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폐교땅에 헤딩하려고? 주민도 없이?

'정선 아라리'가 흐르는 폐교 문화공간의 시인 진용선씨와 연극인 김도후씨

등록 2007.12.31 15:16수정 2007.12.3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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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박물관. 폐교를 활용해 박물관으로 꾸몄다. 어릴 적 추억을 찾아 먼 거리를 달려온 관람객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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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후 관객과 함께 아라리예술극장에서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과 함께. ⓒ 예술극장


내 어릴 적 다니던 분교는 문을 닫은 것도 모자라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슬라브 건물로 지어진 그 학교는 작은 교무실을 포함해 세 칸짜리였다. 흰 페인트가 칠해진 학교 건물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보다 앞서 다니던 학교는 초가지붕을 한 작은 흙집 건물이었다. 마당도 가정집 마당처럼 작았고, 큰 비가 온 어느 날 건물이 물에 쓸려가고 말았다.


그런 후 마을 사람들은 공동묘지 터를 깎고 다듬어 학교를 지었다.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죽은 자의 뼈를 추려내며 지은 건물이라 어둠이 내리면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초가집에서, 2학년을 새로 지은 학교에서 공부하다 읍내로 전학했다. 그것이 사라진 학교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다. 교육청과 관할 초등학교에 사라진 학교의 사진을 구할 수 있냐고 물으니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즈음 내가 다니던 분교도 영원히 잊혀질 것이다. 강원도 정선, 인구가 줄면서 많은 학교들이 문을 닫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학교 또한 많은 고장이다. 모교를 잃어버린 이들의 숱한 사연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리랑의 고장인 강원도 정선. 사라질 뻔한 폐교를 멋진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이들이 있다. 쓰러져가는 학교에 생명을 불어넣고 텅빈 학교 운동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인 이들은 진용선 시인과 연극연출가 김도후다. 이들이 없었다면 폐교는 농사용 창고로 쓰이거나 흉물로 버려질 것이었다.

[시인 진용선] 세계 방방곡곡의 아라리, 한 학교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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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리랑학교 전경. 정선아리랑연구소, 정선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으로 활용되는 폐교. 추억의 박물관은 찾고 싶은 박물관 첫 순위로 꼽힌다. ⓒ 강기희


진용선 시인. 대한민국에서 폐교를 활용하여 성공한 사례로 치자면 첫 손에 꼽히는 사람이다. 시인이자 잘 나가는 직장인으로 살던 그가 고향인 정선으로 돌아온 것은 1990년대 초. 그가 버릇처럼 흥얼거리던 '정선 아라리'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정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내려오던 정선아리랑. 허나 그것은 구전으로만 떠돌 뿐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그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가장 먼저 '정선아리랑연구소'를 꾸렸다. 1991년의 일이다. 연구소 문을 연 그는 정선의 골짜기를 찾아 다니며 정선아라리 가사를 채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정선아리랑 가사집>이다.

이후 그는 눈을 밖으로 돌렸다. 중국조선족을 찾아가 정선아리랑을 채집했으며,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해 중앙아시아까지 발품을 팔았다. 그동안 그가 아리랑과 관련해 펴낸 책만 해도 10여 권이 넘는다.

그는 정선아리랑이 불리워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다. 국내든 국외든 현장에 가서 그들이 부르는 정선아리랑을 채집했다. 정선아리랑은 아시아권에서는 어느 나라고 불리워졌다. 변형된 소리임에도 아라리 가락은 틀림없었다.

그의 아라리고개는 연구소-학교장-박물관으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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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스카프.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아리랑 스카프. 스카프에 아리랑 악보와 가사가 적혀있다. 추억의 박물관 소장품. ⓒ 강기희


1993년부터는 '정선아리랑학교'를 열었다. 아리랑을 보급하기 위함이었다. 이곳 저곳 떠돌다 지금의 폐교엔 1997년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정선아리랑을 배워간 이만 해도 4만여명에 이른다. 그 중에선 외국인도 많다. 일본의 호소다 고등학교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정선을 찾아 아리랑을 배우고 간다.

