가 사회가 계급화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도식적인 규정은 문제가 있다.

 

우리가 도식화된 계급구조에만 머물지 않고 김남주 시를 우리 시대에 읽어면서 아직도 남아 있는 억압과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민주와 자주, 평화통일을 재정립한다면 김남주 시는 결코 80년대에만 읽혀진 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랑의 무기>는 5부 71편을 묶은 시편이다.

덧붙이는 글 | <사랑의 무기> 김남주 지음 ㅣ 창작과 비평사  ㅣ1991년 ㅣ2,500원

2007.12.29 19:30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사랑의 무기> 김남주 지음 ㅣ 창작과 비평사  ㅣ1991년 ㅣ2,500원

사랑의 무기

김남주 지음,
창비, 1989


#김남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