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에 보리에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차운형과 원용철은 수송기가 모하비 상공에 도달할 때까지 묵묵히 앉아 있다가 멀리서 모래 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 천천히 낙하할 채비를 챙겼다. 이젠 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았고 그저 일상적인 일을 대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둘은 헬기 레펠 훈련을 이수하고 낙하도 수십 차례나 했었다.
“왜 내가 볼리비아에 돌아갈 수 없느냐 하면…….”
보리에스가 말문을 열었다. 셋은 벤을 타고 모하비 공군 비행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수송기를 타고 부대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체 게바라라는 혁명가가 있었지.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진정으로 민중을 사랑했기에 의사라는 안락한 직업도 포기하고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가했었지. 혁명에 성공한 후 그는 국가 중앙은행총재도, 제2인자의 권좌도 미련 없이 버리고 아프리카로 달려갔어. 지독한 혁명가였거든. 그는 쿠바식 혁명을 콩고에 접목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볼리비아로 오게 되었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혁명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지.”
보리에스가 담배에 불을 붙여 깊숙이 빨아 댕겼다.
1967년 10월 8일 새벽이었다. 볼리비아 산악에서 은거하던 체의 게릴라 부대는 식수공급이 곤란해지자 식수거점 확보를 위해 협곡의 시냇가에 집결해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CIA와 볼리비아군의 정보망에 포착되었고 오후 1시를 기해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게릴라 부대의 완강한 저항에 헬기와 전투기까지 동원했다. 의외로 전투상황이 심각해지자 체 게바라는 부대를 2개조로 나누어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우선 퇴각시키고 자신은 소수의 병력과 함께 정부군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 역시 다리에 총탄을 맞은 부상자였지만 실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격렬하게 싸우다가 결국 생포당하고 말았다.
체 게바라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한 미국과 볼리비아는 다음날 12시에 서둘러 총살을 집행했는데, 체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볼리비아 정부군의 한 병사가 상관의 사격명령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자 체는 “쏴! 겁내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 넌 할 수 있어!” 하면서 오히려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자 그 병사는 돌아서서 술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체의 나이 39세였다.
“나는 체의 전령으로서 함께 생포되었지. 그 당시 스물 하나였는데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나이였지. 체의 죽음 앞에서 나도 빨리 죽여 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어. 그런데 안 죽이는 거야. 나한테서 체와 관련된 진술을 들을 요량으로 집행을 하루 늦춘 거야. 그 하루가 내 목숨을 살린 거지.”
보리에스가 다시 담배에 불을 댕겼다.
“늦은 밤 혼자 갇힌 채 이제 체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허무해지더라고. 내가 존경하고 따르고 의지했던 체가 막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 내가 혁명이 뭔지나 알았나? 단지 체를 좋아했을 뿐이었는데? 그때 미합중국 CIA요원이 나를 회유하더군. 내가 흔쾌히 승낙하자 그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서 나를 빼돌린 거야. 그 길로 버뮤다에 오게 된 거지.”
보리에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깊이 빨았다. 그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원용철은 짐짓 그를 외면하며 벤의 꽁무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막의 모래 먼지가 벤을 따라 자욱하게 일어났다.
훈련은 이제 마지막 4단계만 남겨두고 있었다. 3개월 동안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나자 보리에스가 고생은 끝났다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4단계는 그동안 받은 훈련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것이었다. 완전군장으로 100킬로미터 행군, 10킬로미터 산악구보, 제식, 사격, 유격, 공수를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정확하게, 얼마나 능숙하게 해내는 지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측정관은 스테판 대위를 비롯한 중대장들이었다.
처음 신병훈련을 받을 때만 해도 초가을이었는데 시나브로 계절은 한겨울에 들어앉아 있었다. 영하로 곤두박질친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측정을 하느라 꼬박 2주가 지나갔다.
차운형과 원용철은 최종 측정항목인 낙하를 위해 수송기에 탑승하면서 문득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에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 측정이 종료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긴장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둘은 기체가 모하비 상공에 다다를 때까지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조종사로부터 낙하 사인을 받고서야 부리나케 채비를 차려 창공에 몸을 던졌다.
둘의 몸은 수송기가 가로지르면서 생긴 불규칙해진 기류에 휩쓸려 한번 솟구쳤다가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둘은 사지를 최대한 벌려 공기의 저항을 만들고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300피트 상공까지 강하하자 힘껏 낙하산을 펼쳤고, 지상에 가까워져선 일제히 목표물에 사격을 가했다. 그렇게 가상의 적을 제압한 후 낙하지점에 정확하게 착지했다.
“제군들, 추운 날씨에 수고 많았다. 이런 혹한기에 측정을 받는 것만도 힘든데, 결과까지 아주 우수하게 나와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대단한 신병들을 보게 되어 본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스테판 대위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띠고서 둘의 손을 힘껏 잡았다. 둘은 드디어 훈련을 마친 게 실감이 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신병 교육을 훌륭하게 이수시키다니. 보리에스 상사, 수고했어.”
보리에스와 악수하며 스테판 대위가 신뢰 어린 눈빛을 보여주었다.
측정관들로부터 탁월한 평가를 받은 차운형과 원용철은 제1중대에 배속되었다. 버뮤다에서도 최정예 요원들로 구성된 중대였다. 보리에스 역시 사수의 자격으로 함께 배속되었다. 둘이 부대장에게 임관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보리에스는 외박을 인솔하기 위해 벤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2007.12.30 12:05 |
ⓒ 2007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