2005년 초엔 정선아리랑 부설 '추억의 박물관'을 개관했다. 아리랑을 채집하기 위해 국내외를 다니면서 모았던 각종 자료를 썩혀두기 아까워 아예 박물관을 만든 것이다. 그가 수집한 자료만도 2만점이 넘는다. 공간이 부족해 한 번에 전시할 수도 없다.

궁여지책으로 특별전이나 기획전을 만들어 관련된 자료만을 공개한다. 관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근현대 자료들이라 생소한 것보다는 눈에 익숙한 자료들도 많다. 그렇기에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은 "아빠가 어릴 땐 말이야" 하며 자료들을 설명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시간이 없는 곳이다.

그가 정선아리랑 연구소 소장으로, 정선아리랑학교 교장으로, 추억의 박물관 관장으로 살아온 세월이 18년. 그의 모든 직함은 정선아리랑과 관통한다. 정선아리랑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도 없을 그의 직함들은 한 길을 열심히 걸어온 결과의 산물들이다.

"관의 지원없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어서세요"

진 시인이 폐교를 활용해 정선아리랑학교(구 매화분교, 정선군 신동읍 소재)를 개교한 지도 10년이 넘었다. 정선아리랑학교는 폐교 활용 모범사례로 알려진 곳이다. 이제는 문화공간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그에게 폐교를 어떻게 활용하면 성공할 수 있냐는 우문을 던졌다.

"폐교가 많아졌습니다. 시골에서는 학교가 생활문화공간이었는데, 그게 다 사라지고 있어요. 안타깝지요. 폐교가 다시 문화공간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폐교를 얻을 일도 아닙니다. 시설 유지비와 운영비가 엄청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폐교를 활용해 문화공간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성공하는 사례가 그리 많지 않아요. 

폐교 활용의 경우 소프트웨어가 먼저 만들어진 후 하드웨어를 채워야 하는데, 사람들은 집을 먼저 짓고 공간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리를 잡을 때까지의 시간이 길어지거든요. 결국 유지비와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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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야외무대 추억의 박물관 야외무대에서 정선아라리 소리꾼 장석배·배귀연씨가 학생들에게 정선아라리를 들려주고 있다. ⓒ 강기희


- 정선아리랑학교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요?
"폐교의 주인은 마을 주민입니다. 주민과 화합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추억의 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딱지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마을의 상점에서 2000원 이상의 물품을 구입하면 딱지를 한 장 줍니다. 그 딱지가 박물관 입장료인 셈입니다. 마을과 공생하기 위한 자구책인데, 관객이나 주민들이나 평이 좋아요."

- 폐교를 활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요?
"폐교를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게릴라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먹고살 것은 스스로 만들 줄 알아야 주저앉지 않습니다. 게릴라 정신이 없으면 성공하기 힘든 구조가 폐교입니다. 좀더 접근하자면 폐교는 그 지역 사람이 운영해야 합니다.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잘 아는 문화게릴라들이 자리를 잡을 때 성공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관의 지원이 끊기거나 비용 감당이 힘들면 미련없이 떠날 수 있거든요. 지역으로 보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정선아리랑학교 부설 '추억의 박물관'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정선지역의 문화관광 자원인 정선아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선 지역 어딜 가도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정선아리랑이라고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소리를 연구하고, 제대로 배울 수 있고, 아리랑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볼 수 있는 곳은 진 소장이 만든 정선아리랑학교밖에는 없다.

