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우당길' 유래를 아십니까

서울 중구청, '명동우당길' 명명식을 갖다

등록 2007.12.30 17:27수정 2007.12.3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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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백성들이 국난 때마다 나라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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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름지워진 '명동우당길' 표지판 ⓒ 박도


이제 곧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를 맞아하게 된다. 단기 4341년이요, 서기 2008년이다. 세계에는 약 200여 나라가 있다는데,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나는 최근 호남 의병전적지를 순례하면서 우리나라 의병의 역사를 살펴본 바, 관군이 패하거나 힘이 부치면 고을마다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외적을 물리쳤다.

수나라 당나라 침입 때도, 몽고의 침입, 임진 정유 왜적의 침입, 병자호란 때도 그랬다. 우리나라가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숱하게 외침을 당했건만 국난 때마다 의로운 백성들이 나서서 꿋꿋하게 나라를 지켜왔다. 삼천리금수강산 복된 나라에 사는 오늘의 우리는 목숨을 바쳐 이 국토와 나라를 지켜준 조상에게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다.

명동우당길 명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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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우당길'로 새로 이름지워진 YWCA 정문에서 을지로로 이르는 길 ⓒ 박도


세모(歲暮) 분위기가 물씬한 지난 28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YWCA 정문 앞에서는 서울특별시 중구청 주관으로 ‘명동우당길 명명식’이라는 매우 뜻 깊은 행사가 조촐하게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일 청장을 비롯하여 우당기념사업회 홍일식 회장(전 고대 총장),  이종찬(전 국정원장), 이종걸(현, 국회의원) 우당 후손, 광복회 회원을 비롯한 독립지사 후손과 일반시민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명동우당길 명명식이 있었다.
  
“이 일대 6천여 평은 지금으로부터 일백여 년 전 이조판서 이유승의 고택지로 우당 6형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이들 6형제는 이 고택과 위토를 비롯한 전 재산을 팔아 60여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조국 광복의 초석을 세우셨습니다. 일제 강점하 최초의 독립전쟁인 봉오동전투와 청사에 길이 빛날 청산리대첩의 주역들은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


‘전사불망후사지사(前事不忘後事之師)’라는 옛말처럼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에 스승으로 삼자라는 취지로 오늘 이 자리에 ‘명동우당길’ 명명식은 그 뜻이 매우 거룩합니다. …”

홍일식 회장의 기념사에 이어, 정동일 중구청장의 명동우당길 선포, 그리고 후손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종걸 국회의원이 “오늘 명동우당길 명명식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요, 수도 서울의 긍지이며, 후손으로서 나라사랑하는 일에 더욱 노력하겠다”는 감사 인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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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우당길' 명명식에서 정동일 중구청장(왼쪽)이 길이름을 선포하고 있다. ⓒ 박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어떤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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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 박도


옛 글에 "집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라고 했다. 즉, 진짜 애국자는 국난을 당할 때 나라를 구하겠다고 온몸과 재산을 바친 분들이다.

필자는 항일유적 현장을 답사하고 묵은 책장을 넘기면서, 일제 강점기 동안 온몸으로 맞선 여러 훌륭한 어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뜨거운 겨레 사랑과 나라 사랑에 감동했으며, 한민족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러웠다. 그분들의 정신이 이어지기에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무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보고 들은 바, 우당 이회영 집안은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망명길에 올라 만주의 언 땅에다가 조국 광복의 씨앗을 뿌리는 데 앞장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려 하자 우당은 이동녕, 이상설 등과 함께 상소를 올리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일본과 내통한 일부 대신들이 이 늑약을 맺었고 우당의 아우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항의 표시로 외부 교섭국장 관직에서 물러났다.

우당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찾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독립기지를 세울 터를 물색하기 위해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만주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간도 용정에 머물면서 서전의숙을 설립하기도 했다.

1910년 8월 마침내 나라가 완전히 일제에 넘어가자 그 해 12월, 우당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는 가산을 모두 처분하여 40만 냥(현 시가 약 800억 원 상당)을 마련한 뒤 가솔을 이끌고 망명의 길에 올랐다(권속까지 6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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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지도를 펴놓고 망명을 상의하는 우당 6형제 ⓒ 박도


이들 우당 6형제 가족은 그 해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 단동)에서 머문 후 다시 이듬해 정월 안동을 떠나 횡도천으로, 거기서 다시 출발 2월 초순에야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도착했다. 이어서 석주 이상룡 일가와 일송 김동삼 일가 등 우국 망명객들이 추가가 일대에 속속 도착해 한인촌을 이루자 현지 중국인들의 의혹이 커졌다.

