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까

[시 더듬더듬 읽기 75] 김승희 시 '꿈과 상처'

등록 2007.12.30 17:51수정 2007.12.3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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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와 승화루(20004.1). 시간에 갇힌 것들 중엔 아주 드물게 보석이 되는 경우가 있다. ⓒ 안병기

창덕궁 낙선재와 승화루(20004.1). 시간에 갇힌 것들 중엔 아주 드물게 보석이 되는 경우가 있다. ⓒ 안병기
 
 
시간의 그물이 나를 옭아매고 있다
 
내일이면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마저 뜯어내야 한다. 마치 한 해를 깔끔하게 갈무리하려는 듯 오랜만에 눈이 내렸다. 앞산이 감쪽같이 하얀색으로 제 모습을 성형했다. 나뭇가지마다 눈송이들이 송알송알 맺혀 있다. 

 

내일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나이 한 살을 더 먹어야 한다는 것.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거움이 침체의 늪에다 나를 떨어트리고 간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세상 어딘가에는 물 대신 시간이 고여 있는 늪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엔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흘러갔으면 싶었다. 그래서 어서 빨리 내 앞에 덫처럼 놓인 '금기'들을 깨트리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그런 내 의중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진양조로 느리게 흘러갔다. 만약 시간이 눈에 보이는 물체였다면 등이라도 떠밀었을 것이다.

 

그 숱한 기다림 때문이었던지, 막상 20대가 되었을 때 내 뇌세포들은 이미 노화를 겪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술이나 담배 등 많은 금기들이 차례로 깨트려졌다. 금기가 하나씩 깨트려질 때마다 통쾌함을 느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통쾌함도 신명도 느낄 수 없었다. 청춘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그 억압이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서른을 넘어서자, 세월은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는 차처럼 무제한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시간을 바라보는 내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시간이 늦게 흘러갔으면 싶었다. 좀 더 천천히 흘러갈 것을 주문하는 내게 시간은 말했다.

 

"미안해. 난 내 마음대로 걸음을 빨리하거나 늦출 수 없어. 내 걸음걸이는 항상 일정하거든. 난 그렇게 수억 광년을 걸어왔어."

 

그러므로 인간이 언감생심 시간의 속도에 간섭하려든다는 것은 얼마나 불경스런 일인가. 게다가 나이 들면 시간에 대한 감수성도 점차 둔해지기 마련이다. 체념이란 감수성이 전혀 가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간은 인간이 품은 꿈에 상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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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표지. ⓒ 세계사

시집 표지. ⓒ 세계사

나대로 살고 싶다
나대로 살고 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이 절망이구나

- 김승희 시 '꿈과 상처' 전문

 

김승희 시인의 '꿈과 상처'라는 시를 읽는다. 1952년 광주에서 태어난 김승희 시인은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 '꿈과 상처'라는 시는 1991년에 나온 시집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세계사)에 실려 있다. 시인의 나이 마흔 즈음에 쓴 시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불혹'의 나이에 직면한 심경을 읊은 것이라고나 할까.

 

시인은  "나대로 살고 싶다"라는 게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고 말한다. 첫 연의 "나대로"는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 나름대로 생을 꾸려가고 싶다는 강력한 희망사항이다.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는 자아란 얼마나 자신만만한가. 

 

그러나 나이드니 이젠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라고 자신의 운명을 수긍한다. 앞 연의 "나대로"와 "나대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변주된다. 앞 연의 "나대로"가 "내가 꿈꾸는 대로"를 뜻한다면 뒷 연의 "나대로"는 "현재 내가 처한 대로"를 의미한다.

 

앞 연의 "나대로"가 능동적인 나를 뜻한다면 뒷연의 나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나를 뜻한다. 어린 시절, "나대로 살고 싶다"라는 말은  꿈과 희망이 될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게 되자 그 말은 절망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어느 샌가 꿈이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시인은 비로소 자신이 시간 안에 갇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나 역시 '불혹'이란 나이를 통과해 왔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불혹'이란 말을 지어낸 공자를 생각하곤 했다. 그가 살던 시대에도 내가 살고 있는 지금처럼 수많은 유혹이 있었을까를. 그리고 세상 어느 것에도 혹함이 없다면, 그런 생이란 굴곡 하나 없는, 얼마나 밋밋한 생일까를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나이에 대한 공자의 지론을 전혀 인정할 수 없었다.

 

십 년의 세월이 더 흘러가서 지천명의 고개에 올라섰을 때,  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간은 결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생애는 거미의 생이었으며, 내가 살아왔던 시간은 전혀 흘러가지 않은 채 매우 정교하게 쳐진 거미줄이 되어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흘러가버린 시간 안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갇혀 있다. 시간을 낭비한 자일수록 더욱 완강한 거미줄에 갇히기 마련이다. 갇힌 자에겐 희망이 없다. 어떻게 꽉 잠긴 저 시간의 자물쇠를 열고 밖으로 나갈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꿈꾸던 대로 살 수 있을까. "이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으면서도 비명을 지르는 법조차도 잊었구나"라는 생각이 짐짓 나를 슬프게 한다. 슬픔이란 감정은 내가 내 존재의 무게를 달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뜻이다. 새해에는 갇힌 시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올 한 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 "시 더듬더듬읽기'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7.12.30 17:51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올 한 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 "시 더듬더듬읽기'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승희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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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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