사람이 문화를 만드는 것이고 보면 진용선 소장은 폐교를 활용해 성공한 모범 사례가 될만한 일을 많이도 벌였다. 스칠 듯 보면 성공한 그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지간한 뚝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문화를 가꾸고 만들어내는 일이 그리 쉽다면 이 나라의 시골 문화가 요 모양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연극인 김도후] 어린이 사라진 자리, '아라리 창극' 관객이 메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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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라리공연예술원 폐교를 활용하여 멋진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사진은 건물 절반의 모습이다. ⓒ 강기희


정선아리랑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급하는 일을 진용선 시인이 맡았다면 정선아리랑을 대중화 시킨 이는 연극연출가 김도후씨를 손꼽는다. 둘 다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인 두 사람의 공통적인 컨텐츠는 '정선아라리라고 일컫는 정선아리랑'이다.

두 사람이 가는 길 중에서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전통을 살린 학술적 혹은 문화적 개념으로의 정선아리랑'이냐 '대중적 공연예술로서의 정선아리랑'이냐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도후씨가 정선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9년. 연극 <헛소동아라리>를 정선에서 공연하면서부터이다. 이후 그는 정선아리랑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으며, 매년 정선아리랑을 주제로 한 창극을 만들어냈다. 2001년엔 '신들의 소리', 2002년엔 '아우라지', 2004년엔 '거칠현'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가 만든 작품은 정선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애절하게 이어지는 정선아리랑의 실체를 확인한 사람들은 아리랑의 고장인 정선으로 몰려들었다. 찾아오는 이들을 맞아주기 위해 만든 것이 정선아리랑 창극이다. 정선 5일장이 서는 날 공연하는 창극은 연일 만석을 기록했다. 눈물을 흠뻑 쏟게 만드는 정선아리랑의 매력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지역에 맞는 컨텐츠 개발이 폐교 활용의 성공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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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처녀상. 공연예술원 앞에 있는 정선아라리 처녀상의 모습이다. ⓒ 강기희

김 원장은 정선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정선아리랑을 어떻게 하면 많은 이들에게 알릴 것인가를 고민한 예술가였다. 2006년 5월엔 아예 정선에 둥지를 틀었다.

그가 만든 둥지는 '정선아리랑공연예술원'이다. 마침 폐교(구 광하초교, 정선군 정선읍 소재)되는 학교가 있어 그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교실도 제법 있어 공연예술원으로 쓰기에도 좋았다. 김도후 원장은 빈 학교에다 문화학교를 만들어 각종 강의도 진행한다. 또한 관사는 무형의 소리인 정선아리랑을 유형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숙소로도 제공한다.

그는 또 교실 한 칸을 뜯어 120석 규모의 소극장을 꾸몄다. 음향과 조명 또한 수준급이다. 연극과 음악 공연을 언제든 열 수 있는 정선 지역의 유일한 소극장이다. 서울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전문 공연 극장의 탄생은 정선의 공연예술 문화를 몇 단계나 업그레이드시켰다.

그의 경우에도 소프트웨어가 먼저 완성되고 난 후 폐교를 찾아 들어갔다. 공연예술원이 개관을 하고서 곧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원인이 그것이다.

예술원을 개관한 이후 그들의 무대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연극 '부부별곡'을 비롯해 '이야기가 있는 정선아리랑 명인명품전', 가족뮤지컬 '말괄량이 삐삐', '정선아리랑 난타공연', 연극 '비행기재', '하녀들', 뮤지컬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 등등.

그가 만든 대부분의 공연 중심엔 '정선아리랑'이 있다. 정선아리랑으로 풀어낼 수 있는 연극의 소재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만큼 정선아리랑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크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지역의 문화를 찾아서 다듬고 포장해야 살아남는다"

정선아리랑과의 만남이 운명적이라고까지 말하는 김도후 원장에게 폐교 활용의 성공 요인을 물었다.

"아직 2년도 되지 않았기에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끊임없는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창작자의 마음을 놓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예술작품을 지역사회에 공급해 줄 의무가 있는 셈이지요. 신선한 충격을 반복해 줌으로써 지역의 문화예술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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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후 연출가 정선아리랑공연예술원을 운영하는 김도후씨. ⓒ 강기희

- 폐교를 예술원으로 만들었는데 맘에 드나요?