"이전의 조선인들은 남부여대로 산전박토나 일궈 감자나 심어 연명했는데 이번에 오는 한인(조선인)들은 마차 수십 대에 살림을 실어 오는 걸 보면 필경 일본과 합하여 우리 중국을 치러 온 게 분명하니 빨리 꺼우리(한인)들을 몰아내 주시오"라고 현지인들이 유하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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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삼성에 신흥무관학교 토지 매입 및 동포 입적을 청원한 문서, 이회영과 이계동(이상룡 아우)의 명의로 되어 있음 ⓒ 박도


이에 이회영이 나서서 북경에서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협조를 구한 끝에 동포들의 입적과 토지 매매 문제가 원활히 해결됐다.

1912년 합니하에 번듯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우당 일가의 자금과 원세개의 도움으로 토지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로 10년간 약 3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그들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승첩에 주역이 됐다. 일찍이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당 가문을 다음과 같이 기리고 있다.

동서 역사상에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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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어귀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이 전투에 중견 간부로 활약했다. ⓒ 박도


독립투사의 '삼대 각오'

일제하 독립투사들은 '삼대 각오'를 하였던 바, "굶어서 죽을 각오, 얼어서 죽을 각오, 적의 총에 맞아서 죽을 각오"였다고 한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대 후손으로 6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지낸 명문 중의 명문 후예 우당 이회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진년(1928년) 여름, 하루는 가군(우당 이회영)에게서 온 편지를 보니, 급한 사정으로 규숙, 현숙(우당의 2녀 3녀)을 천진의 부녀구제원으로 보내어 성명을 홍숙경과 홍숙현으로 고쳤으니, 편지할 때엔 '구제원 홍숙경'이라고 만하면 받아본다 하시고, 당신은 규창(3남)이를 데리고 무전여행으로 상해를 가니, 혹 다소간 되거든 현아에게로 부치라고 하시고는 지금 떠나면서 부친다고 하셨으니, 세상에 이런 망창(앞이 아득함)한 일이 또 어디 있으리오.
-  이은숙(우당 부인)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쌀이 없어 밥을 못 짓고 밤이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는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이규창(우당 아들) <운명의 여진>


이규창은 북경 시절의 궁핍상을 '1주일에 세 번 밥을 지어 먹으면 재수가 대통한 것'이라며 북경의 제일 하층민들이 먹는 짜도미(雜豆米)로 쑨 죽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는 때가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심산 김창숙의 자서전에도 이회영의 생활형편이 드러나 있다.

우당 이회영은 성재 이시영의 형이다. 가족을 데리고 북경에 사신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생활 형편이 몹시 어려운 모양이지만 조금도 기색을 나타내지 않아 나는 매우 존경하였다. 하루는 내가 우당 집에 찾아가 공원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자고 청하였더니 거절하였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못 초췌한 빛이 역력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의 아들 규학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 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아버지께서 문밖에 나서지 않으려는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주머니를 털어 땔감과 식량을 사오고 전당포에 잡힌 옷도 도로 찾아오게 하였다. 그 일로 우의가 더욱 친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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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우당길' 명명식 뒤 기념촬영(왼쪽부터 우당 4남 이규동, 손자 이종걸 국회의원, 정동일 중구청장, 홍일식 우당기념사업회장, 손자 이종찬 전 의원) ⓒ 박도


한 독립투사의 마지막 말
 
1932년 상해에 머물고 있던 아나키스트 이회영은 일제의 감시로 활동 공간이 매우 좁아졌다. 그 타개책으로 상해를 떠나 만주를 가려다가 11월 17일 대련 일제 수상경찰서에 피검 12일간의 혹독한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망국민으로 조국을 떠날 때는 우당 6형제였건만 광복 후 다섯째 성재 이시영만 살아돌아오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중석 지음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이덕일 지음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박도 지음 <항일유적답사기>를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중석 지음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이덕일 지음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박도 지음 <항일유적답사기>를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명동우당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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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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