"대만족입니다. 예술원이 자리잡은 곳은 수려한 동강이 있는 마을입니다. 어딜 가도 이런 자연 조건은 없을 겁니다. 넓직한 운동장에다 관사까지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서울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다들 놀랍니다. 멋진 장소라고요."

- 정선은 아직 변방의 마을인데 공연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정선은 공연문화의 불모지였습니다. 우리가 그걸 깨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예술원을 개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공연문화를 수용하려는 정선인들의 잠재적 욕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상설 공연과 수시 공연을 하고 있지만 늘 객석이 찹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 폐교의 활용에 대해 말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폐교를 활용하고 싶은 다른 이들에게 조언을 한다면요?
"지역을 위해 할 수 있는 컨텐츠가 확실해야 합니다. 지역과 떨어져서는 어떤 문화도 만들어내지 못하거든요. 정선의 경우 '정선아리랑'이 있지 않습니까. 정선아리랑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엄청납니다. 그것을 잘 포장하고 다듬어 세상에 내놓아야 합니다. 문화산업이라는 게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지역의 농산품을 서울에 가서 팔 듯, 지역의 문화를 세상에 팔아 무형의 자산으로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렇듯 어느 지역이든 폐교를 활용해 성공하려면 그 지역만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가치를 창출해 낼 줄 알아야만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의 문화와 시골의 문화가 서로 교류하게 되고, 시골 사람들도 문화를 향유하면서 비로소 선진 문화인으로서의 지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폐교 임대, 싸다고 쉽게 봐서는 큰코 다치지

폐교활용에 있어 성공할 수 있는 요인 몇 가지
1. 지역주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컨텐츠가 확실해야 한다.
2. 폐교 활용에 있어 성공을 거두려면 홀로설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3. 부단한 노력으로 새로운 작품을 생산해내야 한다.
4. 해당 지역의 지역주민으로부터 인정 받아야 한다.
5. 지역주민과 공생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6. 폐교는 본인 부담으로 임대하기 보다는 지자체로부터 무상임대를 받는 게 좋다.
7. 소프트웨어를 구축한 후 하드웨어(폐교)를 찾는 게 좋다.
진용선 시인이나 김도후 연출가나 폐교활용의 성공에 대한 기본 조건은 지역이다. 지역주민과 지역을 떠나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음을 두 사람은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진용선 시인이나 김도후 연출가가 활용하는 폐교는 정선군에서 무상 임대를 받고 있다. 그러하니 최초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부담이 적다. 물론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지자체나 국무총리 산하 복권기금, 또는 문화관광부 등에서 수억 대의 자금을 지원받은 폐교도 있다.

그런 곳이라고 다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금 지원만 받고 슬며시 문 닫는 문화브로커들도 있다. 마음은 있으되 컨텐츠 개발에 실패하여 조용히 문 닫고 야반도주 하듯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그럴 경우 지원한 기관이나 단체는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회수도 불가능하고 폐교 활용의 연속성도 떨어진다. 지역으로 보아서 계륵이냐, 보물이냐를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폐교 활용법이지만 주어진 기본만 충실하면 성공하지 않을까 싶다. 지역도 살아나고 문화도 살릴 수 있는 폐교 활용, 이제부터 시작이다.

덧붙이는 글 | 추억의 박물관 / 문의 033-378-7856 홈페이지 www.ararian.com
추억의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정선아리랑공연예술원 / 공연 문의 033-562-3821 홈페이지 www.muyonsi.com


덧붙이는 글 추억의 박물관 / 문의 033-378-7856 홈페이지 www.ararian.com
추억의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정선아리랑공연예술원 / 공연 문의 033-562-3821 홈페이지 www.muyons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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